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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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 전국민주연합노조의 별

전국으로! 전국으로!·‘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강원도의 힘·“김 부위원장, 장(腸)에 뭔가 잡히는 게 있네” ·흔들리는 민주노총·학생운동, 노동운동으로부터 멀어지다·마침내 올린 전국민주연합노조의 깃발·달밤 블루스·“여기는 1호차, 2호차 나와라, 오버~”·이랜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결별 그리고 새로운 시작·현장을 지키는 노동자 국회의원·우리의 혁명은 계속돼야 한다·“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WORKERS OF ALL LANDS, UNITE!)”·귀여운 막둥이가 노동운동가로·너무나 갑작스러운, 너무나 애통한 죽음·남은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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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으로! 전국으로!

2005년 10월 경북 고령에서 또 한 명의 환경미화원이 돌아가셨다. 청소차에 쓰레기를 실어 올리는 상차원 김용화 씨가 청소차를 타고 작업을 하던 중에 교통사고를 당했다. 청소차를 뒤따라오던 덤프트럭이 과속을 하면서 터진 일이다. 청소차 기사와 다른 상차원은 중상을 입었고 김용화 씨는 의식불명 상태로 일주일 동안 사경을 헤매다 결국 돌아가셨다.

이 무렵 나는 한창 전국을 뛰고 있었다. 이전에도 환경미화원노조나 자치단체에 직간접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 조직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전국 어디든 일부러라도 가서 만나 보고 투쟁을 하는 곳은 꼭 찾아다녔다. 그때는 안면을 트고 상황을 확인하는 정도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내게는 전국단일노조 건설이라는 명확한 목표가 있었다.

고령지역환경관리노조는 조합원이 산재로 사망했을 경우 받는 보상금을 교통사고 보상금보다 많이 받도록 단협으로 정해 놓았다. 단협은 잘 만들어 놓았는데, 사용자 측은 교통사고 처리로 끝내려고 갖은 핑계를 대고 있었다. 그리고 보상금이 문제가 아니었다. 환경미화원이 군의 청소업무를 하다가 사고를 당한 만큼 군에도 책임이 있었다.

하루아침에 동료를 잃고 두 명의 동료는 중상을 입어 경황이 없을 고령지역환경관리노조 김장락 위원장을 돕기 위해 이미숙 공공연맹 부위원장이 지원을 나갔다. 이미숙 부위원장의 지원에도 군은 책임을 회피하고 빠져나갔고 사용자 측은 단협 기준에 따라 보상했다.

나는 환경미화원으로 고생스럽게 일만 하시다가 작업 도중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면 슬픔과 분노가 끝없이 몰려왔다. 고령군의 청소업무는 민간위탁이 되기 전인 1998년까지 43명이 수행했다. 민간위탁이 실시된 후 6년 동안 청소업무를 하는 노동자는 20명으로 줄어들었다. 해고는 없었지만 감시·감독을 심하게 해서 자진해서 사표를 쓰게 만들고 정년으로 줄어드는 인원은 충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덤프트럭의 과실로 일어난 교통사고라고 하지만, 돌아가시는 그 순간까지 늘어난 일 때문에 몸이 얼마나 축이 났겠는가. 평소 일에 지치지 않고 건강을 지키고 있었다면 사망까지 가지 않고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고를 당하는 순간 세 분은 모두 쓰레기차 좌석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고령지역환경관리노조 사무실에서 김장락 위원장과 함께 숙식을 함께하면서 이틀을 머물렀다.

2005년 들어 전국을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이것은 전국단일노조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전국단일노조 조직화 방향을 △자치단체 및 상용직 노조에 대한 전국화 사업 △타 노조에 대한 연합노조 방안 제시 △광역단위 집행단위체계 수립 △공공연맹 소속 노조 견인 등 네 가지로 정리했다.

2004년 하반기에는 공공연맹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대표자회의가 정례화되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됐다. 하지만 대표자회의 활동은 각 노조의 상황을 점검하고 투쟁일정을 공유하면서 지원하는 선에서 그치고 있었다.

