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 <편집자>
----

제2부 우리는 해방으로 간다

나의 영원한 ‘공범’·철문을 부수고 동지들 품으로 달려가고 싶다·가로분회와 의정환경분회의 동시파업·십 년 전·‘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이게 단협이냐? 항복문서지!”·김주실 씨의 선택 “우리도 노조 해요~”·파업도 업무복귀도 노동자의 권리·돈 많이 걷는 경기도노조?·문공달 씨의 사연1 ; 200만원을 바치고 청소부가 되다·문공달 씨의 사연2 ; “내 뒤에는 경기도노조가 있다”·‘진짜 공무원’ 민상호 씨·송양권 부분회장의 고백 “시장님, 우리 요구를 빨리 들어주지 않아 감사합니다”·악랄한 안산의 청소업체들·물러서지 않는 안산분회·민간위탁이라는 ‘공공의 적’·파벌은 용서하지 않는다
----

십 년 전

“철컹” 신경질적인 쇳소리와 함께 구치소 앞마당으로 나가는 문이 열렸다. 이제 문 하나만 지나면 가족과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다. 가을밤 공기는 달았다. 하늘을 바라보고 큰 숨을 한 번 내쉰 뒤 나는 뚜벅뚜벅 걸었다.

검찰은 나를 파업 주도 혐의로 구속하면서 정작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조항은 하나도 걸지 못했다. 나에게 적용된 죄목은 엉뚱하게도 업무방해·상해·공무집행방해·특수공무집행방해치상·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공직선거법 위반 등이었다.

대개 검찰이 하는 짓이 이렇다. 파업은 헌법으로 보장된 노동자의 권리다. 설령 업무방해 행위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파업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벌어진 일이다. 만일 검찰이 헌법을 수호하고 노동자의 파업을 보호하겠다는 자세를 갖고 있다면 파업 과정에서 발생한 행위들을 처벌하기에 앞서 동기부터 살펴야 하는 게 도리 아닌가.

사용자의 온갖 부당노동행위에 대해서는 그토록 관대한 검찰이 노동자의 파업에 대해서는 이렇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한다는 것은 어떻게든 노동자의 파업을 짓밟겠다는 심보나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적용된 죄목들은 많았지만 실은 이게 다 파업을 탄압하기 위한 억지요, 꼼수였다. 재판부도 고심하는 눈치였다.

결국 이 많은 죄목에 대해 징역 1년 6월과 징역 8월에 3년간 형 집행을 유예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내가 이번 파업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이야기라 쑥스럽지만, 우리의 파업은 ‘준비된 파업’이었다.

내가 의정부지원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구치소로 돌아와 석방 절차를 밟고 나온 시각은 밤 8시 무렵이었다. 구치소 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조합원들은 내 모습이 보이자 환호성을 질렀다. 한 조합원은 옷차림만 봐서는 163일 동안 옥살이를 한 사람 같지 않다고 나를 위로했는데, 봄에 들어가 가을에 나왔으니 그럴 만했다.

조합원들은 박수와 포옹으로 나를 반겨 줬다. 떠들썩한 환영인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조합원들은 이내 자리를 파했다. 내가 석방 첫날밤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마음을 써 준 조합원들의 배려였다. 고마웠다.

다음 날 저녁 나천봉 쟁의부장님 댁에서 환영식이 열렸다. 조합 간부들이 마련한 자리였다. 우리는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를 만든 이후 처음으로 긴장의 끈을 늦추고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웃고 즐겼다. 석방이 되고 난 다음에 나를 기다려 주는 조합원들이 있고 돌아갈 노조가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기쁘고 뿌듯했다.

나는 십 년 전 서울 도봉동에 있던 삼영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가 구속된 적이 있다. 그때는 석방 뒤 환영식은 고사하고 노조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복직투쟁을 하고 싶었지만 노조에 부담을 줄 것 같아 포기했다.

