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11.22 금 08:00
상단여백
HOME 피플ㆍ라이프 인물
[나의 형제 김헌정 24] “우리는 민주노동당”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

제3부 전국단일조직을 향해

경기도 최초의 상용직 집단교섭·정치판을 빗자루로 쓸어버려라!·교육! 교육! 그리고 또 교육!·경기도노조의 새로운 장수들·김헌정, 또 구속되다·“여보, 나는 당신이 필요해!”·하루도 쉬지 않는 경기도노조·내 시선은 전국을 향하고 있다·“우리는 민주노동당”·‘NL’이냐, ‘PD’냐·기다리던 우군,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공무원노조·환경미화원은 공무원보다 적게 받으라는 법이 있나?·이상관 분회장의 신조 “내 밥숟가락은 내가 지켜야”·배홍국 해복투위원장의 다짐 “나는 제일 나중에 복직하겠다!”·4년2개월 만에 단협 체결한 성남분회·지부에게 조합비 50%를 달라?·끝까지 괴롭히는 청소업체들
---

“우리는 민주노동당”

“탄핵무효 시위 참여에 대한 찬반 입장을 갖고 논란을 벌이기보다 이번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을 얼마나 더 많이 당선시킬지가 중요합니다. 경기도노조는 한 달간 350명을 입당시키고 환경미화원이 보수정치를 쓸어버릴 각오를 다지고 있습니다. 정치홍보물을 제작하는 등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 지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2004년 3월 16일 열린 민주노총 단위노조대표자 결의대회에 참석한 김헌정은 이렇게 발언했다. 이 대회는 2월 임원선거에서 당선된 이수호 위원장과 이석행 사무총장 등 신임 집행부가 단위노조 대표자들과 투쟁계획을 공유하기 위해 마련됐다. 당시 시민·사회단체가 벌이고 있는 탄핵무효 집회에 민주노총이 참여하는 문제를 놓고 단위노조 대표자들은 1시간 이상 열띤 공방을 벌였다.

3월 12일 한나라당과 민주당·자민련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고 여의도와 광화문 등 전국 각지에서 연일 대규모 탄핵반대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시민사회단체들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를 수구세력들이 기도한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규정하고 ‘탄핵무효 범국민행동’으로 정국을 돌파한다는 방침을 내놓았다.

얼핏 생각하면 민주노총도 참여하면 그만 아니냐고 하겠지만 사태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모두 지난 정권들에 비하면 민주적이었고, 인권과 복지 분야에서 눈에 띄는 진전이 있었지만 이 기간 노동은 끊임없이 뒤로 밀렸다.

이른바 ‘4대 부문 구조조정’에서 표적은 노동이었고 이는 환경미화원들의 경우만 보더라도 엄연한 사실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이 그토록 두려워한 신자유주의를 불러들인 게 바로 김대중·노무현 정권이었다. 시민사회나 노사모 등은 이회창이 정권을 잡았다면 훨씬 더했을 것이라며 민주당을 두둔했다. 그러나 이러한 논법은 노동자를 객체로 본다는 점에서 보수와 다를 게 없었다.

많은 노동조합들이 민주정부의 등장에 힘을 보탰고 노동자들 또한 이를 반겼지만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속내는 복잡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와 같은 무지막지한 탄압은 피할 수 있었으나, 그 대신 신자유주의 정책이 밀려왔다. 독재정권이라면 한 판 붙기라도 하겠는데 상대가 명색이 민주정부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이 이어졌다. 이러는 사이 현장은 각개격파 당하면서 무너지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당황했다. 누가 자신의 목을 조르고 있는지 알아야 싸울 게 아닌가. 민주정부는 입만 열면 IMF 사태 핑계만 댔다. 우리도 그렇게 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다는 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거짓말이었다. 고통분담은 말뿐이었고 노동자와 서민들이 독박을 썼다. 외국자본과 재벌·부동산투기업자 그리고 그 밑에 있는 전문직 종사자들이 구조조정의 열매를 독차지했다. 이것이 바로 양극화다.

탄핵사태는 근본적으로 보수적인 두 당파, 즉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서로 헤게모니를 다투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민주노총으로서는 수구세력의 공격에 맞서 민주정부에 힘을 실어 줘야 했지만 이 과정에서 자칫하면 들러리가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둬야 했다. 게다가 민주정부 등장 이후 노동이 배제되면서 나타난 양극화야말로 민주주의 위기의 본질이었다.