공공시설 환경관련 분과 안에서도 단일한 조직발전 전망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큰 틀에서야 산별노조로 전환하면서 전국적으로 확대 조직돼야 한다는 점에 모두들 동의하지만 당장 추진해야 할 경로에 있어서는 단위노조마다 상이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내에서는 분과 소속 단위노조 전부가 한꺼번에 산별노조 전환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과 분과 소속 노조들의 업종 특성(상용직·환경미화원)에 따라 소산별노조를 건설해야 한다는 입장이 제출돼 있었다.

분과 내에서도 입장이 통일되지 않은 가운데 공공연맹은 2004년 2월 정기대의원대회를 통해 지역공공서비스노조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연맹이 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해 추진하는 공공서비스노조는 공공시설 환경관련 분과와 조직대상이 중복되는 점이 있다. 11월에 가서는 광주전남상용직노조에 가입했던 전남도청 상용직 노동자들이 탈퇴하고 광주전남공공서비스노조에 가입하는 사례도 생겼다.

경기도노조가 참관조직으로 참가하고 있던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 소속 일반노조들과의 교류도 이어졌다. 2004년 6월 임단협 시기에 행정자치부를 상대로 한 투쟁을 벌였을 때, 일반노조들 가운데 환경미화원이나 상용직, 청소업체 노동자 등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조합원들이 있는 부산지역일반노조·경남일반노조·전북지역일반노조가 경기도노조와 보조를 함께했다.

나는 우선 지역일반노조 가운데 자치단체에 직간접적으로 고용된 조합원들이 있는 노조들과 연대를 계획했다. 2004년 10월 28일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주최로 ‘지방자치단체 노동조합의 현황 및 고용안정’을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구리환경노조·서울지역노조·제천지역노조·인천일반노조 등이 참여했다.

2005년 3월부터는 공공연맹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소속 노조들과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의 지방자치분과 소속 노조들이 함께 간부회의를 열고 ‘민간위탁 저지, 고용안정 쟁취, 전국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 투쟁 선포식’을 25일에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전국적 연대투쟁의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행자부를 상대로 전국 단위의 공동투쟁을 한 경험을 살려 4월 22일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소속 노조들과 전국일반노조대표자회의 지자체 분과 소속 노조들이 모여 전국지방자치단체노동조합연대회의를 구성하기로 했다. 이후 한 달에 한 번꼴로 회의를 진행하면서 단일노조 건설을 위한 기반을 마련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영남권 청소업무 관련 연대회의도 만들어졌다. 부산일반노조 환경지회·울산연대노조·경남일반노조·대구환경노조·고령지역환경노조·경북공공서비스노조 등이 참여했다. 전국단일노조 건설 과정에서 광역단위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인데 다행히 영남권에는 이봉주 부산일반노조 전 공동위원장과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소속 고령지역환경노조 김장락 위원장이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김장락 위원장은 2003년 고령군의 청소업체에서 노조를 만들고 민간위탁 철회를 요구하며 조례개정운동까지 벌였다. 고령군은 1999년부터 군의 청소업무를 민간위탁했다. 시 소속으로 있던 환경미화원들은 청소업체 노동자가 됐다. 김장락 위원장은 민간위탁이 무엇인지 몰라서 당했지만 이것을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런 사례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을 다니면서 자료를 구하고 당시 대구 서구의 장태수 민주노동당 시의원으로부터는 조례개정운동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이렇게 해서 조례개정운동을 펼쳤던 것이다. 군민의 1/3에게 서명을 받아 조례개정 요건을 맞췄는데 군의회에서 상위법인 폐기물관리법과 충돌한다고 주장하는 통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부산의 청소업체 노동자 400여명을 조직한 이봉주 당시 부산일반노조 공동위원장과 의기투합해 울산의 민주노동당 구청장과 시·구의원들을 찾아다녔다. 두 분은 민주노동당 구청장과 시·구의원들에게 “민간위탁 된 청소업무를 시에서 다시 하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하고 “선례가 만들어지면 다른 자치단체들도 따르게 된다”고 설득했다.