1987년 7월 초 나는 초등학교 친구였던 이의환의 주민등록증을 빌려 도봉동에 있던 삼영모방에 입사했다. 그 시절 학생운동을 하던 대학생들의 ‘정규 코스’는 학내시위를 주도하고 구속된 다음 석방이 되면 공장에 취업하는 것이었다. 이것을 우리들 용어로 ‘현장 이전’이라고 했다.

학생운동이 헌신적이고 전투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학창시절은 한때다. 게다가 학생들은 가족의 경제생활에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어서 독재에도 까닭이 있다. 사람들이 모두 다 잘 먹고 잘산다면 독재가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경제적 불평등이야말로 정치적 억압을 낳은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따라서 세상을 바꾸는 일은 뼈 빠지게 일하고도 노동의 대가로부터 소외된 노동계급이 나서지 않는 한 불가하다는 사실을 학생들은 깨달아야 했다. 나와 동시대의 많은 젊은이들은 혁명을 꿈꿨지만 혁명이 청춘의 ‘열병’으로 이뤄질 리는 만무했다. 우리는 거칠고 고된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어야 했다.

삼영모방은 1967년 설립돼 1984년 철탑산업훈장을 수상한 중견기업이었다. 노동자들은 300명이 약간 넘었다. 나는 삼영모방이 수출 실적이 높고 브랜드 인지도가 있는 모직원단 제조업체임에도 동일업종 노동자들보다 임금이 훨씬 낮다는 점에 주목했다.

삼영모방의 조창석 대표이사는 성공의 비결로 “근로자들에게 가족같이 대한다”고 어느 중앙일간지 인터뷰에서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삼영모방의 성장동력은 저임금이었다. 1960년대 이후 우리 경제의 성장을 이끌었던 섬유산업 노동자 임금은 제조업 평균임금보다 낮았다. 1987년 노동부가 조사한 제조업 월평균 노동자 임금이 33만310원(보너스 포함)이었는데, 섬유나 피복 근로자들의 월평균 임금은 28만2천373원이었다.

삼영모방은 저임금도 문제였지만 장시간 노동이 심각했다. 12시간 교대근무제였다. 300여명 노동자 가운데 대부분이 여성이었는데, 일에 지쳐서 공장과 기숙사만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성노동자들은 기계수리를 담당하던 기사와 보조로 30여명 정도였다. 나는 직포과에 배치돼 기계수리를 하는 기사보조가 됐다.

내가 삼영모방에 들어간 것은 1987년 6월항쟁 직후였다. 6월항쟁의 주역은 대학생들이었다. 여기에 이른바 ‘넥타이부대’라고 불리던 대도시의 젊은 화이트칼라들이 합세했다. 밑바닥의 서민들은 주인공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정이 6월항쟁으로 하여금 반독재 학생운동을 뛰어넘지 못하게 만든 사회적 배경이었다.

1789년 프랑스혁명의 선봉에 섰던 이들은 파리의 일용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바스티유감옥을 무너뜨리고 황제를 단두대에 올렸으며 농노와 함께 봉건제도의 잔재들을 때려 부쉈다. 그들은 빵과 평등을 외쳤고 1871년의 파리코뮌까지 약 100년 동안 혁명의 완성을 향해 싸웠다. 그 힘이 오늘날 프랑스를 가장 자유롭고 진보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키운 원동력이다.

6월항쟁은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이 자진해산하면서 사실상 끝났다. 박종철과 이한열은 비명에 갔는데, 전두환은 멀쩡히 살아남아 노태우의 선거운동을 진두지휘했다. 노태우의 6·29선언 8개항에는 직선제와 지방자치 실시, 언론과 정당 활동의 자유는 들어 있었으되 분배와 관련한 단어는 단 한 자도 없었다. 민주화를 한다면서 독재정권이 밀어붙인 경제개발의 최대의 피해자인 노동자와 농민을 배제한 것이다. 분한 노릇이었다.

