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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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전국단일조직을 향해

경기도 최초의 상용직 집단교섭·정치판을 빗자루로 쓸어버려라!·교육! 교육! 그리고 또 교육!·경기도노조의 새로운 장수들·김헌정, 또 구속되다·“여보, 나는 당신이 필요해!”·하루도 쉬지 않는 경기도노조·내 시선은 전국을 향하고 있다·“우리는 민주노동당”·‘NL’이냐, ‘PD’냐·기다리던 우군,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공무원노조·환경미화원은 공무원보다 적게 받으라는 법이 있나?·이상관 분회장의 신조 “내 밥숟가락은 내가 지켜야”·배홍국 해복투위원장의 다짐 “나는 제일 나중에 복직하겠다!”·4년2개월 만에 단협 체결한 성남분회·지부에게 조합비 50%를 달라?·끝까지 괴롭히는 청소업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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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관 분회장의 신조 “내 밥숟가락은 내가 지켜야”

시흥시청의 상용직 노동자였던 이상관 씨는 2003년 7월부터 가로반 환경미화원이 됐다. 시청 건설과 공무원들은 평소에도 입바른 소리를 하는 이상관 씨가 적잖이 신경이 쓰였는데, 그가 노조활동을 시작하자 대적할 자가 없었다.

이상관 씨는 시흥분회장을 맡고는 다른 분회 지원투쟁이나 연대투쟁이 있는 날이면 상황에 따라서 퇴근시간 10분 전이라도 먼저 나가 버렸다. 감독인 기능직 공무원이 제지를 하면 오히려 그를 타박하는 이상관 분회장이었다.

“당신이 조그만 삽으로 세 번 삽질 할 때 나는 큰 삽으로 한 번 만에 해 버린다구! 시간만 때우면 일이 돼? 내가 먼저 가는 게 고까우면 내 일당에서 10분 까라구!”

어안이 벙벙한 기능직 공무원을 뒤로하고 이상관 분회장은 바람같이 뛰쳐나갔다. 이상관 분회장은 시흥의 상용직 조합원들이 몇 명 되지도 않는 데다 노조활동에 적극적인 조합원은 자신까지 포함해서 4명뿐이라 투쟁하는 재미가 영 적었다. 그래서 지원투쟁이나 연대투쟁이 있는 날이 은근히 기다려졌다.

다른 분회가 시청 로비에서 농성을 하고 있었는데 지원투쟁을 간 그는 꾀를 하나 냈다. 로비에서 청국장을 끓이자는 것이었다. 환경미화원이나 상용직 노동자 출신 조합원들은 공무원들이 무엇을 싫어하고 어떤 일에 질겁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조합원들은 시청 로비 농성을 하면 이불을 갖다 깔고 일부러 쓰레기를 가져와서 지저분하게 만들어 놓았다. 자장면을 시켜 먹고는 그릇을 잘 보이는 데 쌓아 놓았다. 이상관 분회장은 자장면보다 더한 냄새를 풍기는 청국장을 끓여서 공무원들의 시각만 아니라 청각까지 골탕 먹이며 고소해했다.

투쟁에 재미를 붙인 이 분회장은 핵심 조합원들을 꼬드겨 보다가 안 되면 혼자서라도 수원이든 서울이든 투쟁조끼를 입고 나섰다. 수원시청에서 연행된 이미숙 조직국장과 이광희 교섭위원을 구출해 내기 위해서 경찰차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가 그마저 연행이 됐다. 이 분회장은 경찰서에서 묵비권을 내세우며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강문대 변호사를 접견하고 나서야 조사를 받기로 했다.

