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예고한 급속한 보건의료서비스 규제완화로 '의료민영화' 논란이 한창이다. 보건의료노조와 산하 조직들이 지난 9일부터 100만 국민 의료민영화 반대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보건의료노조 전북대학교병원지부

#1. 며칠 전 프레스 톱날에 손가락 두 개를 잃은 김씨는 밤을 지새우며 고민한 끝에 가운데 손가락을 포기하기로 했다. 약지 봉합에는 중지보다 두 배가 많은 1억2천만원의 수술비가 필요하다. 10년 전부터 한시도 빼놓은 적이 없는 결혼반지가 끝까지 그의 눈에 밟혔다. 아내와 결혼할 당시만 해도 이 같은 치료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게 바뀐 의료보험제도 탓이다.

#2. 가정의학과를 졸업한 후 민간의료보험회사 고문으로 일하고 있는 박씨는 지난해 말 한 통의 편지를 받고 불안에 떨고 있다. 편지를 보낸 사람은 2~3년 전 말기 난소암을 앓던 보험가입자의 남편이었다. 당시 환자는 1차 판정 결과 보험료 지급 승인을 받았지만 박씨는 그가 곰팡이균 감염사실을 숨겼다는 이유로 보험료 지급을 취소시켰다. 남편은 편지에서 환자가 결국 치료비가 없어 사망했고, 언제 한 번 찾아가겠다고 했다.

지난 2008년 4월 국내에서 개봉한 미국의 의료보험제도를 다룬 마이클 무어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Sikco)에 등장한 실제 사례를 한국식으로 재구성해 본 내용이다. 물론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병원이 이들 환자 치료를 거부할 수 없는 건강보험 당연지정제를 도입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데 최근 의료 민영화 논란으로 시끄럽다. 공중파 토론 프로그램에선 정부와 시민사회가 “의료 민영화가 맞다”, “아니다”로 부딪히고, 온라인 게시판에서는 “감기치료 100만원 시대가 열렸다”는 우려가 떠돈다. 정부는 얼마 전 포털사이트에 '원격의료 보건의료 투자 활성화 정책 바로알기'라는 제목의 해명 사이트까지 만들었다. 논쟁에 불을 붙인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입’이었다.

정공법 실패한 이명박, 에둘러 가는 박근혜?

“보건·의료 등 5대 유망 서비스 업종별로 관련부처 합동TF를 만들어 이미 발표한 규제완화 정부대책을 신속하게 이행하고….”

“의료 분야 규제는 공공성을 저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완화하고 일자리 확대와 해당 분야 발전을 도모하겠다.”

박 대통령이 이달 6일 취임 첫 기자회견과 이튿날 저녁 새누리당 의원들과의 청와대 초청만찬에서 연달아 쏟아낸 말이다. 그의 입에서 반복되는 “규제완화”의 대상은 박 대통령이 주재해 열린 제4차 무역투자진흥회의에서 발표한 ‘보건·의료산업서비스 육성방안’이다. 핵심은 의료법인에 영리추구를 위한 자회사 설립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의료법 시행령을 통해 장례식장 등 8개로 제한되던 부대사업이 '의료연관사업'으로 대폭 확대된다. 의료법인끼리 인수합병도 가능해진다. 이에 앞서 정부는 메디텔(의료관광호텔) 허용과 원격의료 도입까지 예고했다.

정부의 이런 움직임은 예측가능한 행보였다. 의료 민영화라는 단어가 널리 퍼진 것은 이명박 정부 때였다. 이명박 정부는 집권 내내 건강보험 당연지정제 폐지와 영리병원 설립을 추진했다. 의료체계의 근간을 허무는 급작스러운 일이었다. 정치 성향에 상관없이 국민의 반발에 가로막혔다. 시민사회는 여기서 교훈을 얻은 박근혜 정부가 교묘한 방식으로 의료 민영화를 추진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정공법으로 영리병원을 밀어붙였던 이명박 정부와 달리 의료법인 자회사라는 중간단계를 설정해 놓고 에둘러 목적지에 다가가려 한다는 설명이다.