회의가 길어질수록 의제는 꼬였고 이에 따라 토론은 점점 더 오리무중에 빠졌다. 탄핵사태에 대한 민주노총의 정치적 입장을 정하자는 것인지, 민주노총이 탄핵무효집회에 참여해야 할지 말지를 결정하자는 것인지 논리적인 혼선까지 일어나고 있었다.

김헌정은 이런 논란에 관심이 없었다. 평소에도 김헌정은 단순한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민주정부 등장 이후 나타난 노동의 배제와 그로 인한 양극화 및 민주주의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민주노총은 일찌감치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주장하고 민주노동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하기로 결의한 바 있었다.

2000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울산 북구와 창원을 선거구에서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됐으나, 안타깝게도 원내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두 지역의 민주노동당 당원들과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분루를 삼키며 4년 내내 원내진출의 그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2002년 지방선거부터 정당명부제가 실시됨으로써 2004년 총선에서는 민주노총 출신 단병호·심상정·천영세·최순영 후보가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민주노총은 이들을 기필코 당선시켜야 했다. 김헌정의 발언은 민주노총이 촛불집회 참석 여부로 논란을 벌일 게 아니라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촉구한 것이었다. 민주노총이 80만 조합원을 움직여 적극적으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함으로써 민주노동당에게 자신감을 줘야 한다는 게 김헌정의 생각이었다.

다음 날 경기도노조 조합원 350여명이 여의도 국민은행 앞에서 민주노동당 집단입당식을 가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노조의 방침과 결의에 따라 입당을 하고 당비납부를 위해 CMS 신청을 해도 이처럼 집단입당식을 대외적으로 가진 적은 없었다.

이날의 집단입당식은 경기도노조가 4월 총선을 염두에 두고 2월부터 정치교육과 당원배가사업을 집중적으로 진행한 결과였다. 경기도노조의 교육 가운데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핵심적 과목 가운데 하나였고 조합원들은 2002년 지방선거 때 5명의 후보를 내고 합심해서 선거운동을 치른 경험을 갖고 있었다.

이 집단입당식이 탄핵사태로 말미암아 열린우리당만 보이던 정국에서 위축돼 있던 민주노동당에게 활력과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음은 물론이다.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이 “우리는 민주노동당”이라고 선언하던 자리에는 천영세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노회찬 사무총장 등이 참석해 입당을 축하하고 감사를 표시했다.

노동운동을 한다고 해서 모두 의견이 같을 수는 없다. 민주노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노총 안팎에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단체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이 단체들은 민주노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구체적인 이념과 노선으로 들어가면 차이가 있었다.

이 단체들 가운데 민주노동자전국회의(전국회의)가 있었다. 전국회의는 2001년 “자주·민주·통일의 기치를 들고 전 민중의 통일단결로 사회의 참된 민주변혁과 민족의 자주화와 통일을 쟁취하자”는 내용의 창립선언문을 발표하고 공식적으로 발족했다. 김헌정은 이 단체의 회원이었다. 하지만 전국회의가 창립할 때 김헌정은 가입하지 않았다. 주변의 동지들로부터 가입 권유를 받았지만 그때는 너무나 바빴기 때문이다.

2003년 무렵 의정부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한 석권호 민주노총 경기도본부 미조직특별위원장이 김헌정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전국회의 경기지부장을 맡고 있던 석권호 위원장은 전국회의의 교육사업을 담당할 인물을 찾고 있었다. 석 위원장은 김헌정이 노조의 일상활동에서 교육을 신주단지 모시듯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던 터라, 그에게 교육위원으로 활동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김헌정은 이 부탁을 받아들였다. 전국회의가 주창한 자주·민주·통일의 대의는 김헌정도 동의하는 바였다. 전국회의 교육위원으로서 그가 첫 번째로 한 일은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였다. 교육에 들어가기에 앞서 회원들이 어떤 교육을 요구하고 있는지 먼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김헌정은 노동조합이든 당 활동이든 사실관계에 기초한 명확한 의제가 없는 막연한 논의를 극도로 경계했다. 교육만 하더라도 그렇다. 누구나 교육이 필요하다는 점은 공감하지만 막상 어떤 내용을 어떻게 교육할 것인가로 들어가면 의견이 다 다르다. 회원들이 처한 상황과 조건 역시 동일하지 않다. 이런 점들이 사전에 확인되고 조정되지 않으면 교육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수박 겉핥기에 그치고 만다.