형사들은 이 분회장에게 “경찰을 때렸느냐”고 추궁했다. 이 분회장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맞았다!”고 대꾸하며 책상 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연행되는 과정에서 몸싸움 끝에 종아리가 허옇게 일어난 부위를 가리키며 “이게 바로 맞은 상처”라고 우긴 것이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형사는 이 분회장에게 “왜 경찰차 앞에 앉았느냐”고 캐물었다. 여차하면 공무집행방해 혐의로 입건하겠다는 엄포였다. 그러나 이 분회장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분회장이 “밥숟가락 때문”이라고 응수하자, 형사는 질린 얼굴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조사는 이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함께 연행된 조합원들은 조사를 받느라고 유치장에서 몇 번이나 불려 나갔다. 경찰은 조합원들을 취조실로 데리고 가면서 수갑을 채우고 포승줄을 묶었다. 그냥 지나칠 이상관 분회장이 아니었다.

“조사만 하면 됐지, 수갑은 왜 채우는 거야? 인권위원회인지 어딘지 고발해 버린다!”

형사들은 “영감님이 기운도 좋으시지”라며 자기들끼리 수군대며 이 분회장을 달래기에 바빴다.

이상관 분회장은 3박4일 동안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집에 들어갔다. 그의 아내는 3일 만에 귀가한 남편을 반기면서도 혹여 외간 여자라도 만났는지 의심을 했다. 전화 한 통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 분회장은 “남자가 밥숟가락 때문에 일을 하다 보면 경찰서에 갈 수도 있다”며 “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생길 수 있다”고 아내에게 다짐을 받았다.

이상관 분회장은 자신은 상용직이지만 가로반의 환경미화원들을 조직하려고 시흥 일대를 누볐다. 환경미화원의 집에 상이 났다고 하면 장례식장에 쫓아갔다. 그런데 환경미화원들은 자기들끼리 모여 앉고 이 분회장에게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그는 ‘노조하는 사람’으로 찍혀 있었다. 환경미화원들 말로는 감독이 아주 지독했다. 이상관 분회장과 말이라도 섞는 환경미화원은 즉각 불이익을 당할 정도라고 했다. 이 분회장은 환경미화원들을 포섭(?)하기 위해 핵심 조합원들에게 아예 청소과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상용직보다 환경미화원은 인원수가 훨씬 많았다. 130명이나 됐다. 핵심 조합원들은 설마 보내 줄까 하면서 반신반의했다. 환경미화원은 상용직보다 임금이 높은데 자기들을 뭐가 예쁘다고 공무원들이 보내 주겠는가.

그런데 웬걸, 건설과 공무원들은 환경미화원을 하겠다는 이 분회장과 조합원들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다만 환경미화원으로 옮겨 가려면 상용직을 그만둔다는 사표를 써야 한다는 조건을 붙였다. 이 분회장은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몸이 단 사람들은 건설과 공무원들이었다. 이 분회장과 핵심 조합원들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던지, 건설과 공무원들은 내부규정을 고치면 사표를 쓰지 않아도 되니 청소과로 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신 환경미화원으로 가면 노조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달라고 했다.

이 분회장은 잠시도 망설이지 않았다. 옳다구나 싶었다. 밥숟가락 지키기 위해 노조를 하는 것인데, 노조 괴롭히는 얍삽한 공무원들에게 거짓말 좀 하기로서니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공무원들보다 이 분회장이 한 수 위였다. 이 분회장은 1년 남짓한 노조활동으로 그런 각서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고, 문제가 되면 각서를 쓰게 한 공무원이 부당노동행위로 불리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각서를 쓰고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게 된 이 분회장은 한달음에 홍희덕 사무처장에게 달려갔다. 당시 홍 사무처장은 김헌정의 구속으로 정신없이 바쁠 때였다. 이 분회장은 이리저리해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게 됐고 조직을 해서 돌아오겠다고 홍 사무처장에게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홍 사무처장은 그러시라고 대답했다. 조직해서 돌아온다는데 말릴 일은 아니다.

