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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21] 경기도노조의 새로운 장수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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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전국단일조직을 향해

경기도 최초의 상용직 집단교섭·정치판을 빗자루로 쓸어버려라!·교육! 교육! 그리고 또 교육!·경기도노조의 새로운 장수들·김헌정, 또 구속되다·“여보, 나는 당신이 필요해!”·하루도 쉬지 않는 경기도노조·내 시선은 전국을 향하고 있다·“우리는 민주노동당”·‘NL’이냐, ‘PD’냐·기다리던 우군, 민주노동당 의원단과 공무원노조·환경미화원은 공무원보다 적게 받으라는 법이 있나?·이상관 분회장의 신조 “내 밥숟가락은 내가 지켜야”·배홍국 해복투위원장의 다짐 “나는 제일 나중에 복직하겠다!”·4년2개월 만에 단협 체결한 성남분회·지부에게 조합비 50%를 달라?·끝까지 괴롭히는 청소업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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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교육! 그리고 또 교육!

경기도노조가 커지면서 나는 사무실에서 일하는 날이 많아졌다. 날마다 있는 사무처회의, 수시로 있는 임원회의, 일주일 한 번씩 하는 중집회의에서 각 분회의 상황을 공유하고, 일정에 맞게 결정을 해야 할 사안이 많아졌다. 2002년 하반기부터는 경기남부권에 분회들이 많아지면서 권역별 간부회의를 하고 중집과 상집을 격주에 한 번씩 열었다.

사무실에서 내가 하는 주된 업무는 선전물을 만드는 것이다. 선전물을 인쇄소에 맡기면 돈도 많이 들고 원하는 때 찾기 어려워서 아예 간이인쇄기를 하나 사무실에 들여놓았다. 처음에는 상황이 발생할 때마다 찍었다. 시민들에게 배포하는 유인물이므로 부정부패와 비리를 척결하자는 내용이다. 조합원들은 투쟁 훈련을 겸해서 유인물을 배포한다.

2002년 들어서는 8절지 1장 양면으로 된 <경기도노동조합 소식>을 1천부씩 격주로 발간해서 10호까지 냈다. 지방선거에 들어가면서 지방의회 출마 선포식이며 자치단체의 부정부패를 알리는 유인물을 찍느라 <경기도노동조합 소식>은 중단이 됐다. 그 뒤로 임단협 투쟁이 시작되면서 각 분회의 상황에 맞게 투쟁 소식지를 제작해서 찍었다. 2003년 한 해 동안 찍어 낸 유인물이 무려 53만장을 웃돌았다.

내가 밤을 새워 글을 쓰고 인쇄기를 돌려서 선전물을 만들어 놓으면 간부나 조합원들이 투쟁하는 분회나 우리가 자주 진을 펼치는 경기도청 앞으로 자동차에 싣고 간다. 선전물을 넘겨받은 조합원들은 시민들에게 전달한다.

이전보다 현장으로 나가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이지 그래도 하루에 한 번은 현장으로 나갔다. 간부들이 분회들의 교섭이나 투쟁을 이끄는데 위원장인 나는 집단교섭이나 현장에 가서 힘에 부치는 투쟁을 하는 분회들이 안고 있는 어려운 지점을 뚫어야 했다.

하지만 나라고 늘 신통방통한 전략전술을 내놓는 것은 아니다. 노동법을 모르는 공무원들 기를 꺾고 조합원들과 힘을 합쳐 같이 싸우는 정도다. 분회별 교섭은 거의 나가지 않았다. 상집 간부와 분회 간부들이 맡아서 했다.

경기도노조 때는 사무실에서 밤새는 날이 많았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간부들의 평균 퇴근시간이 새벽 2∼3시였다. 간부들은 한 분회만 다녀오는 것으로 일이 안 끝났다. 이 분회 저 분회 다니다 보면 한밤중이 돼서야 사무실에 들어오게 되고 또 급히 의논할 상황이 있으면 회의하고 보고서 적다 보면 그 시간이 되는 것이다.

우리 간부들이나 조합원들이 노조활동으로 술을 마실 수 있을 때는 교육이나 수련회를 마치고 나서가 고작이다. 그것도 교육이 밤 10시는 돼서 끝나기 때문에 그때 가서야 뒤풀이 자리가 마련된다. 조직사업을 하면 성과가 바로바로 생겨서 분회가 늘어나니까 나를 비롯해서 간부들 모두가 정신없이 일했다.

