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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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우리는 해방으로 간다

나의 영원한 ‘공범’·철문을 부수고 동지들 품으로 달려가고 싶다·가로분회와 의정환경분회의 동시파업·십 년 전·‘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이게 단협이냐? 항복문서지!”·김주실 씨의 선택 “우리도 노조 해요~”·파업도 업무복귀도 노동자의 권리·돈 많이 걷는 경기도노조?·문공달 씨의 사연1 ; 200만원을 바치고 청소부가 되다·문공달 씨의 사연2 ; “내 뒤에는 경기도노조가 있다”·‘진짜 공무원’ 민상호 씨·송양권 부분회장의 고백 “시장님, 우리 요구를 빨리 들어주지 않아 감사합니다”·악랄한 안산의 청소업체들·물러서지 않는 안산분회·민간위탁이라는 ‘공공의 적’·파벌은 용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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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실 씨의 선택 “우리도 노조 해요∼”

고양시 일산구 재활용선별장 대기실에서 한 여성노동자가 종이가 여러 장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이게 뭐지?”

경기도노조 가입원서였다. 대체 왜 이게 여기 놓여 있을까. 경기도노조는 민들레홀씨처럼 의정부에서 포천으로, 또 고양으로 날아갔다.

고양으로 경기도노조를 불러들인 이는 일산구청 녹지과 소속의 이영진 씨였다. IMF 사태 이후 고양도 의정부와 마찬가지로 환경미화원 정년을 만 61세에서 만 57세로 줄였다. 이영진 씨는 1944년생으로 2000년 그해 쉰여섯 살이었다. 호적상으로는 1946년생이어서 57세로 정년이 된다고 해도 몇 년은 더 다닐 수 있지만, 실제 나이 때문에 동료보다 정년단축을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2000년 가을이 되면서 그해 퇴직을 한다는 동료들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IMF 사태 이후 단축된 정년에 불안감을 품고 있던 그는 텔레비전 뉴스에서 봤던 민주노총을 떠올렸다. 잘은 몰라도 그곳이라면 답을 해 줄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고 했다. 빨갱이라는 거부감보다 정년 회복이 급했다. 민주노총 전화번호를 알 리 없는 그는 114에 물었다.

이영진 씨의 전화를 받은 ‘민주노총 사람’은 만나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다. 이영진 씨는 동료인 한일섭 씨와 함께 버스를 타고 민주노총 사무실이 있다는 삼선교로 갔다. 두 사람의 아들뻘 돼 보이는 ‘민주노총 사람’은 공손하게 열심히 듣더니 방법이 있다는 것이었다. 의정부에서 비슷한 문제로 환경미화원들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는 대답에 그들은 헛걸음한 게 아니다 싶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민주노총 사람’이 심동진 조직부장이다. 심동진 부장은 경기북부지구협의회 양미경 조직부장에게 이 사정을 알렸다. 2000년 의정부 파업 투쟁으로 민주노총 내에서 경기도노조 하면 환경미화원 조직사업을 떠올렸다. 의정부에서 조직을 할 때처럼 양 부장은 얼른 고양의 이영진 씨를 찾았다. 이어 노조를 만들어야 하고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영진 씨와 한일섭 씨는 아는 사람 십여 명을 불렀다. 장소는 이영진 씨의 부인이 운영하던 작은 식당이었다. 양 부장은 의정부 사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의정부 환경미화원들이 노조를 만들어서 단축된 정년을 원상회복 수준으로 돌려놓았고 그동안 받지 못했던 야간수당과 휴일근로수당 3년치를 다 받아 냈다는 대목에서 고양의 환경미화원들은 무릎을 쳤다.

고양시에 공무원이 아닌 일용직 노동자들은 환경미화원·수로원·준설원·청사관리원·재활용선별원 등 500여명이나 됐다. 환경미화원이 200여명으로 가장 많았고 초동으로 움직인 이영진 씨가 환경미화원이어서 그들이 중심이 됐다. 경기도노조에서 간부들이 와서 노동조합이 무엇인지 교육을 했다. 이런 모임이 두세 차례 더 있었다. 노조 만들면 빼앗겼던 수당을 찾을 수 있고 정년도 회복된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11월 6일 경기도노조 고양분회를 결성하는 날 130여명이 가입했다. 경기도노조 간부들은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돌리면서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나눠 주라고 했다. 노조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힘이 커진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 말을 들은 한 환경미화원은 자신이 일하는 일산구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하는 선별원들을 떠올렸다. 그들이라면 노동조합을 할 법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고양시 재활용선별장에는 환경미화원 10여명과 선별원 8명이 근무했다. 선별원은 전부 여성이었다.