2003년 7월부터 시흥시 환경미화원이 된 이상관 씨가 처음 배치를 받은 곳은 시화방조제의 시흥 쪽 구간이었다. 그곳은 청소차도 들어오지 않고 혼자 작업을 해야 되는 험한 구간이었다. 수거한 쓰레기를 청소차가 들어오는 곳까지 직접 들고 오든지, 아니면 자신의 승용차로 실어 날라야 했다. ‘노조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이상관 씨가 환경미화원으로 오자 청소과 공무원들은 일부러 이곳을 그에게 배당한 것이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방조제의 물이 길까지 올라왔다. 그리고 꼭 이런 날 청소과 기능직 공무원들이 감독을 하러 나타났다. 그의 약점을 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이미 이상관 씨가 예상했고 또 작정한 일이기도 했다. 흠잡을 데 없이 자기 일을 하는 이상관 씨를 감시하던 공무원들은 약이 오르는 눈치였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조직하려고 눈을 부라리며 다니는 이상관 씨를 주시하는 사람들은 감독하는 공무원만이 아니었다. 감독 편에 선 환경미화원들도 그의 약점을 잡으려 했다. 그들은 오이도 횟집상가의 쓰레기를 비워 주고 수고비를 받고 있었다. 감독들은 이런 약점을 꽉 잡고는 환경미화원들을 놓아 주지 않았다.

청소과가 이 씨를 환경미화원들과 아무리 격리시키려고 해도 이런 구역의 청소업무를 한 사람에게 장기간 시키게 되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6개월이 지난 뒤 그는 동료를 만날 수 있는 구역으로 배치됐다.

그는 환경미화원들을 본격적으로 조직하러 나서기 전에 민주노동당 시흥지역위원회를 찾아가서 공계진 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내가 아직 조합원들이 없으니까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확실히 뒷배를 봐주시오”라고 부탁했다. 공계진 위원장이 “알겠습니다”라고 공손하게 대답했음은 물론이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그는 6개월 만인 2004년 5월 21일 30명을 조직해서 경기도노조를 다시 찾았다. 그가 조직하는 데 사용하는 논리는 예의 ‘밥숟가락론’이었다. 환경미화원들이 노조에 가입하지 않는 이유는 취업시켜 준 공무원들과의 안면 때문이었다.

“그 공무원들이 자리까지 지켜 주지는 못한다. 내 밥숟가락은 내가 지켜야 한다.”

이상관 씨는 이렇게 환경미화원들을 설득하고 조직했다.

‘경기도노조 조합원 이상관 외 29명’이라고 적힌 단체교섭 요청서를 받은 시흥시청은 발칵 뒤집어졌다. 아니 노조를 안 하겠다는 각서까지 받았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공무원들은 단체교섭에 나와서는 이상관 분회장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노조를 안 하겠다는 각서를 쓰지 않았느냐?”고 힐난했다. 이 분회장은 태연자약했다.

“그 각서라는 게 어디 있습니까? 한번 봅시다.”

한 공무원이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없어요.”

시흥시는 단체교섭에 나와서 교섭을 지연시키며 조합원이 30명밖에 되지 않으니 파업을 할 테면 하라고 배짱을 부렸다. 이때부터 이상관 분회장은 조합원들과 함께 시흥시와 기나긴 전쟁에 들어갔다. 실은 그들도 급할 게 없었다. 길게 보면 된다. 싸우는 한 단협을 체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피켓시위부터 시작했다. 공무원들이 단협안을 한 조항씩 걸고넘어지는 지연작전을 쓰면 이 분회장과 조합원들은 시장실 항의방문을 감행했다. 시장실 복도 앞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시장을 기다리는 것이다. 이들을 피해 다니던 시장이 어느 날 이 분회장에게 딱 걸렸다. 시장은 바쁘다는 이유로 피하려 했지만 이 분회장은 “아무리 바빠도 우리 밥숟가락이 달린 일”이라며 시장을 붙들고는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교섭이 조금씩 진전됐다.