2002년부터 1박2일 조합원 숙박교육을 시작했다. 노조에 가입하면 조합원들은 분회별로 신입조합원 교육을 받는다. 분회별로 최소한 한 달에 한두 번씩 교육시간이 있다. 간부들은 숙박 교육수련회를 1년에 4번 받는다. 나는 이것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에서 전 조합원의 숙박교육을 기획했다.

사실 의정부 투쟁 때만 해도 조합원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교육을 받았다.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야학 분위기였다. 분회가 많아지면서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으니 숙박이라도 하면서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다.

노동조합에 가입하기 전에 조합원들이 아는 노조란 텔레비전에서 본 게 다였다. 그래서 대부분 노조라고 하면 해고·구속 심지어는 사망까지 떠올린다. 이런 분들이 노조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민주노조를 제대로 가꾸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투쟁 속에서만 배울 수는 없다. 그래서 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조합원 숙박교육을 하면 간부들은 더 분주해진다. 인원 점검에다 교육비 입금 확인에 차량·준비물까지 챙겨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것만이 아니다. 조합원이 특별한 이유 없이 숙박교육에 참여하지 않으면 간부들은 다시 조직을 해야 된다.

나는 조합원 숙박교육 문제로 일처리를 깔끔하게 하는 조명심 국장에게 좋지 않은 소리까지 했다. 언젠가 의정부지부 조합원들의 참석이 저조했는데 이게 조 국장 탓인 것처럼 화를 냈다. 나는 경기도노조의 뿌리를 내린 의정부지부 조합원들이 100% 참석할 것이라고 기대를 했는데 그게 어긋났던 것에 골이 났다.

2002년 실시한 조합원 숙박교육은 1천여명이 넘는 조합원들을 10여 차례로 나눠서 진행했다. 의정부 때는 내가 강사로 뛰었지만 숙박교육을 하면서는 외부에서 강사들을 모셨다.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장(전 중앙노동위원회위원장)·하종강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박준성 역사연구소장·박승흡 한국비정규노동센터 대표(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등은 소재는 다양하게 접근하지만 주제는 노동조합에 대한 이해로 귀결되는 강의를 했다. 그리고 노동문화전문가들이 와서 노래 배우기 프로그램을 했고 영상교육시간도 마련했다.

보통 민주노총이나 공공연맹에서 회의나 교육을 하면 듣는 사람 반, 나와서 전화하거나 담배 피우는 사람 반이다. 그런데 우리 조합원들이 교육받는 동안에는 이런 풍경을 찾아 볼 수 없다. 내가 규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제아무리 바쁜 현장 간부라도 교육시간에는 자리를 지켰다. 또 조합원들이 순진하시다. 땡땡이는 꿈도 못 꾼다.

조합원들은 교육을 ‘세뇌교육’이라고도 한다. 신입조합원 교육에 분회에서 다달이 받는 교육, 숙박교육까지 하니까 강사는 달라져도 들었던 이야기들이 자꾸 나오기 마련이다. 조합원들은 ‘세뇌’라고 하면서도 노조가 조합원들에게 교육을 하는 것은 옳은 것이라며 기꺼워했다.

2002년 1월에 조합원이 된 수원의 김영철 분회장님은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우리보다 노조활동을 오래했는데 〈임을 위한 행진곡〉도 부를 줄 모른다”고 하면서 노조에서 교육받는 것을 긍지로 여기셨다. 수원시청 환경미화원들은 1995년 기업별 노조를 만들었고 상급단체는 한국노총 연합노련이었다. 수원시청의 상용직 노동자들은 뒤늦게 경기도노조에 가입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아무리 경기도노조가 좋아도 나이 오십이 넘어 행진곡풍의 노래에 장단을 맞춰 주먹을 쥐고 팔을 흔드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다. 용인의 한 조합원은 “투쟁! 투쟁! 하면서 팔을 흔드는 게 꼭 공산당 같아서 무섭다”고까지 했다.

나는 조합원들이 투쟁가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노래방 기계처럼 음에 맞춰 강의용 대형 화면에 글자가 뜨도록 하는 프로그램을 고안했다. 투쟁가를 부르는 게 익숙해지면 구호도 외칠 수 있게 된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기계를 좋아했다. 노트북을 장만하더라도 꼭 최신형을 구입한다. 그래서인지 신기술을 도입하는 게 불편하지 않았다.

교육을 통해 투쟁가나 구호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민주노조 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조합원들은 삶에 대한 태도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바뀌어야 한다. 내가 설정한 교육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이를 위해 노동운동의 역사를 교육하고 비정규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해 교육을 하는 등 장시간 동안 조합원들을 괴롭히는(?) 것인데, 조합원들은 강사들의 말을 구절구절 이해하지는 못해도 주제는 잘 잡아냈다. 숙박교육을 마친 한 조합원은 이렇게 요약정리를 했다.