정부 “건강보험은 유지되니 민영화 아니다”

이 같은 우회로를 만들어 놓은 만큼 정부는 시민사회의 “의료 민영화” 주장에 반박할 최소한의 근거를 마련해 놓고 있다. 정부는 문제가 되고 있는 의료법인의 자회사 설립 허용에 대해 “영리병원 허용도 의료 민영화도 아니다”는 주장을 거듭하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만든 '원격의료 보건의료 투자 활성화 정책 바로알기' 사이트에 접속하면 “의료 민영화 정부도 반대합니다”라는 문구가 대문짝처럼 떠 있다.

정부 주장의 핵심은 “규제완화 대책 어디에서도 건강보험을 건드리고 있지 않다”로 요약된다. 정부는 “의료 민영화는 곧 건강보험 민영화”라는 명제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흐름은 이렇다. 첫째, 현재 우리나라는 모든 국민이 의무적으로 건강보험에 가입해야 하고, 의료기관은 이들에 대한 치료를 거부할 수 없다. 둘째, 의료 민영화는 특정 민간보험에 가입한 환자만을 치료하거나 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환자가 본인의 돈을 모두 내고 치료를 받는 의료서비스를 뜻한다. 셋째, 정부의 보건·의료서비스 규제완화가 건강보험을 건드리지 않으니 의료 민영화는 아니다.

정부는 의료기관의 자회사 설립도 영리병원과는 궤를 달리한다고 주장한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이미 대학법인이 학교병원의 부대사업을 허용하고 있어 다른 병원들과의 형평성 문제가 있다”며 “의료법인이 다양한 부대사업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의료시설과 장비개선, 종사자 처우개선에 사용하면 의료서비스의 질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시민사회 “자본에 먹거리 주기 위해 자회사 고집”

정부가 그동안 의료기관 설립자격에 제한을 두고 자회사 설립을 금지한 까닭은 의료행위의 비영리 원칙 때문이었다. 의료법 시행령 제20조(의료법인 등의 사명)는 “의료법인과 의료기관을 개설한 비영리법인은 의료업(부대사업을 포함)을 할 때 공중위생에 이바지해야 하며, 영리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정부 스스로가 “수익 창출”을 운운하며 규제를 허문 것은 이러한 원칙을 스스로 위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의료법인이 자회사를 설립하게 되면 도대체 어떤 일이 생기는 것일까. 전문가들은 당장 의료기업의 부대사업 수익이 자회사로 빠져나가 환자들의 의료비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서울대병원의 예를 들어 의료비 증가 작동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서울대병원은 1년 의학연구용역·임대료·주차장 등 의료 부대사업으로 185억원의 이익을 낸다. 이를 통해 의료행위로 인해 발생한 적자를 메운다. 그런데 부대사업 운영을 위해 민간자본과 합작한 자회사를 설립하고, 그 수익이 100% 외부로 빠져나간다고 가정하면 의료비를 인상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서울대병원의 연간 환자수 275만명이 진료당 약 7천원의 의료비를 추가로 부담해야 한다는 얘기다.

정부는 자회사 설립범위를 부대사업으로 제한하고, 자회사 수익의 80% 이상을 의료기관에 재투자하도록 하는 등 충분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한지원 연구실장은 “정부가 말하는 재투자 유인에 법적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의료기관의 자회사 역시 상법의 적용을 받는 주식회사이기 때문에 재투자 방식은 주식배당 형태가 될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의료기관의 경영활성화를 위한 것이라면 부대사업 범위만을 늘리면 되지 굳이 자회사 설립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한 실장은 이를 정부와 코레일이 수서발 KTX 운영을 위해 자회사 설립을 밀어붙이는 것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풀이했다. 결국 민간자본에 먹거리를 주기 위한 것이 근본 목적이라는 것이다.