선별원들이 일하게 되면서 선별장은 그나마 일할 만한 곳이 됐다. 선별장에서 일하는 미화원들은 도시락을 싸 오거나 그곳에서 밥을 직접 해 먹는 방식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취사도구는 사람들이 버린 밥통과 밥상을 주워 썼다. 심지어 수저까지 그랬다.

1996년 4월부터 선별원으로 일을 하러 온 여성들이 이 모양을 보더니 공무원들에게 취사도구를 사 달라고 하자는 것이었다. 환경미화원들은 말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라고 말렸는데, 여성들은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공무원들은 선별장 대기실에 싱크대를 놓아 주고 전기밥솥이며 취사도구를 사 줬다. 그녀들은 공무원들에게 굽실거리지 않았고, 가끔 일처리 방식이나 근로조건에 관한 문제를 놓고 따지기도 했다.

고양시 재활용선별원인 그녀들은 대부분 40대였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닐 나이였다. 아이 잘 키우는 게 우선이지만 남편 월급만으로는 살림살이가 팍팍했다. 일산신도시 덕분에 집값은 자고 나면 올랐다. 남편이 고생해서 벌어 돈을 아껴 쓰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내 집 마련이라도 하려면 아내들도 일을 해야 했다.

한동네 살던 고양시청 공무원이 재활용선별장에서 일을 해 보면 어떻겠느냐고 권했다. 1996년 고양시에 덕양구와 일산구가 생기면서 일산구에도 재활용선별장이 생겼고 일할 사람이 필요해졌던 것이다. 월급은 60만원가량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근무시간이 좋았다. 아침 9시 출근에 저녁 6시 퇴근이었다. 이렇게 해서 일산구에 사는 동네 여성 6명이 뭉쳐서 일산구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재활용선별장이라는 곳은 환경미화원들이 수거한 쓰레기 중 재활용이 가능한 것들을 분류하는 곳이다. 컨베이어벨트에 재활용 쓰레기들이 올라가면 폐지·알루미늄·플라스틱·페트병 등을 품목별로 손으로 골라낸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은 환경미화원이 아니고 선별원이라고 했다. 임금도 환경미화원보다 못했다.

재활용선별원들은 내 집에서 나온 재활용 쓰레기다 생각하고 몸 사리지 않고 일을 척척 해냈지만 공무원들은 그녀들의 의욕을 뚝뚝 떨어뜨렸다. 시의 인사이동이 있을 때마다 담당 공무원이 바뀌었다. 짧게는 6개월 길게는 2년에 한 번씩 바뀌었다. 새로 일을 맡은 공무원들은 자기 식대로 업무지시를 했다.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더 피곤해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답답한 게 공무원들은 뭘 물어도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남편들이 5월 1일 노동절에 쉬니까 “노동절에도 일하느냐”고 물어보면 “공무원이 노동절이 어디 있느냐”고 면박을 줬다. “그럼 공무원인데 설이나 추석에 일하지 않으면 왜 무급이냐”고 물어보면 “알 필요 없다”고 입을 막았다. IMF 사태가 터지면서는 일하는 날이 300일에서 280일로 축소됐다. “왜 우리가 1년에 280일만 일을 해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나오지 말라면 나오지 마세요”라고 퉁명스레 쏘아 대는 것이다.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하면서 공무원들에게 ‘아줌마’ 소리를 들으며 구박 아닌 구박을 듣던 그네들은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네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직장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서 아이 키우며 살림을 사는 대한민국의 여성들이었다. 아무리 부업 삼아 시작한 일이라지만, 하루 8시간 근무하는 여성노동자인 그녀들은 더 나은 대접을 받아야 했다.