“노조를 하면 남을 위해서 희생할 줄 알아야 된다. 이 말이야!”

물론 알아도 실행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교육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한 조합원도 분회지원이나 연대투쟁으로 지치면 경기도노조보다 기업별 노조가 낫다고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이렇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기 위해서 교육이 또 필요하다고 조합원들 스스로 인정한다.

이러한 ‘세뇌교육’ 덕분에 사회생활을 하기가 수월해졌다는 조합원들도 계셨다. 이후에 부위원장을 맡게 되는 부천의 추윤호 조합원께서는 이전에는 친목계 모임을 가도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술만 드셨다고 한다. 그런데 노조에서 교육을 받으면서부터는 어느 자리에 가든 누가 한마디 하라고 하지 않으면 섭섭하다고 할 정도가 되셨다.

나는 조합원들이 노조에 가입해서 동료들과 힘을 합쳐 당당하게 자신의 노동조건을 스스로 개선시켰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또 한 가지의 바람이 있다. 조합원들이 노조활동을 통해 노동자가 세상을 바꾸겠다는 정치의식을 가졌으면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민주노조운동의 참된 의의라고 생각한다.

경기도노조의 새로운 장수들

2002년 6월 지방선거와 8월 상용직 집단교섭이 끝나자 경기도노조는 임단협 투쟁체제로 전환했다. 상용직 집단교섭으로 각 자치단체와 임금협정을 맺은 경기남부권 분회들은 이제 단체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의정부·포천·고양분회는 2003년 단체협약을 갱신하고 임금인상도 해야 했다. 김헌정은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경기도 내 자치단체들을 압박해서 상용직만이 아니라 환경미화원까지 모든 분회의 임단협을 집단교섭으로 진행할 계획이었다.

2002년 대통령선거를 맞아 진보진영이 기득권세력에 맞서 전면적인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는 게 김헌정의 판단이었다. 이런 정세를 만들어 나가는 데 경기도노조도 임단협 투쟁으로 힘을 보태고 이러한 노동자와 농민들의 전국적인 투쟁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집단교섭을 쟁취해 임단협 투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경기도 내 상용직 임금인상 집단교섭 때 공무원들은 노동법을 몰라서 경기도노조에 끌려갔다고 할 수 있지만 두 번째부터는 그들도 달라졌다. 이번에는 임금인상이 아니라 단체협약이었다.

자치단체들은 몸을 사리고 경기도노조의 단체협약 집단교섭 요청에 공문으로 답을 하기 시작했다. 수원시는 연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내오고 화성군은 집단교섭을 할지 공문으로 알려 주겠다고 했다. 광명시는 공문으로 시의 공식적인 입장을 알려 주겠다고 했다. 용인시는 임금은 마무리 됐고 단체협약은 자신들이 모르기 때문에 담당부서를 선정해서 공문을 발송하겠다고 답했다. 대부분의 자치단체들이 이런 식이었다.

경기도 내 자치단체들이 노조를 알아 가는 속도는 빨랐지만 경기도노조는 생각만큼 빨리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분회가 20개가 됐다. 이제 걸음마 단계인 분회들이 절반이었다. 2002년에 조직된 경기남부권의 분회들은 상용직 집단교섭이 끝난 뒤 조합원 교육을 받고 10월 초가 돼서야 분회 체계를 세우면서 분회장과 부분회장을 선출할 수 있었다. 그동안은 시나 구·반별로 임시대표가 이끌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평택시는 경기도 내 상용직 교섭 때부터 임금인상은 고사하고 민간위탁을 시키겠다고 했다. 실제 10월 5일 해고예고 통보를 했다. 평택은 임단협이 문제가 아니었다. 민간위탁 저지투쟁을 서둘러야 했다.

2001년 파주의 민간위탁 저지투쟁 이후 경기도노조는 분열의 틈이 생긴 경험이 있다. 어렵고 힘든 싸움은 노조의 구성원 모두를 시험대 위에 올린다. 김헌정의 재빠른 조치로 조직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지만 이러한 경험이 있기에 민간위탁 저지투쟁을 놓고 노조는 손익계산서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김헌정의 판단기준은 조직강화가 최우선이었다. 민간위탁 저지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이 단결의 힘을 깨닫고 노조로 뭉쳐서 지속적으로 강고한 투쟁을 이어 나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이긴 싸움이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그는 사람을 믿었다. 의정부·파주에서는 민간위탁을 막지 못했지만 평택의 노동자들은 막을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 두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며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그의 세계관에서 비롯됐다. 현실에서의 실천도 그것으로 귀결됐다.

