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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7]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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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녹색조끼의 탄생

199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6시 ·찢어지고 부서진 ‘청소부’의 육신·밥 한 끼 주고 밥줄을 끊은 ‘시장님’·동두천의 경험·홍희덕 씨와 나천봉 씨의 등장·“노조의 니은 자도 모른다. 그래도 한다!”·환경미화원들, 일어서다·노동조합은 지금 ‘공부 중’ ·“지금 여러분께서 하시는 행동은 불법이 아닙니다!”·첫 번째 위기, 그리고 반격·싸운 만큼 되찾는, 그대 이름은 노동자·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경기도노조로·마지막 카드·“파업은 노동자의 학교”·‘인간 쓰레기’를 쓸어 담자·전제만 교육부장의 항변 “잘못한 게 있어야 잘못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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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카드

김헌정은 경기도노조 위원장이 되면서 오히려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일을 하면서 그가 가장 걱정했던 대목은 조합 간부와 조합원들의 구속이었다. 해고 문제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내서 복직 판정을 받을 수 있으나 일단 구속이 돼 버리면 무죄 판결을 받을 때까지 최소한 6개월은 옥살이를 해야 한다.

젊은 노동자들이야 노동조합 활동하다가 구속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조합원들은 나이가 많고 가족에 대한 책임도 더 크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의 활동과 투쟁 방향을 제시함에 있어서 김헌정은 우선적으로 이 점을 고려했던 것이다.

그런데 김헌정이 위원장이 됐다. 위원장을 하겠다고 해서 그리 된 게 아니라 경기도노조로 조직 형태를 바꾸다 보니 그렇게 됐다. 위원장이 되자 김헌정은 더 과감해졌다. 자신이 위원장이 된 이상 조합 간부나 조합원들이 구속될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노조를 잡기 위해 검찰과 경찰이 구속이라는 카드를 내민다고 해도 대상은 김헌정이 될 것이었다.

김헌정은 경기도노조를 세우고 나서 그동안 접촉해 왔던 의정환경과 미래환경에 소속된 환경미화원들에게 조합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미래환경보다 근로조건이 나쁘고 임금도 적었던 의정환경의 미화원들과 기사들이 적극적으로 나왔다. 의정환경에서 기사친목회를 이끌던 박형진 씨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직접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로 찾아온 환경미화원들도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이 김윤조 씨다.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은 누구 할 것 없이 한 많은 사연을 한 가락씩 안고 있다. 1946년생으로 진주가 고향인 김윤조 씨는 어머니를 세 살 때 여의었다. 새어머니와 살기 싫어서 초등학교만 마치고 집을 나와 이발관에서 기술을 배워 이발사로 일을 했다. 부산에서도 일했는데, 본인의 말로는 외로워서 성당에 다녔고 그러다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하게 됐다.

술을 워낙 좋아해 노조활동을 하면서 김헌정에게 지청구도 많이 들었다. 젊어서는 주먹도 좀 썼고 1980년에는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고생을 많이 했다. 키 작다고 놀리는 게 싫어서 혼을 내줬을 뿐이라는데, 과연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이 그에게 잘 어울렸다. 업체 소속 환경미화원들은 대부분 쓰레기를 차에 실어 올리는 상차작업을 하는데, 김윤조 씨는 키는 제일 작으면서도 일은 제일 잘했다.

손이 다 크기도 전에 이발소에서 가위질을 한 김윤조 씨는 그 탓으로 손에 일찍 이상이 왔다. 이발사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그는 1986년부터 연천군에서 환경미화원으로 일했다. 일찍이 가톨릭노동청년회 활동을 했고 성격도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만큼 업체 관리자들의 횡포에 맞서다 쫓겨나 의정부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김윤조 씨는 노동조합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다. 공단 소속 환경미화원들이 시설관리노조를 만들어 투쟁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월급명세서를 들고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를 찾았다. 자기 발로 노동조합 하겠다고 찾아온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김윤조 씨는 나중에 경기도노조 의정부지부 부지부장을 지냈다.

의정환경의 근로조건은 월급명세서만 봐도 엉망이었다. 결근 한 번 하면 월차휴가만이 아니라 연차휴가까지 제하고 있었다. 야간이나 휴일근로수당을 지급하지 않았고, 심지어 월급에서 리어카 수리비와 경운기 기름값·수리비까지 제했다.

업체는 환경미화원들에게 리어카를 지급했는데, 도로에서 리어카를 끌면서 쓰레기를 수거한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부 환경미화원들은 자기 돈을 들여 경운기를 장만했다. 업체는 이미 리어카를 지급했고 경운기는 미화원들이 개인적인 편의를 위해 구입해서 사용하는 것이므로 경비를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미화원들은 야속했지만 업체의 방침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조사를 해보니 실상은 업체 주장과 전혀 달랐다. 시는 미화원들의 실태를 인정하고 업체에 달마다 경운기 기름값과 수리비를 지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게 연간 1억원이나 됐다. 도둑이 따로 없었다.