2000년 11월 서른네 살로 다섯 살 먹은 남자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김주실 씨는 재활용선별장 대기실 탁자 위에 놓인 노동조합 가입원서에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또박또박 써넣었다. 그녀는 선별원들 가운데 가장 어렸다. 일도 똑 부러지게 잘했고 그런 만큼 일하는 사람으로서 권리도 찾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임금이나 근로시간 같은 문제는 담당 공무원들에게 따진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그녀는 동료들을 큰소리로 불렀다.

“우리도 노조 해요∼.”

파업도 업무복귀도 노동자의 권리

고양시는 1990년대에 일산에 신도시 및 택지개발사업이 추진되면서 고속성장을 하고 있었다. 김인수 조사법률국장과 나는 경기도노조 설립 이전부터 고양의 환경미화원들을 만나러 다녔다. 아는 환경미화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다. 비질하는 환경미화원 분들을 붙들고 근로조건 설문조사를 하면서 어려운 일 있으면 연락하시라고 명함을 드렸다.

우리의 이런 노력이 직접 이영진 씨와 연결이 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아예 헛짓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영진 씨가 우리 명함을 보고 연락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양에 교육하러 갔더니 우리를 기억하는 환경미화원들이 몇 분 계셨다. 또 동두천이나 의정부 투쟁을 텔레비전으로 봤다는 분들도 계셨다.

이런 덕분에 노조 가입을 위한 교육이나 분회 결성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고 고양에서는 노조 가입을 조금 서둘러야 할 이유가 있었다. 고양시에서도 환경미화원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정년을 단축했기 때문이다. 달라진 정년에 따라 2000년 12월 31일자로 퇴직하는 분들이 계셨다. 이를 막아야 했다.

11월 6일 고양시 문예회관에서 고양시청분회 설립식이 열렸다. 130여명이 참석했다. 고양 분회의 임시분회장으로 이영진, 부분회장으로 이영삼·조경승·조순연 조합원이 선출됐다. 또 총무는 한일섭·김봉호·유봉희·송성준 조합원이 맡았다. 부분회장과 총무는 내용상으로는 부서별 대표 격이었다.

고양의 조직 대상자는 500여명 정도 됐고 하는 일도 다양했다. 환경미화원·상용직(자치단체는 수로원과 준설원을 일컬어 상용직이라고 부른다)·재활용선별장에 근무하는 여성노동자·청사관리 노동자·철도 건널목에 근무하는 노동자까지 고양의 조합원들은 의정부나 포천보다 월등히 많았고 다양한 업무를 하고 있었다.

경기도노조로서는 고양 조합원들이 자치단체 소속의 첫 조합원들이었다. 우리 노조가 고양시청과 단협을 체결하면 이것이 선례가 돼서 다른 자치단체에 분회를 건설하는 게 한결 쉬워진다. 지리적으로도 고양을 돌파해야 한강 이남인 부천·과천·수원 등 경기남부 쪽으로 조직을 확대할 수 있다.

그런데 고양의 황교선 시장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황 시장은 한일약품 평사원에서 대표이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한일약품에는 1987년 노조가 설립됐는데, 상급단체를 민주노총 화섬연맹으로 두고 있었다. 그러니까 황 시장은 관리자로서 민주노조와 싸운 경험이 있었다.

역시나 황 시장은 시작부터 달랐다. 고양분회 설립 이후 바로 정년을 앞둔 공원사업소 환경미화원 8명에게 해고예고를 통보했다. 간부들 10여명이 시청 로비농성을 해서 8명을 복직시키고, 정년 문제는 단협으로 결정하기로 했다.

11월 30일부터 단체교섭이 시작됐는데 공무원들은 단체교섭 테이블에 앉기는 했지만 나왔다는 시늉만 냈다. 참다못한 고양분회 간부들은 시장실로 항의방문을 다녔다.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던 시장과 1월 16일 딱 마주치게 됐다.