김헌정은 설문조사를 통해 회원들의 요구사항을 정확히 잡아낸 뒤, 이를 바탕으로 회원들 간 의견을 모아 필요한 교육내용을 정리했다. 김헌정은 매사 이렇게 일했다. ‘조사 없이 발언 없다’는 그의 행동강령 가운데 하나였고 이 점에서 볼 때 그는 실사구시(實事求是) 활동가였다. 김헌정의 이런 일솜씨는 전국회의 회원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2004년 2월 민주노총 임원선거에 김헌정이 속한 전국회의의 회원이 출마했다. 이석행 사무총장 후보가 그였다. 이석행 후보는 이수호 위원장 후보와 러닝메이트가 돼 유덕상-전재환 후보조와 맞대결을 펼쳤다. 김헌정은 2004년 1월 12일자 〈매일노동뉴스〉에 “민주노총 4기 임원선거에 바란다 - 내가 선택하는 기준”이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임원 선출의 기준으로 노선과 명분이 아니라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를 중요하게 꼽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아무리 옳은 노선과 훌륭한 명분이 있더라도 말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는 기고문에 자신의 선택기준을 소개했다. △오랜 세월 대중과 괴리되지 않고 현장조직 활성화에 기여했는가 △기업별 노조 타파와 노동자의 차별철폐를 위해 활동하고 수행했는가 △노조운동의 질적 변화를 위해 직접 활동했는가 △상층사업에서 현장으로 복귀해 활동하기도 했는가 △자신이 활동한 조직적 성과가 현재에도 존재하고 있는가 △다양한 대중조직 경험과 교섭경험 투쟁경력이 있는가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김헌정의 고민은 풀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는 기고문에 이렇게 썼다.

“이러한 나의 판단은 선거홍보물에 나온 몇 줄의 경력만으로는 파악이 안 되고 있어 문제다. 결국 유세장에서 마음에 우러나오는 소리로 선택하거나 흘러 다니는 정보로 선택하는 대의원들도 있을 것이다. 민주노총의 선거방식과 조직의 질적 변화가 오지 않는다면 3년마다 이러한 고민은 계속될 것 같다.”

김헌정은 홍희덕 경기도노조 위원장과 논의했다. 결론은 이수호·이석행 후보조였다. 김헌정은 자신이 선택한 이수호·이석행 후보조의 당선을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2004년 평양에서 ‘남북노동자 5·1절 통일대회’가 열렸다. 김헌정은 민주노총 조합원 자격으로 참가했다. 이때는 민주노동당이 총선에서 국회의원 10명을 당선시킨 뒤라 평양에 간 민주노총 조합원들 사이에서도 화제는 단연 민주노동당이었다. 그 무렵 전국회의에서는 ‘전국회의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민주노동당 노동위원회로 재편하자’는 의견이 제시돼 이를 두고 많은 토론이 벌어지던 참이었다.

남북노동자 통일대회 기간 동안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공식 일정이 끝나면 삼삼오오 모여 이 주제를 놓고 토론을 하기도 했다. 김헌정은 민주노총이 민주노동당을 강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으나 이 자리에서 뚜렷한 의견을 표명하지는 않았다. 뒤에 나오겠지만 김헌정의 복안은 따로 있었다.

NL이냐, PD냐

과거 한국노총은 독재정권의 하수인에 그치지 않고 자본의 주구 노릇을 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비로소 한국의 노동조합은 자주성을 획득했고, 새롭게 태어난 노동조합들은 스스로 ‘민주노조’라고 부르며 자신의 정체성을 밝혔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조진영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그런데 나는 민주노조진영에 같이 있다고 해서 또는 추구하는 이념이나 노선이 비슷하다고 해서 동지라거나 한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나는 매우 엄격하다. 나는 말로 하는 운동은 질색이다. 동지라고 해서 언제나 옳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동지라는 칭호가 우리 운동에 적당주의를 부추기거나, 심지어 내 편 네 편 가르는 데 쓰이는 것이라면 나는 사양하겠다.

대학생이 되면서 우리 사회의 모순에 눈을 떴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는 그 모순의 원인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 나오게 돼 있다.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1학년 2학기 때부터 상대(商大)의 ‘비공개 학습모임’에 나갔다. ‘비공개’라면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대학에 들어오기 전에 동두천시대학생회에서 사회비판에 열을 올리는 선배들과 만난 적이 있고, 그 선배들이 권해 주는 책도 몇 권 읽었기에 두려움은 딱히 없었다.

