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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30] “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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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

전국으로! 전국으로!·‘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강원도의 힘·“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흔들리는 민주노총·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달밤 블루스·“여기는 1호차, 2호차 나와라, 오버~”·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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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의 힘

김헌정은 전국단일노조를 건설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어도 강원도와는 인연이 없었다. 2006년 2월의 어느 날, 속초의 환경미화원들이 경기도노조에 전화를 했다.

2006년 1월 1일부터 속초시는 청소업무를 시설관리공단으로 위탁했다. 시설관리공단은 시청에서 일하던 환경미화원들을 모아서 직무교육을 실시했는데, 이 교육이 환경미화원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공단은 환경미화원들에게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시청에 있을 때 근로계약서를 쓰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때만 해도 시청에서 일한다는 생각에 자세히 읽어 보지 않았다. 시설관리공단으로 넘어온 뒤 왠지 불안해서 한 자 한 자 읽어 보니 섬뜩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결론은 뭐든지 공단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30대 환경미화원들 10여명이 노조를 만들어 보자고 민주노총 강원본부를 찾았다. 강원본부는 아무래도 이 분야에서는 경험이 적었다. 속초의 환경미화원들은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강원도에만 있겠느냐며 수소문을 했고 경기도노조의 이름을 알게 됐다. 연락을 받은 김헌정은 득달같이 속초로 달려갔다. 드디어 강원도에도 전국단일노조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헌정은 전체 환경미화원들을 모아 노조에 대한 교육을 했다. 노조 설립에 강한 열망을 갖고 있던 엄동호 씨, 이성국 씨 등 30대 환경미화원들과는 따로 1박2일 수련회도 가졌다. 수련회에는 고향이 춘천이던 이유민 노무사와 김헌정의 아내 양미경도 자리를 함께했다.

경기도노조는 2002년부터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부설 민주노무법인으로부터 노무사를 파견받고 있었다. 이혜수 노무사·이유민 노무사 등이 1년에서 2년가량 경기도노조 법률부장으로 근무했다. 양미경은 이때 보건의료노조를 나와 양주지역에서 참교육학부모회 활동을 하고 있었다.

당시 속초의 환경미화원들이 직면한 가장 절박한 문제는 공단 관리자들의 막무가내 식 자리배치였다. 쓰레기를 나르고 청소차에 실은 뒤 청소차 뒤에 매달려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하는 상차작업은 환경미화원 업무 가운데에서도 가장 힘든 일이다. 그런데 관리자들은 60세가 된 환경미화원과 손가락이 세 개뿐인 환경미화원을 지목해 이 일을 하라고 했다. 이것은 청소차에서 떨어져 죽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격분한 재활용품 수집 운반을 하던 환경미화원들이 항의를 하자 관리자들은 이들 20명에게는 차를 배정하지 않고 일도 시키지 않았다. 20명에는 엄동호 씨, 이성국 씨 등이 포함돼 있었다.

김헌정과 함께한 수련회를 통해 노조가 무엇인지 배운 엄동호·이성국 씨는 스스로 시청과 공단에 맞서기로 했다. 그들은 평상시처럼 출근해서 출근기록부에 기록을 하고 시청 앞으로 갔다. 30대 초반 한창 나이답게 이들은 천막도 치지 않고 시청 앞 길바닥에서 피켓을 들고 농성에 들어갔다. 농성 첫날, 김헌정은 곁에서 지켜보면서 기본적인 사항만 도와줬다.

강원도의 겨울은 여간 매섭지 않다. 큰 눈 내리는 날도 많다. 이들은 비가 오건 눈이 오건 길바닥에 앉고 여차하면 드러누워서 자리배치를 원상회복하라고 외쳤다. 심지어 점심도 공무원들 보라고 길바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오후 3시가 되면 일을 마친 환경미화원들이 가세를 해서 또 집회를 하고 거리행진을 했다. 이렇게 하기를 37일째, 시설관리공단은 조합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자리배치를 원상복귀했다.