인간이 가장 비참한 순간은 남과 비교될 때다. 텔레비전에는 젊은 여가수가 나와 “저마다 누려야 할 행복이 언제나 자유로운 곳∼”이라며 ‘대한민국’을 노래 부르는데, 노동자들은 행복은 고사하고 자신이 누려야 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6월항쟁은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각성한 학생들이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었던 것처럼 민주화는 더 깊고 넓어져야 했다.

독재정권이 주춤한 사이에 마침내 노동자들이 일어섰다. 울산 현대엔진의 노조 결성을 필두로 영남에서 파업의 바람이 불었다. 그것이 1987년 여름을 휩쓸었던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이었다. 전국으로 확산된 노동자 대투쟁이 서울북부지역이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었다. 8월 중순 동아건설 창동공장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요구하면서 농성에 들어갔다.

곧이어 8월 28일 내가 있던 삼영모방에서도 ‘임금인상 20%’와 ‘보너스 500%’ 등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하루 농성을 벌였다. 이 농성은 대학생 출신의 여성노동자가 이끌었다. 하지만 입사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나는 농성을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나는 농성이 노조건설로 바로 이어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삼영모방 노동자들은 비록 자신의 요구를 따내지는 못했지만, 농성은 노사협의회 구성으로 이어졌다. 노사협의회란 자본과 공권력이 노동조합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인데, 삼영모방에는 그마저도 존재하지 않았다. 삼영모방의 노사관계는 가족적인 게 아니라 전근대적인 것이었다.

농성을 주도한 대학생 출신 여성노동자는 신분이 드러나 해고가 됐다. 이때도 나는 나서지 않았다.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을 묶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소모임을 조직하는 쪽을 택했다. 내가 취업한 지 서너 달이 지났을 때였다.

이상용 씨는 내가 근무하던 직포과의 기사였다. 그는 감수성이 풍부했고 지적 호기심도 강했으며 나와 동갑이었다. 나는 그가 공장 생활을 하면서 굉장히 목말라했던 부분을 채울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에게 공장 밖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나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당시 나는 고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노동운동을 하던 황왕호 선배와 노원동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상용 씨의 집 또한 근처였다. 이상용 씨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나는 황 선배와 함께 그의 집에 자주 찾아갔다. 우리는 이상용 씨의 어머님께서 차려 주시는 밥을 먹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며 가슴을 맞대기 시작했다.

이상용 씨 말고도 방적과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노동자가 한 명 더 결합했다. 그는 결핵으로 무척 고생하고 있었다. 나는 아픈 노동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라고 고집을 피우며 만날 때마다 개고기를 함께 먹었다. 개고기는 출가해서 쌍문동에 살던 큰누나가 마련해 줬다. 적어도 세 마리는 해치웠다는 게 큰누나의 이야기인데,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개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최초의 모임이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한 나는 노사협의회에 참석하는 근로자위원들을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조직에 나섰다. 노사협의회에서 제기하거나 요구할 만한 내용을 근로자위원에게 전달하고, 그들이 안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도우며 모임을 확대한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10명 남짓한 노동자들이 소모임에 나오게 됐다. 이상용 씨와 뒷날 노조위원장을 맡게 되는 이정무 씨 외에는 모두 여성노동자들이었다. 여성노동자들은 나보다 나이가 적었고 대부분 10대 후반이거나 20대 초반이었다. 아무래도 어색했다. 그래서 여자 친구를 부르기로 했다.

그때 내 여자 친구 양미경도 ‘현장 이전’을 해서 삼영모방 바로 옆 공장인 삼양라면에 다니고 있었다. 그쪽 일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내 부탁에 두말 않고 달려왔다. 여자 친구는 여성노동자들과 언니 동생 사이로 지내며 남자인 내가 못하는 역할을 떠안았다. 우리 사이는 늘 이랬다. 내가 일을 저지르고 여자 친구가 수습했다. 그것은 결혼 뒤에도 똑같았다.