이 분회장은 평택 해고 조합원 지원투쟁을 자주 다녔다. 한 번은 평택에서 1박2일 투쟁을 한다고 버스 4대가 동원됐다. 김헌정은 조합원들과 같이 평택에서 밤을 새우고는 아침에 버스 1대에 조합원들을 태워서 시흥으로 가자고 했다. 경찰은 평택시청에서 나가는 버스를 보고는 평택역이나 평택 내의 어느 곳으로 가서 집회를 하는 줄 알고 쫓아갔는데 버스 3대는 평택시내를 돌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조합원들을 태운 버스 1대가 시흥시청을 기습했다. 이상관 분회장은 흐뭇하기 짝이 없었다. 시흥시청 공무원들에게 노조의 위력을 과시하는 것도 좋고, 경찰들 놀려 먹는 것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김헌정 부위원장이 머리를 쓰는 게 그의 마음에 쏙 들었다.

시흥분회는 지치지 않고 끈질기게 싸워서 1년6개월 만에 단체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단협을 체결했음에도 조합원들은 늘지 않았다. 이게 이 분회장의 고민이었다.

비조합원들은 공무원이나 노조보다 한 수 위였다. 노조에 가입하지 않아도 조합원들과 똑같이 임금이 오르고 노동조건이 좋아진다. 노조는 노조대로 노조에 가입하라고 비조합원들을 따뜻하게 감싸고, 공무원들은 공무원대로 노조에 가입하지 말라고 비조합원들의 편의를 봐준다. 괄괄한 이 분회장도 여기에는 두 손을 들었다. “인식이 저렇게 안 돼서야……”라고 혀를 차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배홍국 해복투위원장의 다짐 “나는 제일 나중에 복직하겠다!”

평택의 해고 조합원 배홍국 씨는 밥 먹고 자는 거 말고는 복직투쟁을 했다. 노조에서 내준 봉고차가 배홍국 씨의 일터였다. 아침 9시면 그와 동료들은 봉고차에 장착된 음향설비를 켜고 장송곡을 트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해고는 그들에게 죽으라는 소리였다. 그래서 그들은 장송곡을 틀었다.

배홍국 씨는 1963년생으로 진웅이라는 봉제업체의 재단사로 취직해 과장까지 올랐다. 진웅은 세계 텐트시장의 35%를 점유한 수출기업으로 업계에서는 유명한 곳이었다. 회사에서 인정받은 그는 도미니카공화국 공장 건설에 파견을 나가는 등 해외근무도 했다.

해외근무에서 돌아온 그는 하청업체를 차렸다. 고급 텐트가 그의 아이템이었는데, 3년 만에 부도를 맞고 말았다. 사업은 그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는 데 이십 년 가까이 일해서 번 돈을 수업료로 날렸다.

2000년 배홍국 씨는 평택시청의 환경미화원이 됐다. 그는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했다. 그가 가장 못 견딘 것은 기사들의 괴롭힘이었다. 기사들은 툭하면 환경미화원들에게 욕을 해 댔다. 행동으로도 위협을 했다. 그들은 쓰레기차를 후진시켰다, 전진시켰다 하면서 작업장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에게 겁을 줬다. 자신들보다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게 그들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나 보다.

기사들이 괴롭히지 않더라도 선별장 일은 힘들었다. 배홍국 씨는 하루 14시간 죽을 둥 살 둥 일해야 했다. 그는 일을 하면서 개돼지도 이런 취급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가끔씩 중얼거렸다.

한때 텐트업계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했을 정도로 실력이 있었지만 하청업체를 운영하면서 몽땅 말아먹은 그였다. 평택시에서 민간위탁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기겁을 했다. 그가 겪었던 하청과 똑같은 게 민간위탁이다. 동물의 세계보다 더한, 오로지 돈이 지배하는 양육강식의 세계가 하청이고 위탁이다. 약자는 발붙일 수가 없는 곳이다. 민간위탁에 반대하다 해고자가 돼 버린 배홍국 씨는 천막농성 첫날 헛웃음만 나왔다. 텐트를 만들던 내가 텐트를 치고 있구나……. 새벽에 천막농성장을 다 만들어 놓고 김헌정 위원장과 라면을 끓여 나눠 먹은 게 엊그제 같은데, 그날 이후 벌써 1년이 넘었다.