의정환경의 미화원과 기사들은 1월 26일 분회를 결성하고 박형진 씨를 분회장으로 뽑았다. 의정환경분회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조합원들은 배기주·이영모·전제원·신성호·이근성 씨 등이다. 노조 가입대상은 130여명이었는데 분회에 가입한 이들은 30여명이었다. 미래환경 미화원들도 소수이지만 조합에 들어왔다.

의정환경에서 상차작업을 하는 미화원(상차원)들은 기사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쓰레기차에는 기사 1명과 상차원 2∼3명이 일했는데, 기사는 상차원이 마음에 안 들면 바꿀 수도 있었다. 친목회도 따로 있었다. 기사가 상차원의 상사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어서 공단 소속 환경미화원들과 달리 전원 가입이 어려웠다.

전원 가입은 되지 않았지만 초창기에는 박형진 분회장님께서 열심히 뛰셨다. 경기도노조하면 녹색조끼로 유명한데, 이 녹색조끼를 제안한 이가 바로 박형진 분회장님이다. 쓰레기차 색깔인 녹색에서 따온 아이디어였다.

의정환경은 분회 결성을 하자마자 바로 사측에 단체교섭을 요구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는 공단이 아니라 시청과 교섭을 요구했기에 사용자가 누구냐는 시비가 붙었지만 의정환경의 경우 그럴 거리가 없다. 사측은 마지못해 교섭에 나오기는 했으나 교섭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의정환경 조합원들의 요구사항은 업체가 시로부터 받은 인건비, 즉 정부가 책정한 환경미화원 임금지급 기준에 따라 임금을 달라는 것이었다. 야간과 휴일근로수당도 시와 업체의 계약서에는 명시돼 있었는데 주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측은 정부 기준은 민간도급업체에는 적용되지 않으며 회사에는 회사의 임금지급 기준이 있다고 주장했다. 의정부시 역시 총액도급제는 청소업무라는 목적만 수행하면 되니까 세부적인 운영은 업체가 알아서 할 뿐이라면서 발뺌했다.

의정환경 사측은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인 박형진 분회장님을 비롯한 조합원 3명을 정직시키고 업무배치를 전환하는 방식으로 조합원들에게 불이익을 줬다. 여기에 사측은 의정환경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서 기업별 노동조합을 만들고 의정부시청은 당시 현행법으로는 복수노조가 금지돼 있는 것을 알면서도 신고필증까지 내줬다.

시설관리노조의 후신인 가로분회도 상황이 어려워졌다. 의정부시와 공단은 노조 대표단이 바뀌었으니 대화를 못하겠다고 나왔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경기도노조로 바뀐 것을 문제 삼았다. 또 조합원들에 대한 탄압의 강도가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창립 이후 조합원들은 일을 마친 뒤 매일 모여서 회의를 했다. 공단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 석회(夕會)를 해서 출근부를 점검하고 소모품을 지급했는데, 노조가 생기면서 조합원들은 자발적으로 일을 마친 뒤 모여서 석회를 했다. 공단은 석회를 중단시키려고 경찰까지 동원해서 막았다. 김기열 분회장에게는 2월분 월급을 주지 않고 근속수당 13만원만 지급했다. 노동조합 활동으로 맡은 구역을 벗어났다는 게 이유였다.

김헌정은 이제까지 해 왔던 준법투쟁만으로 현 상황을 돌파하는 게 무리라고 판단했다.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해서 가장 극적인 효과가 생기는 시기는 여름이다. 여름철 청소업무가 2∼3일만 마비되면 온 시가지가 악취로 진동하게 된다. 지방자치제도가 실시된 이래 시장은 행정가이자 정치인이었다. 시민들이 아우성을 치면 시장은 버틸 수 없게 된다.

당초 김헌정의 시간표에는 파업 시점이 한여름으로 잡혀 있었다. 하지만 의정부시나 공단·의정환경 등 사용자가 조합원들을 벼랑 끝으로 몰아붙이는 상황에서 서너 달을 더 버틴다는 것은 무리였다. 한여름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김헌정은 차선책으로 2000년 4월에 있을 국회의원 총선거를 활용하는 방안을 냈다. 김헌정은 마지막 카드를 빼들었다. 경기도노조는 3월 14일부터 쟁의절차를 밟았다. 22일 노동복지회관에서 조합원 총회를 열고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했다. 조합원 140명 중 116명이 참석해서 찬성 103표, 반대 13표로 압도적인 표 차이로 파업이 결정됐다. 3월 27일 월요일 오전 8시 경기도노조 조합원들은 녹색조끼를 입고 파업에 돌입했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

솔직히 말하면 파업기간을 보름 정도로 예상했다. 시민 생활과 직결된 쓰레기 문제를 시가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국회의원 선거운동 기간이라서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이 이슈가 되지 않을 수 없고 여야 후보들 모두 어떤 식으로든 해결책을 제시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때만 해도 내가 혈기가 넘치다 못해 방자(?)했다.