소모임 식구들과 동아건설 창동공장노조의 단병호 위원장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서울북부노동상담소를 통해 마련된 자리였다. 나는 아는 형이 상담소에 있다면서 태연스럽게 상담소에 들락거렸다. 얼마 뒤 서울북부노동상담소는 삼영모방 노동자들의 소모임 공간이 됐다.

서울북부노동상담소는 조석현(고대 법학과 79학번) 선배, 황왕호 선배, 내가 주축이었다. 우리는 서울북부지역에서 공개적으로 노조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노동상담소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1987년 하반기에 상담소를 만들었다. 처음에는 사무실 마련할 자금이 없어 6월항쟁 시기에 재야·종교계·야당들이 모여서 결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서울북부지부 사무실 한 귀퉁이를 빌렸다.

서울북부노동상담소 초대소장은 청계피복노조 출신 천창기 씨였고, 황왕호 선배는 간사를 맡았다. 나와 조석현 선배는 직책을 맡지 않고 비공개적으로 활동하기로 했다. 우리는 이를테면 노동상담소의 ‘비밀멤버’였던 셈이다.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삼영모방노조는 1988년 8월 15일 결성됐다. 위원장에는 이상용 씨가 선출됐다. 여성노동자들이 대다수인 사업장이라 여성 위원장이 나오는 게 순리일 수 있는데, 김헌정은 이상용 씨를 추천했다. 이상용 씨가 노조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었고, 차분하고 다감한 성격이 여성노동자들과도 무리 없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노조 결성 추진과정을 지켜봤던 조석현 씨와 황왕호 씨도 같은 판단이었다.

김헌정은 대의원에 선출됐고 교섭위원으로도 발탁됐다. 그러던 9월 어느 날 회사에서 그가 대학생 출신이라는 사실을 눈치채고 말았다. 노조 결성 이후 서울북부지역의 민주노조들이 지지방문을 왔는데, 이때 단병호 위원장도 왔다. 단 위원장은 평소 안면이 있던 김헌정에게 인사를 건넸고 이 장면을 목격한 회사 측이 그를 의심하게 된 것이다.

서울올림픽 첫날인 9월 17일, 서울 시내에는 축포가 펑펑 터졌다. 회사 측의 움직임을 알 리가 없는 김헌정은 평소처럼 회사에 출근했다. 경찰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발버둥 칠 틈도 없이 연행돼 곧장 성북경찰서로 넘어갔다. 경찰 조사 결과 그가 이의환이 아니라 김헌정이라는 게 밝혀졌고 공문서 위조죄로 성동구치소에서 4개월을 살았다.

김헌정은 친구인 이의환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주민등록증을 빌릴 때 미리 이야기를 해 뒀다. 그는 ‘진짜 이의환’에게 혹시 경찰이 찾아오면 동두천의 한 술집에서 초등학교 동창회를 해서 술을 진탕 마셨는데 그 다음날 깨어나 보니 주민등록증이 없어졌다는 걸 알게 됐다고만 하라고 말을 맞춰 놓았다. 다행히 이의환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았다.

그때 막 생긴 삼영모방노조는 그를 챙길 경황이 없었다. 회사 측에서는 그를 불순분자 혹은 빨갱이로 몰았다. 이상용 위원장은 소모임을 하면서 어렴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기에 김헌정이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위해 회사 측에 대항해서 싸우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 위원장을 비롯해 소모임을 했던 노동자들은 김헌정의 재판 때 방청하러 와서는 격려를 해 줬다.

그해 12월에 석방된 김헌정은 복직투쟁보다는 외부에서 노조를 지원하기로 했다. 삼영모방에서 일했던 기간은 불과 1년 정도였다. 삼영모방 노동자들에게 김헌정은 회사가 선전한 대로 불순분자는 아니었지만 그들과는 처지가 다른 운동권 학생이었다.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돈독한 관계를 맺기에는 함께한 시간이 너무나 부족했다.