그런데 다들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두 분은 민간위탁을 저지하는 게 아니라 이미 시행되고 있는 민간위탁을 되돌리는 더 어려운 싸움을 조직력도 약한 지역에서 꾸준히 실천하고 있던 진짜 활동가들이었다.

나는 전국지방자치단체노동조합연대회의를 모체로 전국단일노조를 만들기 위해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에 통합을 제안했다.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 지방자치분과 소속 노조들이 연대회의로 모이고 있는 상황에서 공식적으로 통합을 제안한 것이다.

당시 지역일반노조들은 경기도노조처럼 전국화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지역 내 연대투쟁을 강조하지만 사용자 측과 싸우다 보면 지역에서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대기업 관련 회사나 전국에 지점을 갖고 있는 사용자인 경우 전국의 노동자를 하나로 조직해서 본사와 교섭하고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백화점이나 할인점 등과 같은 유통업이 이런 경우다. 정부 정책에 따라 임금과 근로조건이 좌우되는 환경미화원이나 상용직 노동자들의 경우 결국 키는 행정자치부가 쥐고 있다. 정부를 상대로 교섭하고 투쟁해야 되는 것이다.

일반노조들은 교섭과 투쟁에서 부딪히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전국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민주노총이 2005년 6월부터 모든 직가입 노조를 없애고 산별노조로 재편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는 등 외부적인 조건도 있었다. 지역일반노조들은 민주노총 각 지역본부에 직가입 형식으로 소속돼 있었다.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 내부에서는 전국조직의 형태로 공동투쟁체·협의회·연맹·전국일반노조·전국통합노조 등의 방안을 놓고 활발한 토론이 오갔다. 이런 토론 과정 속에서 경기도노조로부터 전국단일노조 제안을 받은 것이었다.

2005년 10월 15일과 16일, 충남 홍성에서 전국지방자치단체노동조합연대회의 간부수련회가 열렸다. 수련회에는 충남공공환경노조 19명, 경남일반노조 17명, 대구환경노조 3명, 고령지역환경노조 2명, 부산일반노조 5명, 경북공공서비스노조 경산환경 소속 조합원 3명, 제천 상용직 조합원 3명, 울산연대노조 4명, 구리환경노조 2명, 경기도노조 31명 등 88명이 참석했다.

충남공공환경노조에서 사회를 맡았고 전국단일노조 건설에 관한 내용으로 내가 발제를 했다. 이어서 분반토론이 진행됐다. 토론 과정에서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소속 노조 간부들은 “2000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논의를 하고 있다”면서 “실제로 진행이 돼야 한다”는 의견을 많이 냈다. 청소업체 노조 간부들도 “민간위탁 제도를 없애기 위해서는 전국단일조직으로 행자부를 상대로 교섭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그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단일조직으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기 모임에서는 전국단일조직추진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

수련회 분위기는 아주 좋았다. 특히 멀리서 온 경남일반노조는 조합원이 1천100여명 정도인데 자치단체에 직간접 고용된 조합원들이 60% 정도였다. 환경미화원이나 자치단체에서 일하는 조합원들이 꾸준히 노동조합 활동을 하고 있어서 통합되면 경남권 조직화는 급속도로 이뤄질 것 같아 기대가 컸다.

10월 28일 계룡산에서 열린 전국단일조직추진위원회 1차 대표단 모임에는 충북 제천에서 윤길태 위원장, 경북지역에서 김장락 위원장, 대구지역에서 김상호 위원장과 정병환 공공서비스 위원장, 경남지역에서는 강동화 경남일반노조 위원장 직무대행, 울산지역에서는 김덕상 위원장, 부산지역에서는 이봉주 전 위원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논의 결과 12월 말까지 전국단일노조 건설을 추진하되 노조별로 단일노조에 결합하는 시기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 전국단일노조가 건설돼도 조직이 완성되는 시점까지는 추진위원회 이름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또 광역별 대표단을 선정해 추진 대표를 구성하고 단일노조추진준비기금은 조합원 1인당 1천원으로 결정했다.