나는 보름 동안의 파업을 거치면 완전한 승리를 거둘 것으로 낙관했지만 그래도 부담은 컸다. 조합원들까지 구속되지는 않겠지만 파업기간에는 무노동 무임금이 적용된다는 점이 신경 쓰였다. 조합원들에게도 이 점은 명확히 설명했다.

가로분회 조합원들은 시청으로 원상복귀를 위해 할 것은 다해 봤고 남은 것은 파업뿐이라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의정환경분회 조합원들은 사측의 비열한 탄압과 비조합원과의 갈등으로 감정이 격앙돼 있었다. 이 점은 좀 걱정이 됐다. 조합원들에게 동료와 충돌은 최대한 자제해야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파업에 들어가기 이틀 전부터 전 조합원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25일 토요일에는 공공연맹 임단협 출정식에 전 조합원이 참석했고, 26일에는 간부회의를 열어 구속결사대 20명, 삭발농성단 30명의 지원자를 받았다. 파업기금도 분회별로 모으는 것으로 결정했다. 오후 5시에 의정환경 차고지를 점거했다.

파업에 참가한 조합원은 가로분회와 의정환경분회 합쳐 108명이었다. 포천도 분회가 결성됐지만 교육과 준법투쟁을 하는 과정이 더 필요하다고 봤다. 포천분회 조합원들은 의정부 파업을 지원하기로 했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다.”

노동운동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으면서 읽은 책들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었다. 이 말이 대체 무슨 뜻일까 몹시 궁금했다. 논리적으로는 이해 못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허전했다. 추상적인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분명히 있을 텐데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파업은 노동자가 취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이다. 파업은 노동자에게는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노동을 중단한다는 뜻이다. 유산계급은 이자나 지대(地代), 배당수입으로 사고 싶은 것 사고 먹고 싶은 것 먹지만 노동계급은 노동 이외에는 삶을 지탱할 방법이 없다. 노동을 중단한다는 것은 노동자에게는 목숨을 내놓는다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래서 파업은 비장하다.

그러나 파업은 절망의 몸부림이 아니다.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은 공장부터 지킨다. 공장을 빼앗기면 노동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공장은 단결의 터전이다. 거꾸로 사용자들은 공장부터 빼앗으려 한다. 생산수단을 노동자들에게 넘겨주고 나면 자본가는 속수무책이다. 파업 성공의 여부가 노동자들이 공장을 사수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지 않는다. 공장을 지키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평소 자신을 쥐어짜던 꼴도 보기 싫던 기계가 실은 자신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파업이 절망이라면 노동자들은 기계에 모래부터 뿌릴 것이다. 공장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사용자에게 맞서면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경찰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 불안하고 이 싸움이 과연 승리로 끝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자랑스럽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한다는 대견함이 온몸을 감싸고 그 감동이 동료애를 진정한 인간애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이리하여 파업은 축제가 된다.

우리도 그랬다. 우리의 파업은 잔치였다. 모자를 눌러 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자신의 직업을 부끄럽게 여기던 조합원들이 ‘나는 환경미화원’이요, ‘나는 노동자요’라며 자신의 맨 얼굴을 드러냈다. 차고지를 점거해 천막을 쳐 놓고 함께 먹고 자면서 조합원들은 집회와 교육의 시간을 보냈다. 그때 비로소 알았다. “파업은 노동자의 학교”라는 말의 참 뜻을.

교육시간을 빌려 나는 전태일 열사의 삶을 이야기했다. 홍희덕 사무장님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씀하셨다. 공공연맹에서 간부들이 오고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 소속 노조들이 돌아가면서 지원방문을 왔다.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 놓고 투쟁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다.

물론 우리의 ‘해방구’를 그냥 내버려 둘 사용자들이 아니었다. 차고지 점거 첫날인 26일 밤, 업체는 의정부 자동차학원의 기사들을 동원해 청소차를 빼 가려 했다. 그러다 현장에 나와 있던 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들켰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에 따르면 사용자는 쟁의행위 동안 ‘당해 사업과 관련 없는 자’를 채용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당해 사업과 관련 없는 자’가 대체근로를 하려면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의정환경 사용자 측은 아직 노동법을 몰랐다.

일단 물러난 사용자 측은 비조합원들을 동원했다. 아마도 누군가의 조언이 있었을 것이다. 청소차를 빼 가려는 비조합원들과 이를 막으려는 조합원들이 맞부딪혔다. 비조합원들은 사용자 측의 지시를 받았는지 조합원들의 성질을 돋우려는 듯 욕설을 퍼부어 댔다.