속초지부는 5월부터 단체교섭에 들어갔는데 처음부터 시를 교섭에 나오게 했다. 속초시 공무원들은 시설관리공단과 교섭을 하라고 거부했지만 본조 간부들이 노련하게 밀고 들어가서 사용자 측으로 시와 시설관리공단이 함께 나오는 교섭 구도를 만들었다.

속초가 한창 단협 체결을 위해 투쟁 중이던 6월 14일, 강릉시청 소속 환경미화원들이 방문했다. 강릉의 이우섭 씨, 남기동 씨 등은 강원일보에 “2006년 9월 강릉시설관리공단이 설립되고 시의 청소업무를 위탁받아 처리한다”는 기사가 실린 것을 보고 노조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다.

엄동호 속초지부장은 느긋한 표정으로 이렇게 답을 했다.

“우리는 전국적으로 조직이 있는 노조에 가입했습니다. 거기서 도와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이보다 앞선 2월 28일 경기도노조가 추진하던 전국단일조직이 건설돼 경기도노조는 전국민주연합노조로 바뀌었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자치단체별로 지부 구성을 하는 것으로 규약을 정했으므로 속초지부가 된 것이다.

6월 16일 속초지부 조합원들로부터 연락을 받은 민주연합노조 간부들은 부리나케 강릉으로 달려갔다. 문공달 사무처장과 권용희 조직부장이었다. 권용희 부장은 경기지역일반노조 하남지부장으로 경기도노조와 경기지역일반노조가 통합하면서 전국민주연합노조의 조직부장을 맡게 됐다. 문공달 사무처장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강릉시청의 환경미화원들은 즉시 노조 가입원서를 썼다. 160여명 가운데 112명이 노조에 가입했다.

6월 19일 월요일 민주연합노조는 팩스로 환경미화원들의 노조 가입을 강릉시청에 통보했다. 팩스가 강릉시청에 떨어진 시각이 오전 10시 40분이었는데, 그때부터 업무 중이던 환경미화원들의 휴대폰에 불이 났다. 각 부서의 담당 공무원들이 환경미화원들에게 시청으로 들어오라고 하는 전화였다.

이제는 조합원이 된 환경미화원들은 긴장을 하고 가로반 따로 선별장 따로 각각 담당 공무원들을 만나러 갔는데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당시 강릉시청 공무원 1천여명이 공무원노조 강릉시지부 조합원이었다. 담당 공무원들은 과장이나 국장들이 경위를 알아보라고 해서 면담을 하긴 했지만 시늉만 내고 말았다. 과장이 불러서 간 조합원들은 시달림을 좀 받았는데, 간부들이 과장들을 찾아가서 “할 말이 있으면 우리에게 하라”고 막는 것으로 끝났다.

실은 팩스를 보내기 1시간 30분 전인 오전 9시에 이우섭 지부장·신영균 조직부장 등 지부 간부들과 권용희 조직부장은 공무원노조 강릉시지부 사무실을 찾아가서 노조가 생겼다는 사실을 먼저 알렸다. 김중남 강릉시지부장은 그 자리에서 바로 책상 하나와 컴퓨터, 전화기 각각 한 대를 내놓으며 사무실을 같이 쓰자고 했다. 공무원노조도 힘이 있는 지부는 확실히 달랐다.

공무원노조 강릉시지부 덕분에 조합원들은 노조 가입 초창기에도 탄압을 받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단체교섭이 일사천리로 이뤄진 것은 아니다. 역시 민간위탁이 쟁점이었다. 교섭은 이미숙 교육국장과 권용희 조직부장 그리고 지부 간부들이 맡았다. 이즈음 이미숙 공공연맹 부위원장은 사퇴를 하고 전국민주연합노조 교육국장으로 복귀했다. 권용희 조직부장은 강릉에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속초와 강릉의 교섭과 투쟁을 지원하고 있었다.