경기도노조는 2003년 임단협 투쟁의 포문을 2002년 10월 12일 평택역 앞에서 열었다. 이날 수원을 비롯한 남부권 분회는 물론이고 경기북부권의 의정부·포천·파주의 조합원들까지 투쟁에 나서 버스 8대가 평택으로 들어왔다.

김헌정은 ‘예산낭비 부정부패 비리온상 민간위탁 저지 단체협약 쟁취를 위한 경기도노동조합 결의대회’ 대회사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평택시민 여러분, 우리는 평택시의 일부 나쁜 공무원들이 여러분들이 낸 세금을 흥청망청 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조사하고 규탄하기 위해서 달려왔습니다. 평택시는 시청에서 일하는 상용직 노동자들을 민간위탁시킨다고 합니다. 민간위탁은 부정부패 비리의 온상입니다.”

10월부터 경기도노조와 8개 자치단체들의 집단교섭이 시작됐지만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인상보다 더 어려운 게 단체협약이다. 집단교섭에 들어온 자치단체들은 서로 눈치만 보면서 교섭을 지연시켰다. 쟁점이 됐던 것은 민간위탁 시 ‘합의’냐 ‘협의’냐 하는 부분이었다. 이번 집단교섭에 자치단체들은 노무사까지 1명을 대동해서 나왔다.

경기도노조는 11월 1일 고양에서 총파업 출정식을 가진 뒤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첫날 한나라당 경기지부에 항의하는 철야농성을 전개했다. 다음 날은 수원시청 앞에서 집회를 하고 경기도청 앞 집회까지 했다. 파업 마지막 날에는 화성과 김포에서 집회를 하고 파주로 이동해서 집회를 열었다. 대통령 선거일인 12월 19일 전에 자치단체들에게 최대한 압박을 가해 협상의 접점을 좁히기 위해서였다.

1월 2일 경기도노조는 경기도청 앞에 천막 20개를 쳤다. 2일과 3일 이틀 동안 총파업을 벌였다. 파업 첫날에는 경기도노조 시무식을 천막농성장에서 하고 둘째 날에는 눈이 펑펑 쏟아지는데 250여명이 평택으로 몰려가서 집회를 했다.

평택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수로원들은 대건토건이라는 업체로 민간위탁이 됐고 끝까지 반대하던 김성규·최옥근·정동식·김동식 등 조합원 4명이 12월 31일자로 해고가 됐다. 이들은 시청 앞에서 농성투쟁에 들어갔다.

평택시청은 청소업무도 민간위탁을 시킬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기능직 기사와 환경미화원들에게는 청소업체를 만들면 지분을 나눠 가지면서 함께 운영하라는 등 회유를 했다.

평택의 환경미화원들은 상용직 노동자들이 경기도노조에 가입할 무렵 한국노총 소속 노조를 만들었다.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하던 배홍국 씨도 환경미화원노조에 가입해 있었다. 도로보수업무와 청소업무의 민간위탁설이 나돌자 배홍국 씨는 위원장에게 대책이 뭐냐고 물었고, 위원장은 민간위탁은 막지 못한다는 답만 했다. 답답해진 배홍국 씨는 민주노총 평택안성지구협의회를 찾았고 그곳에서 고양에 있다는 경기도노조를 알려줬다.

그는 새벽일을 마치고 함께 일하는 김동일 씨와 고양으로 향했다. 그의 마음속은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다. 민주노총에서 알려 준 만큼 기대를 걸었고 한편으로는 거기서도 안 된다고 하면 무슨 대책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노조 사무실에 있던 김헌정과 이미숙 국장은 “민간위탁을 막는 싸움을 같이해 보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평택의 상용직 노동자와 기업별 노조에 가입했던 환경미화원들 절반을 설득해서 경기도노조로 데려왔다.

평택은 민간위탁에 복수노조까지 걸렸다. 조합원들은 시와 교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노조에 가입하자마자 천막부터 쳐야 했다. 하지만 싸워보지도 못하고 쫓겨날 수는 없다는 게 평택 조합원들의 다수의견이었다.

상용직들이 중심이 된 집단교섭은 1월부터 개별교섭으로 전환했다. 대선 이후 정치권은 무관심해졌고 자치단체들은 여전히 눈치만 보고 있었다. 노조는 시간과 비용이 들더라도 각개격파를 하기로 결심했다.