이후 전국단일조직추진위원회 실무모임이 두 차례 개최됐는데, 1차 회의에서는 노조 중앙의 안정적 운영을 위해 조합원 1인당 최소 1만원선에서 조합비를 거출한다는 안을 마련하고 조직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구체화하기로 했다. 2차 모임은 공공서비스노조 칠곡지회에 대한 탄압으로 정병환 위원장 등 4명이 구속된 칠곡지회 지원투쟁 현장에서 열렸다.

전국일반노조 대표자회의는 우리 노조의 공식적인 통합 제안에 “경기도노조·경기일반노조·충북일반노조 등 통합이 가능한 노조부터 통합을 하라”고 권고했다. 전국단일노조 건설이 가시화되고 있었다.

‘백약이 무효’라던 옥천, 승리하다

IMF 사태 이후 노동계는 구조조정·정리해고·소사장제 등과 같은 공장 내 하청계열화,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비정규직 증가 등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민주노조진영 주류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밀려났거나 진입하지 못한 노동운동가들은 비정규직 조직화로 눈을 돌렸다. 비정규직 조직화가 향후 노동운동의 미래가 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이를 준비하던 선각자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노조진영은 현대자동차노조로 대표되는 ‘정규직 노조 이기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산별노조 건설과 비정규직 조직화 등으로 신자유주의 공세에 대응하려 애썼다. 하지만 민주노총이나 각 연맹들은 몸집이 큰 만큼 빨리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정규직 중심의 기존 조직체계에서 비정규직 조직화는 재정과 인력에 대한 안배가 충분치 못한 탓에 사실상 사업계획서로만 존재했다.

민주노조진영의 비정규직 조직화는 실력은 있으나 노동운동 내부의 주도권 다툼에 밀려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던 노동운동가들과 비정규 노동자들의 절묘한 만남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의정부 환경미화원들과 김헌정의 만남도 이렇게 시작됐다. 노동운동의 상층에서 비껴 있던 적지 않은 노동운동가들이 절박했던 비정규직 투쟁에 결합함으로써 한동안 민주노조진영이 잊고 있었던 전투성과 건강성을 보여 줬다.

그런데 비정규직 조직화는 기존의 노동운동으로서는 미지의 영역이라 진입장벽이 낮았으므로 실천 경험이 부족한 지식인 중심의 서클들이 무작정 뛰어드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뒤늦게 각 연맹이나 지역본부에서도 비정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열기 시작하면서 비정규 노동운동은 마치 춘추전국시대를 방불케 했다.

춘추전국시대에 공자·맹자·노자·한비자·묵자 등 제자백가들이 출현해 사상과 문화가 꽃을 피웠듯이, 비정규 노동운동에서도 각 지역과 업종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영역을 구축하면서 일정한 성과를 거둔 몇몇 실력 있는 노조들이 두각을 드러냈다.

경기도노조도 실력 있는 노조로 전국에서 인정을 받았다. 자치단체와 직간접으로 연관된 노조들 사이에서 경기도노조는 민간위탁 저지투쟁이나 청소업체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끈질기고 과감한 전투성으로 이기는 싸움을 하는 노조로 알려졌다.

충북 옥천의 청소업체 노동자들은 ‘싸워 봤자 이길 수 없다’, ‘백약이 무효’라는 진단을 여러 곳에서 받은 끝에 마지막으로 경기도노조를 찾았다.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는 2002년 설립돼 공공연맹을 상급단체로 하고, 가끔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 대표자회의에 나오기는 했지만 조합 바깥으로는 미처 시선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2005년 하반기 옥천군이 청소업무를 민간위탁 할 업체를 새로 선정하고 최저가 공개입찰을 하기로 결정하면서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에 시련이 닥쳤다. 옥천군은 2000년부터 청소업무를 민간위탁했는데 그 이후 관성환경이라는 업체가 계속 맡고 있었다. 당연히 특혜시비가 일었다. 노조에서도 군에 문제제기를 했다.