건강보험 몰락? 괴담일까, 미래일까

자회사 설립은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에도 악영향을 준다.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가정의학과 전문의)은 이윤창출을 위해 설립한 자회사가 의료기관의 진료활동까지 영향을 미치는 ‘역침투’ 현상을 우려했다.

우석균 정책실장은 “수치료·아로마·운동치료 등 수많은 의료연관시설은 물론이고 건강식품·화장품 판매를 위해 자회사를 세우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어떻게 주식회사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느냐”며 “의사들이 자본의 힘에 강제돼 환자들에 대한 과잉진료와 자회사 서비스를 권하는 식의 영업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시민사회는 현재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국가 중 꼴찌 수준인 건강보험 보장성과 나날이 증가하는 전체 의료비에 주목하고 있다. OECD가 지난해 6월 발간한 ‘OECD 헬스 데이터 2013’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공공의료비 비중은 2011년 기준 55.3%였다. 공공의료비는 국민 전체 의료비 중 가계부담분을 제외한 것으로 건강보험 보장성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OECD 평균(72.2%)에 한참 못 미치고, OECD 35개국 중 꼴찌(32위) 수준이다. 이마저도 매년 감소하는 추세다. 반면 2000년~2011년 국민의료비 연평균 증가율은 9.3%로 OECD 전체 국가 중 1위다.

우석균 실장은 정부의 보건의료산업 규제완화를 96년 비정규직 양산의 근거가 된 노동법 날치기 통과에 비유했다.

“당시 누군가 훗날 비정규직이 전체 노동자들의 절반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면 모두가 괴담 취급을 했을 것이다. '맹장수술 2천만원'도 지금은 괴담이지만 머지않아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다. 그럴 가능성이 크다.”

보건의료노조(위원장 유지현)도 "정부 정책은 명백한 의료 민영화"라는 입장이다. 노조는 최근 긴급 중앙집행위원회와 전국지부장회의를 동시에 열고 의료 민영화 저지를 위한 투쟁본부를 가동하기로 했다. 나영명 노조 정책실장은 “원격진료·영리 자회사 설립·인수합병이 허용되면 영리자본이 의료를 장악한 미국식 의료제도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라며 “국민건강을 파괴하고 건강보험제도를 붕괴시키는 정책이기 때문에 총파업을 불사하는 전면투쟁으로 저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삼성에 의한, 삼성을 위한 규제완화?

시민사회는 정부가 추진하는 일련의 의료규제 완화정책이 재벌대기업의 배를 불리기 위한 시도로 보고 있다. 그중 손꼽히는 곳이 삼성이다. 근거로 제기되는 것은 삼성경제연구소가 2007년 2월 이후 발간한 2건의 의료산업 관련 연구보고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보고서에 △영리의료법인 허용 △민간의료보험 활성화 △원격의료 도입 △건강관리서비스 민간개방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보건당국은 이를 여과 없이 핵심 추진과제로 삼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 바통을 이어받은 박근혜 정부가 취임 1년 만에 원격의료 도입과 사실상 영리의료법인의 전 단계의 의료법인 자회사 설립 허용을 예고한 것이다.

삼성은 2011년부터 삼성메디슨을 시작으로 프로소닉·넥서스·레이 등 다양한 의료기기 회사를 인수하며 원격의료 시대를 준비해 왔다. 박근혜 정부가 차후 건강보험제도에 손을 댈 경우 삼성메디슨-삼성의료원-삼성생명으로 이어지는 수익창출 구조가 열린다.

다만 삼성의료원은 상호출자제한 기업집단에 속해 자회사 설립에 제약을 받을 것으로 보이지만 다른 의료법인 자회사에 투자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삼성이 의료산업을 신성장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말은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했다.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은 “삼성이 줄기세포 쪽으로 유망한 차병원그룹과 협력관계를 맺어 왔는데 의료법인 자회사 설립이 가능해지면 여러 전략적 투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며 “의료법인 간 인수합병이 허용되면 국내외 유수 병원 인수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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