홍희덕 사무처장을 비롯해서 현장 출신의 전임 간부들과 이미숙 조직국장이 각 분회를 다니면서 교섭과 투쟁을 이끌었다. 조합원 현장교육도 그들의 몫이었다. 개별교섭을 처음 하는 수원·안양·시흥·광명·화성·과천·용인·오산·김포 등 여러 분회의 조합원들에게 피켓시위·시장 항의방문·천막농성 시범을 보였다. 개별교섭에서 나타날 수 있는 자치단체들의 탄압과 회유에 대해서도 분회 간부들과 조합원들에게 단단히 교육을 시켰다.

수원은 김영철 분회장이 앞장섰다. 1947년생인 김영철 분회장은 그의 작은누나가 수원시 공무원으로서 동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김영철 분회장이 노조를 한다고 나서니 시에서는 그의 누나에게 압력을 넣기 시작했다.

김영철 분회장의 누나는 동생을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말렸다. 김 분회장은 거꾸로 누나를 설득했다. “누님은 먹고살 만하신데, 2년 더 해서 무슨 영화를 보시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반문하는 동생에게 누나는 결국 양보를 하고 말았다.

김 분회장의 누나는 공무원이지만 상용직으로 일하는 남동생이 늘 걱정되고 안타까웠다. 하수도 안으로 사람이 들어가서 시멘트 바르는 작업이 있는데 수로원들이 처리할 수 있는 경우가 있고 작업기구들을 동원해서 전문가들에게 맡겨야 할 작업이 있다. 공무원들은 수로원들이 할 수 없는 작업임에도 무리하게 일을 시켰다.

하수도가 무너지면 황천길이 되는 줄 알면서도 수로원들은 당장의 밥줄이 달려 있으니 작업을 거부할 수가 없다. 그의 누나는 동생이 한다는 노조가 마땅치는 않았지만 이해는 하고도 남았다.

자치단체와 개별교섭이 시작되면서 각 분회별로 투쟁을 이끄는 새로운 장수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경기도노조로서는 관우·장비에 조자룡·마초·황충이 가세한 격이었다.

시흥의 이상관 분회장은 체격이 좋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졌다. 시흥이 고향인 이 분회장은 1942년생(호적 1948년생)으로 서울 단국공고 전기과를 졸업하고 대한모방과 대우전선 계열 광진전자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는 1980년대 화물차로 운송사업을 하다 망해 먹고 이삿짐센터를 운영했는데, 이것도 신통치 않아서 1995년에 시흥시청에서 수로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기업체의 노동자로 오랫동안 일을 했던 그가 수로원이 돼 겪은 공직사회는 상식 이하의 조직이었다. 공무원들의 예의 없는 태도는 제쳐 두고 공무원들은 일이 되게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눈이 와서 제설작업을 해야 되면 옆의 청소과에 쓰지 않는 제설기계가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공문 타령을 하면서 수로원들만 닦달하는 게 공무원들이었다.

무사안일주의로 일하는 공무원들의 위세를 업은 반장들의 횡포는 극심했다. 그는 노조라도 있어야 된다는 생각에서 노동부에 전화를 걸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노동부 공무원들이 자치단체 공무원들에게 위협이 될 노조를 만드는 법을 알려줄 리 없다.

수원의 김영철 분회장·안양의 이준휘 분회장·의왕의 유안조 분회장이 조직을 하기 위해 시흥의 수로원 대기실로 찾아왔을 때 그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도 혼자서 결정을 할 수 없는 일이라 전체 의견을 물어보고 답을 하겠다고 했다.

그는 수로원 20여명을 설득해서 노조에 가입을 시켰는데 워낙 공무원들에게 당하고 살아서 그런지 대부분 노동자들이 무척 겁을 냈다. 시흥에서 노조활동을 제대로 하는 조합원은 그를 포함해서 4명이었다.

개별교섭 이후 각 분회별로 천막을 치라는 투쟁지침이 전달되자 이상관 분회장은 시청 앞마당에 천막을 쳤다. 다음 날 시흥의 공무원들 200여명이 몰려나와서 천막을 뜯어내려고 했다. 그는 물러서지 않고 조합원 3명과 함께 천막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안타깝게도 천막의 다리는 6개였고, 그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상관 분회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집회신고를 하지 않고 천막을 쳤다고 공무원들이 난리를 치면 그는 “당신들은 집에서 잔치할 때도 경찰서에 신고하냐?”면서 다시 천막농성장을 만들었다. 공무원들이 다시 뜯어내도, 이상관 분회장과 3명의 조합원들은 천막농성장을 만들기를 서너 차례 반복하면서 교섭기간 내내 흔들리지 않고 투쟁을 이어 나갔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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