노동운동가로 유명한 문성현 민주노동당 전 대표는 서울대를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져 해고 위기에 처했지만 조합원들이 지켜 줬다. 이는 그가 통일중공업 노동자들과 5년 넘게 동고동락했기에 가능했다. 김헌정은 노조 설립 이후 다섯 달을 싸워서 겨우 단체협약을 체결한 노조에 자신의 문제로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김헌정은 의욕을 부려서 1989년 2월 7일과 8일 설 연휴에 삼영모방노조 간부수련회를 잡아 놓고는 한국노동교육협회(현 한국노동사회연구소)에 교육을 의뢰했다. 한국노동교육협회 쪽에서는 설날인데 수련회가 되겠느냐고 반문했는데, 그는 가능하다며 고집을 부렸다. 수련회는 노조 간부들의 불참으로 무산되고 말았지만…….

이후에도 김헌정은 삼영모방노조를 지원하려 애썼으나 신뢰관계가 돈독해지지는 못했다. 불발된 수련회 건에서도 보이듯이 외부 지원이란 모호하기 짝이 없었다. 1991년 삼영모방노조 초대 위원장이었던 이상용 씨가 사퇴했다. 그해 회사와 합의한 임단협안에 조합원들이 불만을 표시했기 때문이다. 노조 초대 조직부장이었던 이정무 씨가 새로운 위원장으로 선출됐고 삼영모방은 1993년부터 무쟁의 사업장이 됐다.

1990년대 초반은 김헌정과 같은 운동권들에게는 우울한 시절이었다. 1991년 12월 소련이 해체되면서 많은 학생 출신들이 현장을 떠났다. 노동운동에만 국한된 양상은 아니었다. 못다 한 학업을 마치겠다며 학교로 돌아간 이도 있었고 돈을 벌어서 운동을 지원하겠다는 이도 있었다. 머리가 뛰어난 이들은 고시를 보기도 했다. 떠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였지만 그들의 머릿속에는 현실에 존재하던 사회주의의 몰락이 준 충격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광주항쟁 이후 급속하게 왼쪽으로 기울기 시작한 학생운동은 1980년 후반에 이르면 사회주의를 자신들의 이념으로 채택하게 된다. 하지만 이들의 사회주의는 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사회주의가 과학적 이론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는 것은 맞지만 사회주의가 사회주의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주체의 문제가 선결돼야 한다.

당시 활동하던 수많은 비공개 지하조직들에서 노동자 출신 조직원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웠다. 마르크스와 레닌의 저작 한 문장을 놓고 운동권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지던 때였다. 마치 성경의 한 구절을 수호하기 위해 창을 든 성당기사단처럼 지하조직들은 격렬한 논쟁으로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여기에 노동자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김헌정은 이런 논쟁에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김헌정은 학습을 존중했지만 교조적인 태도를 싫어했다. 그가 집중했던 부분은 실질적이고 실제적인 활동이었다. 삼영모방에서 노조를 만들어 임금인상안을 짤 때 그는 회사의 재무제표를 구해다가 분석했다.

책에서 나온 사회주의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흔들리는 것은 당연했다. 머리로 운동을 하고 책에서 사회주의를 접한 이들에게 소련의 해체란 하늘이 무너진 거나 다름없었다. 만일 한국의 사회주의가 대중투쟁의 집적(集積)을 거쳤다면 그렇게 쉽게 동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당시의 젊은 사회주의자들은 빨간 옷을 입은 계몽주의자나 자유주의자들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거추장스러웠던 빨간 옷을 벗어던졌다. 마침 민주화로 열린 정치적 공간이 그들을 유혹했다. DJ가 불렀고, YS도 불렀다. 약관의 나이에 서클을 만들어 학생회를 좌지우지하며 권력에 재미를 붙인 젊은이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그나마 염치가 있는 축은 시민단체에 남았지만 그쪽은 민주당의 외곽이었지 노동자의 편은 아니었다. 훗날 언론은 이들을 386으로 불렀다.