황 시장은 조합원들에게 “왜 제3자를 개입시키느냐”고 시비를 걸었다. 전노협을 협박하던 솜씨가 나왔다. 그런데 사용자와 공권력이 툭하면 걸고 나왔던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은 1997년에 없어졌다. 게다가 나는 제3자가 아니었다. 경기도노조의 위원장이었다. 있지도 않은 제3자 운운하던 황 시장은 숫제 협박을 했다. “제3자를 빼고 우리끼리 하지 않으면 예산에 편성해 놓은 환경미화원 자녀장학금도 없애 버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나이가 많았던 포천군수는 “우리끼리 하자”고는 해도 “자녀장학금을 없앤다”는 협박까지는 하지 않았다. 과연 사장님 출신 시장은 대단했다. 이런 시장의 뜻을 잘 받들어서 행정자치과 공무원은 다음 교섭에 위원장인 내가 나오면 시장은 나오지 않는다고 전했다. 시청은 경기도노조와 고양시청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힌 것이었다.

고양시는 조합원들을 계속 괴롭혔다. 덕양구 재활용선별장의 환경미화원들은 겨울철에는 오전 9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했다. 그런데 담당 공무원들이 2001년 1월부터 겨울에도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라고 지시했다. 노조가 생겼기 때문에 편의를 봐주지 않겠다는 얘기였다. 이런 게 참 치사한 거다.

고양시청의 이런 행위가 법적으로는 문제없지만 명백한 노조 탄압이다. 조합원들은 노조 탄압이라고 지시를 거부했다. 그러자 고양시는 조합원들이 오전 7시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시간외수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당시 행정자치부의 임금기준에는 환경미화원의 시간외수당은 시간외근로와 상관없이 주게 돼 있다. 1988년 행자부에서 환경미화원 임금기준을 만들 때 환경미화원들의 생활고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은 1월 1일을 유급휴일로 인정받고 있었는데 그날 쉬었다고 주차수당·월차수당까지 뺐다.

고양시가 강경하면서도 교묘하게 나오는 반면 고양분회 조합원들의 초창기 단결력은 강하지 못했다. 의정부나 포천처럼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없었던 것이다. 정년단축으로 당장 나가야 할 사람은 10여명 안팎이었다.

이러다 보니 처음에는 대다수 조합원이 투쟁조끼를 입는 것도 힘들어했다. 게다가 덕양구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하는 조합원들은 소극적이었다. 이 점은 좀 걱정이 됐다. 얼마 자나지 않아 결국 덕양구 쪽에서 100여명 되는 조합원들이 탈퇴했다.

분회 설립 때부터 덕양구 쪽 조합원들에게 영향력이 있던 분회 간부는 내게 자율권을 달라고 요구했다. 예를 들면 ‘며칠부터 조끼를 입자’거나 ‘집회 전원 참석’ 같은 지침을 따르는 것이나 공무원들과의 사적 협상 등을 본인이 알아서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나는 ‘마음씨 좋은 위원장’이라는 소리를 들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덕양구 쪽 조합원들의 탈퇴로 고양분회의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2월 10일 시청 앞에 천막을 쳤다. 조합원들 50여명이 연차휴가를 내고 조를 짜서 낮이든 밤이든 농성장을 지키도록 했다. 농성장은 자연히 학교가 됐다. 이번에는 강사진에 변화가 생겼다.

나와 김인수 조사법률국장만이 아니라 의정부분회 간부들이 강사로 맹활약을 했다. 밤이면 홍희덕 사무장님과 나천봉 쟁의부장님 등이 고양 천막농성장을 찾아와서 본인들이 몸소 겪은 투쟁 이야기를 하셨다. 의정부 간부들의 생생한 체험담이 위원장인 나의 강의보다 더 인기 있었다.

천막농성장을 한 달 유지하다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철거를 했다. 고양시 공무원들은 미관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농성장 철거를 계속 요구했다. 그들은 교섭이 안 되는 이유가 농성장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 측 사정도 있었다. 교섭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조합원들은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투쟁에 대한 열의가 식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하게 농성을 지속할 이유는 없다고 판단했다. 우리도 평화적 교섭을 원하기에 농성을 푼다고 했다.

그런데 고양시청은 우리가 농성을 풀어도 여전히 단체교섭 지연작전을 썼다. 이에 맞서 우리는 4월 2일 전 조합원 4시간 시한부 파업을 벌였다. 그리고 의정부와 포천 조합원들을 고양으로 모아서 큰 집회나 총회를 열기 시작했다. 4월 22일에는 다시 천막을 치고 이영진 분회장님이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다른 부분회장들은 삭발을 했다.