나처럼 동두천에서 태어나고 의정부고등학교에 다니고 대학까지 함께 간 친구로는 김영호가 있었다. 영호가 나를 ‘비공개 학습모임’에 소개했다. 그는 1학년 1학기 때부터 모임에 참여했는데, 2학년이 되면서 동두천시대학생회에서 활동하겠다며 모임을 그만뒀다.

모임은 한 학년 위인 상대 선배들이 학습과 토론을 지도했다. 그때 <역사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 같은 책들을 읽었다. 나는 게으른 편도 아니고 술을 진탕 퍼 마시지도 않아서 학습준비를 성실하게 잘하는 편이었다. 우리 사회의 모순 원인을 찾고자 책을 읽고 토론을 하지만 이게 책 몇 권 읽는다고 금방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현상의 이면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그래서 경제학 학습도 했다.

그러나 공부를 하기 위해 하는 학습은 아니었다. 모순을 아는 것만으로는 대학생의 소임을 다했다고 할 수 없었다. 우리는 피가 끓는 청년들이었고, 전두환 정권은 너무나 가증스러웠다. 우리는 학습하는 만큼 행동해야 했고 행동하는 만큼 더 학습해야 했다. 행동은 시위를 뜻했다. 그 시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대학생들의 하루란 ‘학습-시위-술’이었는데, 거기서 술을 뺀 게 내 하루였다.

서울 동북부지역에 위치한 고려대·건국대·한양대 학생들은 주로 건국대 쪽에서 기습시위를 벌였다. 2학년이 된 우리들에게 선배들은 시위를 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습시위라고 해 봤자 몇 분 동안 구호를 외치는 정도였지만 이를 실행하기 위해서는 주도면밀하게 작전을 세워야 했다. 그 덕분에 경찰에 잡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왔다.

내 하루일과는 ‘학습-시위’로 이어졌지만 가끔씩 다른 날도 있었다. 나는 경영학과 동기들과도 잘 어울렸다. 비공개 학습모임에 나간다고 혼자서 독립투사인 척하는 것은 내 성미에 맞지 않았다. 학생운동은 어디까지나 학생대중의 운동이어야 했다. 방학 때면 동기들과 무전여행도 갔고 체육대회나 모임이 있으면 빠지지 않았다. 뒤풀이를 할 때 내가 불렀던 노래는 <못생긴 내 얼굴>이었다. 내가 노래를 부르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으면 모두들 배꼽을 잡고 넘어갔다.

대학 3학년 때부터는 학내에서 공개적으로 활동을 했다. 1984년 서울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서 군사정권이 설치한 학도호국단을 거부하고 학생회를 조직하자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때만 해도 학생회는 불법이었고 학내에 사복경찰이 상주해 있었다. 1985년이 되면서 내가 다니던 한양대에서도 비공개 학습모임에 참가하던 학생들이 주동이 돼 학생회를 만들기 위해 공개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1986년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으로 내정돼 있었다. 내 임무는 총학생회가 각 동아리에 운영비를 지원할 때 ‘운동권’ 동아리에도 분배가 잘되도록 하는 것이었다. 아마 내가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어서 이런 일을 맡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총무부장으로 일을 해 보지도 못하고 경찰에 잡혀가고 말았다.

1986년 2월 4일 서울시내 14개 대학 1천여명의 학생들이 서울대에 모여 ‘헌법철폐투쟁대회’를 열고 ‘헌법제정국민회의를 구성하자’는 내용의 서명운동을 제안했다. 당시 각 학교에서 건설된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많은 학생들이 참여했다. 이 집회를 ‘개헌서명 서울대 연합시위’라고 부르는데 경찰은 3천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학생들을 마구잡이로 잡아갔다. 나는 이날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배후조종 혐의로 3월 21일 구속됐다.

학생운동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때까지 나는 특정한 이념이나 노선을 따르지는 않았다. 그저 ‘빨간 물’이 약간 든 운동권이었을 뿐이다. 감옥살이를 마치고 나와 현장에 취업하기 위해 선배들을 만나면서 내게도 노선이라는 게 생기기 시작했다. 이 대목은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1970년대 후반 반정부세력의 가장 오른쪽에는 야당이 있었고 야당 다음 왼쪽은 재야였다. 재야의 주축은 교회의 양심세력과 4·19 및 6·3 사태의 주역들 그리고 1960년대 중반 이후 대학에서 배출된 청년들이었다. 재야 다음 왼쪽은 학생운동이었고, 가장 좌측에 사회주의 이념을 막 받아들인 학생운동 출신의 비공개 서클들이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 반정부세력들 간의 노선 차이는 그리 드러나지 않았다.