이래저래 남은 사람들은 더 힘이 들었다. 노동운동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김헌정만 해도 삼영모방에 취업하기까지 매우 길고 지루한 과정을 거쳤다. 김헌정은 한양대 동기 조명현 씨와 후배 세 명, 다른 학교 학생 두 명과 함께 1986년 하반기부터 조석현·황왕호 씨로부터 노동현장에 가기 위해 학습을 받았다.

김헌정이 학습을 하던 모임은 남노련(서울남부지역노동자연맹)의 하부 단위였다. 남노련을 알기 위해서는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985년 구로공단의 대우어패럴노조 간부의 구속에 항의해서 인근 10여개 사업장의 노동자들이 스트라이크를 일으킨 구로동맹파업을 계기로 서울지역의 노동운동가들은 서노련을 결성했다.

김문수·심상정 등 서노련 결성을 주도하던 이들은 서노련을 대중투쟁을 통해 단련된 선진적 노동자들이 결합해 선도적인 정치투쟁을 하는 조직으로 설정했다. 이에 반해 최규엽을 중심으로 하던 일단의 세력은 노동운동이 노동조합과 경제투쟁으로부터 기초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양측은 논쟁 끝에 각각 서노련과 남노련으로 갈라졌다.

김헌정이 소속된 학습모임은 구로와 영등포에서 노동운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1987년 초 남노련 지도부가 경찰에 검거되면서 중단이 된다. 여차하면 경찰에 잡혀가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는데도 김헌정은 학습모임을 이끌었던 남노련의 선배들과 끈을 놓지 않았고 1987년 봄 신창동에 있는 신창섬유에 취업했다.

한 달 남짓 지났을까. 4월 26일 남노련 각 지부의 지도부 10여명이 우이동에서 회의를 하던 중 경찰의 급습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김헌정이 따르던 조석현 씨와 함께 자취를 하던 송종환 씨가 붙들렸다. 송종환 씨가 고문을 견디면서 동료가 도망갈 시간을 벌어 줬고 조석현 씨는 가까스로 경찰의 검거망을 피할 수 있었다.

수배자가 된 조석현 씨는 혹시라도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서 김헌정에게 현장에서 빠져나오라고 지시했다. 신창섬유 노동자들과 겨우 안면을 익히던 중이었는데, 김헌정은 인사도 못하고 공장을 빠져나와야 했다.

남노련 사건에 대한 경찰의 수사가 일단락되는 것을 보면서 조석현·황왕호·김헌정 등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남노련 사건의 여파가 조석현 씨가 수배되는 선에서 그치고, 김헌정은 수사망에서 빠졌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김헌정을 현장으로 다시 보내기로 했다.

구로는 아무래도 위험했기에 김헌정의 선배들은 서울북부지역을 찍었다. 어느 공장지대나 그 일대를 대표하는 핵심 사업장이 있다. 군대에서 말하는 ‘고지 점령’과 비슷한데, 이 사업장을 잡아야 그 지역의 노동운동을 풀어 나갈 수 있었다. 서울북부지역에서는 방학동 미원공장이 그랬다. 이곳에는 노동자가 1천500명이 넘었고 한국노총 화학노련 소속의 노조가 있었다.

하지만 미원공장은 김헌정 같은 학생 출신이 취업하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회사가 요구하는 관련 기능이 있거나 직원의 추천을 받은 사람만이 채용됐다. 아쉬워하면서 다른 사업장을 알아보고 있던 중에 김헌정은 미원 포장반에서 임시직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임시직으로 일하다 보면 혹시 정규직으로 취업할 가능성이 생길 수도 있다는 기대감을 갖고 김헌정은 포장반에 들어갔다.

황왕호 씨도 함께였다. 김헌정은 20kg이나 나가는 포대를 거뜬히 나르는 등 일을 아주 잘했다. 감탄하는 동료에게 김헌정은 “내가 원래 뼈가 튼튼한 강골”이라며 씩 웃었다. 김헌정이 포장반에 나간 이유에는 노동운동 한답시고 책 읽고 토론이 전부인 생활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있었다. 미원에 다니면서 다른 업체에 계속 이력서를 내고 있던 김헌정은 드디어 삼영모방에 합격을 하게 된다.