김헌정은 7차 교섭 때 강릉지부에 왔다. 지부의 한 간부가 공무원들을 따로 만나서 혼자 협상을 했는데, 공무원들은 이 간부의 말을 믿었던지 좀처럼 진도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당사자와 공무원들만 알았지 노조는 전혀 몰랐다. 단체교섭에 들어간 김헌정은 공무원들의 지연작전에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면서 “지부 간부가 정년은 58세로 양보할 수 있다고 하던데”라는 말을 공무원들 입으로 실토하게 만들었다.

김헌정은 지부 간부의 독자행동에 속으로는 화가 났지만 사근사근한 말투로 공무원들에게 강의를 하듯이 말했다.

“앞으로도 그런 일은 수없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지부 간부 개인과 협상을 백 번, 천 번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단체교섭 위임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나라의 녹을 먹는 공무원들이 쓸데없는 일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다음 날 강릉시청의 한 과장은 신영균 강릉지부 조직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어제 교섭에 나온 부위원장이라는 분 대단하다. 자주 봤으면 좋겠다.”

12월 초 막판 교섭이 된 날 새벽 3시까지 협상이 진행돼 노조와 강릉시는 △민간위탁시 노조와 합의 △정년 만 59세 등에 합의했다.

이날 강릉지부 조합원들은 공무원노조 강릉시지부 사무실에서 대기했다. 공무원노조의 힘을 빌린 덕분에 다른 분회나 지부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그것이 강원도의 힘이었다. 단체협약을 체결한 강릉지부는 속초에 지원투쟁을 나가는 한편 삼척·태백·동해·인제 등으로 조직확대사업을 진행했다.

강릉지부와 달리 속초지부는 단협 체결 과정이 순탄치 않았다. 속초시와 시설관리공단은 “외부세력이 들어 왔다”고 여론을 조성하면서 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속초시 시설관리공단은 강원지노위의 중재안까지 거부했다.

전국민주연합노조는 풍부한 경험으로 지부 파업투쟁, 전국 조합원 지원투쟁, 대시민 선전전 등으로 속초지부 단협 체결 투쟁을 이끈 끝에 12월 19일 잠정합의안을 마련했다. 이후에도 인내심을 갖고 교섭과 투쟁을 계속 진행해서 2007년 5월 18일 단체협약 조인식을 할 수 있었다.

“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

나는 전국을 돌아다녀도 웬만해서는 외박을 하지 않는 편이다. 전국이 일일생활권이 된 지 오래다. 지방에서 회의가 늦게 끝나도 새벽에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게 힘들면 고양의 노조 사무실로 갔다.

집에 꿀단지를 숨겨 놓은 사람처럼 한밤중이건 새벽이건 집으로 돌아와도 나를 썩 반기는 사람은 없다. 아내도 아이들도 아는 척 모르는 척 잠만 자고 있다. 언제부턴가 나는 집에서 겉돌고 있었다. 그것이 나의 탓인지 아내의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노동조합 탓인지는 모르겠다.

2003년 옥살이가 끝난 뒤 나는 아내에게 보란 듯이 등산을 다녔다. 당시 유행하던 인라인스케이트까지 샀다. 나는 아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알지만 나 역시 내게 냉랭하게 대하는 아내가 밉다.

그러던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따라 괜히 더 서먹해서 거실에 서성이고 있는 나에게 윤하가 다가왔다.

“아빠∼.”

윤하는 내 다리를 꼭 붙들었다. 꼬맹이가 서 있는 나를 안으려니 다리를 껴안은 것이다. 여느 집에서는 늘 있는 일이지만 나와 윤하 사이에서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었다. 그럴 정도로 우리 부녀 사이에는 스킨십이라는 게 없었다.

2000년 구속됐을 때 윤하는 네 살이었다. 엄마 손을 잡고 아빠 면회를 다니던 윤하는 텔레비전을 보다 알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범죄를 저지른 나쁜 사람들이 갇혀 있는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윤하는 내가 안아 주려고 하면 늘 “나쁜 사람”이라고 하면서 도리질을 치고는 도망을 갔다.