그의 하루는 집회로 시작해서 집회로 끝났다. 2004년 9월 16일 목요일 아침 8시 30분 안양시청 앞에서 안양의 해고 조합원들과 집회를 했다. 평택의 해고 조합원들은 다른 분회 지원투쟁이나 연대투쟁을 가더라도 조를 나눠 한 팀은 평택에 남겨 놓는다. 아침 9시 정각에 장송곡을 틀기 위해서다.

안양시청 앞에서 시청·청소업체·노동부를 상대로 규탄집회를 마친 뒤 배홍국 씨는 평택과 안양의 해고 조합원들과 함께 전라북도 정읍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전북일반노조 정읍환경미화지부 조합원들이 민간위탁 저지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읍지부에는 환경미화원이 20명뿐이라서 연대투쟁을 하러 가는 것이다. 오후 3시께 정읍에 도착한 배홍국 씨는 민간위탁을 반대하는 집회를 하고 저녁에는 정읍 환경미화원들과 함께 ‘민족춤패 출’의 비정규직 기획공연 〈아버지의 작업복〉이라는 노동무용극을 봤다.

공연이 끝난 뒤 그를 비롯한 평택과 안양의 해고 조합원들은 이후 연대투쟁 일정과 안양의 투쟁 방향에 대해 의논했다. 추석 전후로 좀 더 과감한 투쟁에 돌입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평택으로 출발해서 정오에 평택경찰서 앞에서 집회를 했다. 오후 3시에는 수원에서 열린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차별철폐 거리행진’에 참석했다.

배홍국 씨들의 일상은 집회에서 집회로, 거리에서 거리로 이어졌다. 그들은 전국구였다. 울산에서 열린 ‘박일수 열사 정신 계승 전국노동자대회’, 광주의 ‘5·18광주민중항쟁 24주년 국민대회’, 대구의 지하철노조 투쟁 등 당시 벌어진 집회나 크고 작은 투쟁에 결합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다행히 노조에서 생계비와 기름값과 같은 투쟁경비를 제공했다. 배홍국 씨도 처음에는 연대투쟁이 낯설었지만 이미숙 국장의 말을 듣고 잠자코 따르기로 했다. “노조에서 검은콩을 흰콩이라고 해도 믿어라. 노조는 조합원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배홍국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전국을 다니다 보니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면 미쳐 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도노조 해고자복직투쟁위원장이라는 직함까지 달고 씩씩하게 싸우는 그이지만 늦은 밤 연대투쟁을 마치고 평택으로 돌아오면 힘이 스르륵 빠지는 게 사실이다. 대체 어떻게 해야 복직이 될까. 노동부와 노동위원회는 이미 부당해고라는 판정을 내리고 원직복직시키라는 명령까지 내렸지만 평택시는 불복하고 또 소송을 한다고 한다. 대법원까지 소송을 끌고 가겠다는 심보다.

배홍국 위원장을 해고시킨 사람은 2002년 평택시장에 취임한 김선기 시장이었다. 행정고시를 패스해 공직생활을 시작한 김선기 시장은 민간위탁 신봉자였다. 2002년 경기도 31개 자치단체장들이 모인 회의에서 민간위탁 실시를 주도했던 이도 김 시장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김선기 시장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004년에 물러났다. 민간위탁과 선거법 위반은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고민할 새도 없이, 보궐선거로 당선된 송명호 시장도 민간위탁을 밀어붙였다. 전임과 후임 시장 모두 당시 한나라당 소속이었는데, 민간위탁에는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이고 다 한통속이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해야 민간위탁을 막을 수 있을까. 목이라도 확 맬까. 막다른 골목에 몰려 궁리를 쥐어짜다 보면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 배홍국 위원장은 밤새 뒤척이다 날이 밝을 즈음 부스스한 얼굴로 일어났다. 그리고는 시청 앞으로 가서 장송곡을 틀며 시위를 하는 것이었다.

한번은 공무원 한 명이 그를 구슬렸다.

“그 장송곡 좀 틀지 않을 수 없소? 대체 원하는 게 뭐요? 시청에 기사든 뭐든 취직시켜 줄 테니 내일부터 장송곡만 틀지 마시오.”