우여곡절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남노련의 조직노선에 동의한 그는 차근차근 노조를 만들 생각이었는데, 입사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때만 해도 김헌정이나 그의 선배들은 이 노동자 대투쟁의 성격을 정확하게 짚지 못했다. 큰 물결에 휩쓸려 간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을 정도였다.

김헌정은 현장 상황을 중시하기로 했다. 전국적인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삼영모방의 하루 농성이 노조 결성으로 이어지지는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여러 면에서 준비가 부족한 게 현장 생활을 얼마 하지 않은 그의 눈에도 보였다.

김헌정은 노동자 대중의 요구에 기초해서 천천히 움직였다. 소모임을 만들고 그 모임을 노조 준비모임으로 전환시켜 1년에 걸쳐서 노조를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살이를 마치고 나왔을 때 그는 노조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마도 수백 명 이상의 학생 출신 노동운동가들이 겪었을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느 386들과는 달랐다. 그는 첫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망한 것은 소련이지 우리가 건설하려던 새 세상은 아니라고 다짐하면서 덕계노동자사랑방을 만들었다. 그는 노동자 대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았다. 그리고 십 년의 기다림 끝에 그는 마침내 의정부의 환경미화원들을 만났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의 파업으로 세 번째 옥살이를 하게 됐지만 김헌정의 마음은 편했다. 십 년을 준비한 노조, 십 년을 준비한 파업이었다. 그는 이번만큼은 삼영모방 때처럼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믿었고 아내를 신뢰했으며 조합원들을 존경했다.

그런 그도 감옥 안에서 마음이 편치 않았던 날이 하루 있었다. 그는 5·18광주항쟁 기념식을 감옥에서 혼자 치렀다. 쇠창살을 붙들고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자며 구호를 큰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그 뒤 밖에서 들려온 소식은 386 정치인들이 광주로 5·18광주항쟁 기념식을 하러 갔다가 어느 단란주점에서 술 판을 벌였다는 거였다.

386이라는 용어도 보수언론과 정치권이 만들어 낸 용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여하튼 이번 사건으로 386 정치인들의 이중적인 면모가 확실히 드러났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그가 보기에 한때 그의 동지였던 386들은 민중의 바다에 뛰어들기를 거부하고 입신양명을 노리며 학생운동 경력까지 팔아먹는 정치 모리배일 뿐이었다.

이런 그의 또래 386과 달리 대중조직운동에서 노동자에게 인정을 받고 자리를 잡은 김헌정이야말로 진정으로 떳떳한 학생운동의 후예였다.

경기도노조는 98일간의 파업투쟁 이후에도 건재했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공단 소속 환경미화원들 사이에는 조합원과 비조합원의 갈등이 있었다. 의정환경에서는 합의 내용에 실망하고 탈퇴한 조합원들이 남은 조합원들보다 더 많았다.

그러나 홍희덕 사무장은 공단 소속 환경미화원들의 화합에 전력투구하고 있었고 의정환경의 남은 조합원들은 이전보다 노조에 더 책임감을 가졌다. 또 포천분회는 업체 소속이었지만 시청을 교섭 테이블로 끌어냈다.

의정부시의 분뇨 수거를 맡고 있는 조합원들과 주차관리원으로 일하는 조합원들도 노조활동을 하고 있었다. 주차관리 쪽은 공단 소속 가로반 조합원들의 교섭 때 같이 하기로 했고 정화조 쪽은 9월부터 교섭에 들어갔다. 조합원들은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업체 전화 안 받기 운동을 하고 있었다.

위원장인 그가 없는 동안에도 경기도노조는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감옥에서 아내에게 석방이 되면 올 여름에 못 간 휴가를 꼭 가자고 편지를 썼다. 하지만 편지를 쓴 그도, 편지를 받은 아내도 알고 있었다. 그럴 여유가 없다는 것을. 그들 부부의 직업은 노동운동가였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