이랬던 윤하가 먼저 나를 안고 붙든 것이다. 그 순간 집 밖을 헤매던 내 마음은 돌아왔다. 아이들을 보살피지 못했던 나는 윤하가 왜 그랬는지 짐작할 도리가 없다. 아이들은 아빠와 엄마 사이를 귀신같이 짚어 낸다고 하던데 그런 것일까. 아무래도 윤하가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아내에 대한 불만은 접어 두고 나부터 아빠 역할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우리 부부는 2001년부터 장모님을 모셨는데, 아내와 의논해서 분가를 결정했다. 나는 아내를 위한답시고 장모님을 모시자고 우겼는데, 아내는 오히려 장모님과 나 사이에서 불편함을 겪었다는 것이다. 장모님께 아이들을 맡기면서 나나 아내가 가정에 소홀하게 된 점도 분명히 있었다. 2004년 초 같은 단지에 있는 다른 아파트를 구해서 나왔다.

나와 아내는 이사를 기회로 삼아 가족의 끈을 다시 당겨 보기로 했다. 언제 어떻게 헝클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꼬인 우리 사이를 풀어 보기로 약속했다. 그래야 부모로서의 책임도 다할 수 있다. 부부 사이가 엉켰는데 부모 자식 간이라고 돌아갈까.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신발끈을 동여맸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였다. 우리 네 가족의 단란한 생활은 내 머릿속에서만 존재했다. 아내는 여전히 보건의료노조 일에 매달렸고 한창 커 가는 아이들은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들이 됐다. 대체 아들도 아니고 딸들이 자기 방을 그렇게 지저분하게 쓴다는 게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잔소리하는 아빠가 됐다.

한때 ‘나의 사랑’, ‘나의 동지’라고 부르던 아내에게도 사람들이 있건 말건 핀잔이나 타박을 하기 일쑤였다. 남편인 내게 형제애 운운하면서 동지적 관계라고 하는 아내가 솔직히 미웠다. 아내야 아내대로 내 여성관이 보수적이라고 느끼고 부아가 나서 뱉는 소리이겠지만 아내는 남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게 당신은 노동운동가이기 이전에 여자라구.

언젠가부터 마음 둘 곳이 없어졌다. 나는 원래 내 얘기를 안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얘기가 있다. 의지하고픈 이에게 때로는 시시콜콜하게 털어놓고 때로는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기도 하면서 자기 고민들을 푼다. 나는 그런 게 없다. 내가 목석이어서가 아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대화해 본 적이 없다. 솔직히 말하면 ‘운동권’이 되면서부터 나를 개조하고자 애썼다.

내가 나로 돌아오는 때는 아내 앞에서다. 아내와 대화도 99%가 노동조합 이야기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 99%의 노동조합 이야기라는 게 실은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고백이라는 것을. 나는 아내에게 늘 칭찬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고, 위로받고 싶고, 도움을 받고 싶다. 남자로서 아내에게 나를 확인받고픈 것이다. 그 사실을 아내는 모르는 것일까.

경기도노조는 전국단일조직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그런데 내 몸은 예전 같지 않다. 무겁고 가끔씩은 어지럽다. 고질병인 치질 때문인가. 아무튼 괜히 조바심이 나고 가끔은 식은땀도 난다.

2003년 자궁근종이 생긴 아내는 치료를 위해 민족생활의학 서울관에 다녔다. 나도 아내를 따라 다녔다. 2001년 뇌종양으로 돌아가신 조석현 선배도 민족생활의학에 의지했다. 장두석 선생님의 민족생활의학에 나는 공감하는 바가 컸다. 민족생활의학은 병이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를 때 생기며 의학은 생명의 이치를 파괴하는 학문이라고 가르친다. 참된 의술은 자연의 이치를 따라 생명의 본성을 북돋우고 보살피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 노조는 매달 초상을 치른다고 할 정도로 병으로 돌아가시는 조합원들이 많으셨다. 평생 고생만 하다 보니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건강을 잃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나는 우리 노조 교육시간에 건강에 관한 주제로 강의를 해 주십사 하고 장두석 선생님께 부탁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불원천리도 마다하지 않고 와 주셨다. 2005년부터는 2박3일 간부수련회 때 전 간부들이 장두석 선생님의 지도 아래 단식을 하면서 교육을 받았다.