듣는 둥 마는 둥 공무원의 멀쑥한 양복 차림만 멀뚱히 바라보던 배홍국 위원장은 공무원의 말이 끝나자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는 듯이 “내일부터 틀지 않겠다”고 대꾸했다. 의외의 대답에 신이 난 공무원은 행여나 그가 사양할세라 부리나케 그를 고급술집으로 데려가 술을 왕창 샀다. 그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따라갔다. 공무원은 연신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으며 배홍국 위원장의 잔에 술을 채웠다. 그는 넙죽 넙죽 받아 마셨고 그만 뻗어 버렸다. 1년 동안의 복직투쟁으로 곯을 대로 곯은 몸이었다. 어느 이름 모를 술집 소파에서 아침을 맞은 배홍국 위원장은 깨질 듯이 아픈 머리를 감싸고는 습관처럼 시청 앞으로 나갔다. 봉고차에 올라탄 그는 어제보다 더 크게 장송곡을 틀었다. 같은 시각, 엊저녁 그에게 술을 산 공무원은 자신의 상관에게 “오늘은 조용할 겁니다”라며 의기양양하게 보고를 하는 중이었다.

공무원만 말 바꾸라는 법은 없는 것이다. 지금이야 노조 때문에 성질 많이 죽였지만 한때 그도 불뚝 성질에다 못되게 구는 거라면 남 못잖은 사람이었다. 고등학교도 다니다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때려치운 그였다. 배홍국 위원장은 해고된 자신들을 상대로 말이나 바꾸고 장난치는 공무원들에게 ‘엿 먹어라’ 하는 심정으로 하루저녁 놀아 준 것이다.

공무원들은 배홍국 위원장과 동료들이 아침마다 장송곡을 트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할 게다. 아니, 그들은 죽은 다음에 진짜 장송곡을 들어도 해고 노동자들의 심정을 모를 것이다. 평택 조합원들의 해고기간이 길어지자 김헌정도 좌불안석이 됐다. 김헌정은 경기도의 민간위탁 최전선이 평택이라고 여겼다. 평택에서 무너지면 민간위탁은 쓰나미처럼 각 분회로 들이닥칠 게 분명했다.

배홍국 위원장을 비롯한 해고 조합원들의 분투로 ‘평택전선’은 이상이 없었지만, 김헌정은 면목이 없었다. 그는 평택 집중투쟁이 있는 날이 아니어도 해고 조합원들의 얼굴을 보기 위해 평택에 들렀다. 그러나 인사만 나누고는 봉고차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빙빙 돌기만 했다.

2003년 6월 30일 민간위탁으로 해고가 됐던 평택분회 조합원 6명이 2004년 11월 15일부터 가로반 환경미화원으로 다시 일하게 됐다. 평택시도 나 몰라라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지, 경기도노조에 신규채용 형식으로 5명을 복직시키겠다는 제안을 하면서 복직대상자 추천을 의뢰했다. 노조는 나이가 많은 4명과 생활이 아주 어려운 1명을 선정해 시청에 통보했다. 그들은 해고 당시 재활용 쓰레기를 수집하던 환경미화원들이었다.

배홍국 위원장은 “나는 제일 나중에 복직하겠다”며 뒤로 빠졌다. 그래서 김헌정은 더 얼굴을 들 수 없었다. 투쟁은 투쟁이고, 미안한 것은 미안한 거다. 김헌정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감았다. 무슨 고민이 생기면 그의 고개는 옆으로 기울어진다. 위원장의 이런 버릇을 익히 알고 있는 배홍국 위원장이 김헌정을 토닥였다. 위로를 받아야 할 배홍국 위원장이 자신을 위로하자 김헌정은 퍼뜩 고개를 들고는 동지의 손을 굳게 마주 잡았다. 민간위탁이 사람을 잡기 전에 노조가 민간위탁을 잡아야 한다. 그러자면 어서 전국단일조직을 만들어야 한다. 갈 길은 아직도 멀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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