1980년 광주의 경험은 이들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역사책에서나 읽었을 뿐인 무장봉기를 목격한 이 나라의 반정부세력은 이로부터 확연하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야당이야 원래부터 선거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었으니 그랬다 치고 학생운동이 급속도로 좌경화된 것이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해마다 1천명에 가까운 숫자의 제적생들이 학교에서 쫓겨났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197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학습에 나선 선배들의 지도를 받으며 우리는 현장으로 들어갔다. 우리가 꿈꾼 것은 혁명이었고 노동해방이었다.

구로와 인천, 창원과 울산의 공단지역은 학생운동 출신 ‘예비혁명가’들로 바글바글했다. 이러는 와중에 노선의 분화가 나타났다. 한쪽은 선도투쟁을, 다른 한쪽은 대중투쟁을 외쳤다. 선도투쟁을 외친 쪽은 계급모순이 먼저라고 주장하고, 대중투쟁을 외친 쪽은 민족모순 해결 없이는 노동해방은 불가능하다고 맞섰다. 이러한 노선 대립이 구체화된 게 바로 PD와 NL이었다.

앞에서 소개했던 남노련의 선배들과 학습을 하면서 나는 노선을 갖게 됐다. 선배들은 분단과 미군 주둔으로 상징되는 민족의 아픔을 해결하지 못하면 자본주의의 모순 역시 극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선배들과 토론을 하면서 어린 시절 내 고향의 어두운 풍경들이 떠올랐다. 미군부대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는 동두천의 슬픈 역사……. 나는 평생 노동자와 민족만을 생각하며 살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뭐라도 하나를 알게 되면 나 혼자 꿍치지 않는다. 그것이 좋은 일일 경우 꼭 남에게 알리고 함께하자고 꼬시는 성격이다. 초등학교 친구 의환이와 주민등록증 때문에 만났을 때 재미교포들의 북한방문여행기 <잃어버린 땅을 찾아서>를 주면서 읽어 보라고 했다. 금서를 받아 든 의환이는 놀라는 눈치였다. 의환이에게만 그런 게 아니라 동두천에 사는 동기와 후배들에게도 불온서적이나 각종 자료들을 몰래 챙겨 줬다.

삼영모방 노동자들에게는 이런 책을 같이 보자고 하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하는 것만으로도 위협을 느끼는데 더 이상의 부담을 주면 곤란하다. 내 생각을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지식인과 노동자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다르다. 지식인은 독서로도 곧잘 이념을 얻지만 노동자의 이념은 투쟁으로 벼려진다. 하기는 그래서 지식인들이 변신을 잘하는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각설하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학생운동이 서서히 수그러들면서 운동권 내의 노선 대립은 노동운동으로 옮아왔다. 그 양상은 노동자 대투쟁이 일단락되고 민주노조들이 생겨나면서 더 심해졌다. 예전 같으면 수면 밑에서 보이지 않게 진행됐을 논쟁이 언젠가부터 백주의 일상이 됐다. 논쟁은 끝이 없었고 인격을 의심치 않을 수 없는 일까지 벌어졌다.

1993년인가,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던 박동수 씨와 창동 우성화학 해고노동자인 정인근 씨가 5월 1일 메이데이에 맞춰 북한을 방문하려고 베를린으로 떠났다. 박동수 씨는 서울북부노동상담소에서 일한 적이 있어 나와 친하게 지냈는데 그가 북한 방문을 생각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중에 그가 돌아온 뒤에 들으니 노동자들도 통일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방문은 쉽지 않았다. 두 사람이 베를린에 도착해서 먼저 찾은 곳은 범민련 해외본부였다. 북한 방문을 주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은 범민련 해외본부는 서울의 한총련에 연락을 해서 확인부터 했다. 한총련에서 돌아온 답은 “두 사람은 노동조직의 대표들이 아니므로 방북에 협조해 주지 말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포기하지 않고 어렵게 수소문을 한 끝에 북측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들에게서도 “한총련의 의사를 존중해야 하므로 어쩔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의 거사는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안기부가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안기부는 두 사람의 행적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서울로 돌아온 그들을 바로 연행하지 않고 한 달 동안 미행했다. 누구를 만나는지 지켜본 뒤 한 두름에 엮을 심산이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박동수 씨는 베를린에서 돌아오자마자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때 신혼이었다. 운동을 직업적으로 오래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학원을 차린 직후였다. 박동수 씨는 내가 노동운동 일선에서 물러난 줄로 짐작하고 편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베를린에서 겪은 일을 나에게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로서는 위로 외에는 달리 건넬 말이 없었다.