나는 좋다 싶으면 곁에 있는 사람에게도 권하는데 이게 좀 지나치긴 하다. 단식을 하는 줄 모르고 오신 간부들도 계셨다. 처음에야 간부들도 마땅치 않아 하는 것 같았는데 단식과 된장찜질을 하면서 2박3일을 견디고 난 반응은 다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진 느낌이라고 했다. 이러던 중 2005년 7월에는 아예 광주 민족생활학교에 입학을 해서 10박11일 동안 단식과 생식을 했다.

이 무렵의 일이다. 장두석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

나는 고개를 들고 선생님의 얼굴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내 아버님께서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환갑도 못 채우셨다. 그때가 1986년이었는데 나는 ‘현장 이전’을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수술을 받으시고 입원해 계시는 동안 막내인 나도 한 달 동안 병간호를 했다.

그 시절 나는 젊다 못해 어렸기에 아버지께 닥친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해 나는 학생운동을 하다가 구속됐다. 법정에 나오셔서 황망해하시던 아버지의 표정이 잊히지 않는다. 그저 아버님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용서를 빈다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병실을 지켰다.

장에 잡히는 게 있다니. 그렇다면 나도 아버지처럼 암이란 말인가. 나도 아버지처럼 병원에 가야 하는 것일까. 아버님은 수술을 받으시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의사들이 결과가 좋다고 했는데도 말이다.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나면 대개 사람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고 하필이면 왜 나냐며 억울함을 호소한다고들 한다. 나는 억울하지도, 가슴이 내려앉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일, 내가 이루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나를 믿어 주는 동지들과 함께하고 있다. 그런 내가 억울할 게 무에 있는가.

서양의학으로는 내 암을 몇 기로 단정할지 모르겠지만 장두석 선생님의 촉진에 잡혔다면 분명 초기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장두석 선생님을 찾는 수많은 말기 암 환자들처럼 나 역시 병원에 가면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을 수도 있다.

내가 얼마 못 산다고 털어놓으면 조합원들은 얼마나 놀랄까. 간부들은 열 일 제쳐 놓고 병원부터 가라고 떠밀 것이다. 어쩌면 간부들은 노조 일보다 ‘김헌정부터 살려 놓자’고 나설 것이다. 병원에 가고, 수술을 받고, 요양을 하고……. 몇 년이 비게 될지 모른다. 우리 일은 지금부터 시작인데……. 그럴 수는 없다.

나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죽는다고? 그럴 리가 없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다. 말기암이든 뭐든 나는 십 년은 더 살 것이다. 그 십 년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죽을 때 죽더라도 나는 내가 다짐했던 대로 운동을 하다 죽고 싶다. 나는 병원에 가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치료법도 내가 골랐다.

장두석 선생님께서는 내게 단식과 생식·풍욕 등을 열심히 하라고 하셨다. 서양의학에서 말하는 암 치료법이란 우선 암세포를 도려내는 것이다. 민족생활의학은 자연치료법인 단식과 생식으로 몸을 자연 상태로 최대한 되돌려서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아내에게만 알렸다. 아내는 몸서리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내 결정을 지지해 줬다.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데 고마우면서도 뭔가 허전한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노조 일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내 몸의 상태를 의식하게 되면 두렵다. 병을 이기려면 병과 친해져야 한다는데, 이 친구만큼은 솔직히 외면하고 싶다. 나도 궁금해진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일까. 내가 없어도 전국단일노조는 잘될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아내는 나를 보내면 자유로워질까.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은데 입가에서만 자꾸 뱅뱅 돈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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