옥천군은 특혜시비를 피하기 위해 기존의 업체는 배제하고 새로운 업체들을 공개입찰로 선정하기로 했다. 문제는 2개 업체를 정해 읍과 면 단위로 나눠 민간위탁을 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인원도 최소화해야 한다고 해서 43명에서 34명으로 인원을 축소시켰다. 정년퇴직으로 줄어든 인원을 보강하지 않겠다고 했다.

노조는 2개 구역으로 청소구역을 나누는 것은 노조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반대하면서 비규격봉투 쓰레기를 수거하지 않는 준법투쟁을 벌였다. 노조는 민간위탁을 철회하고 청소업무를 군 직영으로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한편 군이 공개입찰자 신청을 받자 노조위원장이 단식농성에 들어가 ‘임금삭감 없는 완전고용보장’을 촉구했다.

노조는 부군수로부터 “100% 고용보장은 어렵지만 낙찰자가 결정되면 고용 문제는 군과 낙찰업체와 노조 3자 간 힘을 합해 노력한다”는 답변을 들었다. 열흘 뒤 농성을 푼 조합원들은 군민주 모집을 통해 청소업체를 설립해서 입찰에 참여하기까지 했다.

11개 청소업체가 옥천군의 청소업무 위탁 공개입찰에 참여했는데 금강환경과 옥천환경이 낙찰을 받았다. 그런데 읍을 청소구역으로 배정받은 옥천환경이 읍에서 청소를 하던 18명의 조합원을 해고해 버렸다. 군청 환경위생과에서는 신규업체들에게 기존의 임금 90%는 보장해 줘야 한다고 권고했는데, 옥천환경은 그럴 바에야 신규인력을 쓰겠다고 나섰다. 8개 면 청소를 맡은 금강환경은 면에서 일하던 노동자들 16명을 그대로 고용하고 임금도 변동 없이 지급하기로 했다.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가 부딪힌 상황을 두고 공공연맹·지역본부·일반노조들 모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어렵다는 것이었다. 노조는 억울했다. 업체가 바뀌었다고 날마다 청소하던 구역에서 쫓겨날 수는 없었다.

성낙경 위원장과 박정영 사무장은 ‘실력이 좋다’는 경기도노조를 찾아갔다. 김헌정은 공공시설환경관리분과에 가끔 나오던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가 처한 상황을 모르지 않았지만 잠자코 성낙경 위원장으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성 위원장의 설명이 끝나자 김헌정은 “용산전자상가로 갑시다”며 두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두 사람은 이유도 모른 채 따라갔다.

용산전자상가에 도착하자 김헌정은 두 사람에게 빔프로젝트·스크린·DVD 기기 등을 가리키며 어서 구입하라고 했다.

“여론을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상황을 동영상으로 만들어서 밤에 주민들 있는 곳으로 가서 계속 틀어야 합니다.”

김헌정은 노조 사무실에서 나눈 대화로 쓸 만한 동영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청주 KBS가 옥천군과 청소업체의 특혜시비, 그로 인한 노동자들의 피해 등을 다룬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투쟁방안을 상의하러 갔더니 AV기기를 구입하라는 게다. 두 사람은 선뜻 지갑을 열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김헌정은 “과감한 투자 없이는 안 된다”고 재촉했다.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는 조합비를 2천500여만원가량 비축하고 있었지만 두 사람은 투쟁을 하는데 최신 전자기기들이 필요하다는 게 어째 좀 이상했다. 하지만 김헌정의 확신에 찬 눈빛에 그들은 그만 지갑을 열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엉겁결에 구입한 최신 전자기기를 바리바리 싸들고 옥천에 돌아왔더니 조합원들은 미쳤냐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봤다. “이 비싼 걸 어디에 쓰려고 샀느냐”고 난리도 아니었다. 두 사람은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사 버린 걸 어떻게 하랴. 이왕 시작한 일, 경기도노조만 믿기로 했다.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는 1월 2일 새벽 6시부터 군청 광장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낮에는 집회하고 저녁에는 트럭에 스크린을 설치해 청주KBS가 보도한 〈검은 의혹 자치단체 청소〉 프로그램을 틀면서 선전전을 벌였다.