간부들의 선도투쟁으로 분위기가 달아오르려는 시점에서 일부 조합원들의 노조 탈퇴가 이어졌다. 한 간부는 노조를 그만두는 것도 모자라 몇몇 조합원들까지 데리고 나갔다. 투쟁 시기에 일부 조합원들의 탈퇴는 꼭 나타나는 현상이다. 모든 조합원들이 노동자의식으로 무장해서 끝까지 투쟁한다는 건 현실의 노동운동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투쟁을 이어 갈 수 있게 하는 게 위원장인 나의 역할이다.

4월 25일에는 고양분회 조합원들이 처음으로 공무원들과 몸싸움을 했다. 시장을 만나겠다고 시청 본관에 들어선 분회 간부들을 고양시청의 전 공무원들이 나와서 막았다. 분회 간부 10여명과 200명은 족히 넘는 공무원들이 대치를 했으니 수적으로는 아주 열세였지만 분회 간부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이날 재활용선별장에서 일하는 김주실·서희숙 조합원이 맹활약을 했다. 분회 간부들은 공무원들이 쳐 놓은 인의 장벽을 뚫기 위해 그야말로 사투를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두 여성 조합원은 온몸에 멍이 들어 병원에 입원을 해야 할 정도였다.

고양분회의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4월 30일부터 파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공원이나 가로청소는 파업을 하더라도 크게 효과가 없다. 재활용선별장은 파업을 하면 재활용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이기 때문에 대체인력이 투입됐는데, 이때도 김주실 조합원을 비롯한 여성 조합원들이 당차게 싸웠다.

고양분회는 파업을 일주일만 했다. 위원장인 내가 나서 복귀하자고 설득했다. 나는 투쟁을 기획할 때 ‘무기한 파업’이라고 쐐기를 박지 않는 편이다. 파업은 노동자가 사용자 측에 대항하는 마지막 선택이기 때문에 무기한이 될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무기한 파업이 사용자 측보다 노동자들에게 더 압박이 된다면 요구조건이 관철되지 않더라도 파업을 접고 업무에 복귀할 수 있다. 파업 종료와 현업 복귀가 투쟁이 끝났다는 것을 뜻하지만은 않는다.

파업이 효과를 크게 발휘하지 못하는데 명분 때문에 파업 깃발을 움켜잡고 있을 필요는 없다. 무노동 무임금으로 조합원들이 경제적으로 피해가 커지면 노조도 그만큼 지친다. 우리를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하려는 황 시장에 맞서 우리 기분을 살리자고 총력전을 펼치는 것은 좋은 작전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용자 측을 피곤하게 만들어 주자는 게 고양분회의 전략이었다. 파업 이후에 단협이 체결되기까지 5차례 부분파업을 했다. 부서별 순환파업, 오후 파업으로 공무원들을 정신없게 만들었다.

고양시의 시민·사회단체들과도 연대했다. 시민·사회단체와의 연대는 투쟁 과정에서 조합원을 보호할 수 있고 행정비리 문제를 효과적으로 제기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리고 민주노총 집회에 참가해서 전국적으로 고양 환경미화원의 상황을 알리고 시청을 압박했다.

결국 우리의 끈질긴 투쟁에 고양시청은 손을 들었다. 초창기에 조합원들 100여명이 탈퇴를 했지만 그 이후로도 분회는 건재했다. 조합원들이 강한 결속력으로 준법투쟁과 부분파업을 지속하는데 사용자 측이 계속 회피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고양분회가 생긴 지 7개월여 만인 7월 28일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이때도 쟁점은 노조활동 보장에 관한 내용이었다. 유니온숍은 따내지 못했으나 그래도 교육시간은 매월 2시간으로 단협에 명시할 수 있었다.

고양시청과 단협 체결로 전임자 2명과 사무실을 확보하면서 경기도노조는 본조 사무실을 고양으로 이전했다. 이때가 경기도노조에서 말하는 고양시대다. 고양(高陽)에 떨어진 민들레홀씨가 고양(高揚)의 씨앗이 된 것이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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