박동수 씨가 다녀가고 한 달 뒤 안기부에서 나를 찾아왔다. 나는 박동수 씨의 방북과 무관하며 지금 결혼해서 학원을 경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안기부는 신혼집과 학원을 뒤집어 놓고 나서야 내 말을 믿는 눈치였는데, 그래도 안기부에 가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그때까지 북노련 사건으로 내게 걸린 수배가 법적으로 풀리지 않은 상황이었다.

북노련은 완전 조작이었다. 경찰은 남노련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온 조석현 선배가 경기북부지역에 비슷한 조직을 결성했을 것이라는 심증 하나만으로 조 선배와 인간적으로 친한 사람들, 경기북부지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을 이리저리 엮어 조직사건을 하나 만들어 냈다. 그러나 조 선배는 건강 문제도 있고 해서 활동을 접고 번역일만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무슨 대단한 건을 잡은 것처럼 달려들었던 경찰도 1년쯤 지나자 포기를 했다. 내 수배도 사실상 해제가 됐다. 안 그랬다면 결혼도 못하고 학원도 못 차렸을 것이다. 안기부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지 그냥 조사만 하면 된다며 빨리 가자고 성화였다. 내가 응하지 않으면 집이나 학원으로 안기부 직원들이 자꾸 들락거릴 것 같아서 내 발로 안기부에 가서 2박3일 조사를 받았다.

베를린에 가서 마음만 다치고 돌아온 박동수 씨는 결국 구속이 됐는데 그의 상처는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가 활동했던 서노협은 한겨레신문 6월 25일자에 “박동수는 서노협 조직부장으로 일해 왔으나 지난 4월 초순께부터 업무를 수행하지 않아 5월 19일자로 업무방기·소재불명으로 해임시켰고, 이번 사건과 서노협은 전혀 관계가 없다”는 내용의 광고를 냈다. 한총련과 통일운동 쪽도 박동수 씨를 감싸 주려 하지 않았다.

박동수 씨와 정인근 씨는 한총련에서는 무시를 당하고 서노협에서는 버림을 받은 셈이었다. 두 사람은 재야인사도 아니었고 대학생도 아니었지만 통일에 대한 일념만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돌출적인 행동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름 없는 노동자들의 통일운동이 이런 대접을 받아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었다.

전후 사정을 파악한 나라도 그들의 순수한 뜻을 알리고 지켜줘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북부노동자회관·경기북부지역노동자모임 참울림·일꾼노동교실 활동가들을 만나서 광고를 내자고 제안했다. 다들 동의를 해서 “전 서노협 조직부장 박동수 씨와 노동자 정인근 씨의 이번 방북 노력은 통일을 위한 노동자의 자주적 교류 실현을 위한 첫걸음이었습니다”라는 제목의 광고가 7월 22일자 〈전국노동자신문〉에 실렸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나는 같은 운동권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지는 않게 됐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2004년 5·1절 기념 남북노동자 통일대회에 참석하면서 평양 땅을 밟았을 때, 한참 동안 잊고 있었던 이 일이 떠올라 가슴이 저렸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얼마나 많은 동지들이 쓰러졌는가. 박동수 씨처럼 돈키호테 취급을 받고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한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계급과 민족이라는 거대한 담론으로 논쟁을 하고 대립을 하지만 현장에서는 임단협 투쟁·파업전술·노조 사수 등 노동기본권을 찾는 권리투쟁조차 겨우 겨우 풀어 나간다. 노동조합이라는 체제 내의 일상활동에서도 모범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조직사업도 제대로 꾸리지 못하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목표나 현실과 동떨어진 사업방식으로 내부분열을 일으킨다면 운동에 큰 죄를 짓는 게 될 것이다.

나는 분명한 내 노선과 이념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노선이나 이념과 같은 추상적인 담론보다 현실의 운동이 확고히 자리 잡고 있다. 대중(大衆) 없이 이념 없다. 조직 없이 노선 없다. 실천 없이 논쟁 없다. 이게 내 신조다. 병사 없는 장교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보급 없는 작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미경 작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