김헌정은 전국단일조직 건설 과정에서 통합의사를 밝힌 충북일반노조의 이성일 위원장에게 통합 이전이지만 옥천투쟁에 결합해 달라고 요청했다. 한두 달 볶는다고 해결될 싸움이 아니었기에 김헌정은 옥천에 상주할 간부가 필요하다고 봤다.

2006년 2월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을 비롯해 제천·마산·부산·대구·고령 등 전국 각지의 환경미화원과 상용직 노동자 600여명이 옥천으로 집결해 집회를 시작했다. 인구 3만5천명으로 조용하던 옥천군에 엄청난 규모의 집회가 벌어진 것이다.

옥천의 조합원들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그동안 연대투쟁을 한 적이 없었다. 전국노동자대회나 청주에서 열리는 노동절 집회에 참석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전국에서 수많은 동지들이 달려왔고 18명의 해고자가 생긴 자신들을 경기도노조가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옥천 조합원들은 각오를 단단히 했다.

군청 광장 안 농성장은 몇 차례 철거위기가 있었는데, 공무원노조 옥천군지부가 나서 막아 줬다. 오대성 쟁의부장의 세 살짜리 아들 승현이도 농성장을 지켰다. 해고로 생활이 어려워지자 오대성 쟁의부장의 아내는 일을 나갔고 이전처럼 승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승현이는 아빠랑 삼촌들이랑 라면을 끓여 먹고 새우잠을 자면서 농성장 붙박이가 됐다. 아빠가 바쁜 날이면 삼촌들이 승현이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 돌봐줬다.

여론은 우호적이었다. 군민이 주주로 있고 평판이 좋은 지역신문 중 하나인 옥천신문사는 민간위탁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청주KBS의 최국만 PD는 후속보도를 계속했다.

법률투쟁도 진행했다. 지노위에서 쟁점은 옥천환경과 해고된 조합원들 사이에 근로관계가 성립했는가, 그렇지 않은가였다. 노조는 근로관계가 묵시적 동의 아래 이뤄졌는데, 노조가 있기 때문에 사용자 측이 해고를 했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사실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았다.

바로 이 대목에서 김헌정의 성화에 못 이겨 영문도 모르고 구입한 최신 전자기기들이 위력을 발휘했다. 지노위 조정회의에 출석한 김헌정은 답변을 하면서 영상을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헌정의 말에 지노위원장은 지금 보여 줄 수 있느냐고 물었고 김헌정은 쾌재를 부르며 당장 가능하다고 답변했다.

준비해 간 빔프로젝트를 꺼내 청주KBS가 방송한 내용 가운데 한 장면을 틀었다. 옥천환경 사장의 말이 그대로 나왔다.

“나는 채용을 할라고 했는데 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본 지노위원장이 바로 결론을 내렸다.

“했네요. 됐습니다.”

7월 14일 충북지방노동위원회는 옥천환경의 해고가 부당해고와 부당노동행위라고 판정했다. 산전수전 공중전에 첨단 전자장비까지 동원한 ‘과학전’의 승리였다.

지노위가 노조의 손을 들어줬지만 옥천환경 사용자 측은 지노위 결과를 수용하지 않았다. 버티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노조는 든든했다. 경기도노조가 뒤를 받쳐 준 덕분이다. 옥천지역환경관리노조 간부들은 삭발과 단식농성으로 맞섰고 경기도노조 간부들의 방문투쟁도 끊임없이 이어졌다. 추석을 맞아서는 옥천 조합원들의 특산물 판매사업에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생계에 보탬이 되도록 도왔다.

11월에 열린 중앙노동위원회 조정회의에서 노사가 합의하면서 옥천의 투쟁은 막을 내렸다. 노조는 투쟁했던 11개월 동안의 임금은 양보했지만 가장 중요한 원직복직을 쟁취했다. ‘백약이 무효’라던 복직투쟁을 승리로 이끈 옥천 조합원들은 여세를 몰아 보은·단양·괴산·음성·영동·충주의 환경미화원과 상용직 노동자, 청소업체 노동자들을 조직해서 충북의 조합원을 200여명으로 늘렸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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