위원장인 내가 파업을 시작하면서 조합원들에게 신신당부했던 바가 비조합원들과 몸싸움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자칫 잘못해서 노-노 갈등으로 흘러가 버리면 사용자 측을 도와주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조합원들도 전적으로 수긍했다.

나천봉 쟁의부장님은 조합원들 앞으로 나와서 외쳤다.

“조합원 여러분, 저 동료는 아직 몰라서 저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무시하십시다!”

하지만 듣기 좋은 소리도 한두 번인데, 온갖 욕을 냅다 지르는 걸 듣고 있으니 조합원들도 부아가 끓어오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조합원들이 한두 명씩 대거리를 할 때마다 쟁의부장님은 참자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쟁의부장님은 역적 동탁을 요절내려는 찰나에 유비의 뜻에 따라 장팔사모를 거두고는 분을 이기지 못해 뜨거운 콧김을 내뿜는 장비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욕 정도가 아니라 덤벼들어 실컷 두들겨 주고 싶은데 작전상 그러지를 못하니 얼마나 속이 터지셨을까.

의정부시와 공단은 27일부터 가로분회 조합원들이 하던 가로청소업무를 공공근로 인력과 적환장에서 일하는 환경미화원들을 동원해 처리했다. 노조는 이에 항의하며 28일 청소차 2대와 오토바이 7대를 시청으로 밀고 들어가서 현관 앞에서 1시간 동안 농성을 벌였다.

의정환경분회 조합원들이 하던 일에 투입된 대체인력을 막기 위해 ‘오토바이 기동대’가 나섰다. 오토바이 기동대는 대체인력이 수거한 쓰레기를 큰 봉투에 한가득 담아서 오토바이에 매단 다음 시청 안으로 들어가서 쓰레기봉투 밑부분을 살짝 찢었다. 이런 채 오토바이를 타고 시청사 안마당을 한 바퀴 돌면 움직일 때마다 쓰레기가 툭툭 떨어졌다. 한 조합원은 쓰레기를 줍기만 하다가 버리니까 통쾌한 기분이 들었던지 무척이나 신이 나 했다.

파업 5일째, 싸움이 한판 벌어졌다. 오전 10시에 시내 중앙로에서 대체근로를 막던 노조 간부와 조합원 10명이 연행됐다. 의정부시는 다른 시에서 청소차를 가져왔다. 조합원들은 청소차를 못 움직이게 하려고 차에 펑크를 냈다. 조합원 연행에 항의하러 의정부경찰서 앞으로 몰려갔던 조합원들도 전부 연행이 됐다. 이때 갔던 조합원들이 47명이다.

이 소식을 들은 김영수 민주노총 경기도본부장과 변형석 경기북부지구협의회 의장을 비롯한 간부들, 조합원 가족들 27명이 의정부경찰서로 가서 면담을 요구했는데, 이들까지 연행했다. 김영수 본부장·변형석 의장·양미경 부장은 의정부경찰서에 가둬 놓고 나머지 사람들은 ‘닭장차’로 불리는 전경버스에 실어 포천경찰서와 연천경찰서로 데려갔다.

김인수 조사법률국장과 조명심 국장은 연행된 조합원과 가족들 현황을 파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조합원 40여명과 차고지를 지키고 있었다. 경찰이 차고지로 쳐들어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차고지를 포기하고 미리 나갈 수는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실은 36계다. 이렇게 빨리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구속을 각오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차고지에서 조합원들과 함께 빠져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차고지에는 나이가 많은 조합원들이 계셨다.

포천의 조합원들에게 지원요청을 했다. 이때 포천은 가장 젊었던 전순영 조합원이 분회장을 맡고 있었다. 이날 전순영 분회장과 조합원 몇 분이 지원을 하러 나와서 함께 있다가 저녁때 돌아갔는데 다시 와 달라고 요청했다. 전 분회장은 새벽에 나오기 위해 한밤중에 청소차를 몰아서 일을 마쳐 놓고 조합원들과 함께 새벽에 달려왔다.

예상했던 대로 아침 8시 의정부경찰서장이 전투경찰을 지휘하며 작전을 개시했다. 의정환경의 사측과 비조합원들도 경찰 편에 서 있었다. 서장은 핸드마이크를 들고 직장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모두 구속하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서장의 뒤를 따라 전경들이 둔중한 발소리를 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왔다.

나와 조합원들은 슬슬 뒷걸음질을 쳐서 차고지 한쪽에 있는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 안에서 숨을 가다듬고 내다보니 경찰은 포위작전을 짜고 있었다. 나는 조합원들에게 양쪽으로 갈라져서 뛰자고 했다. 그리고 차고지를 빠져나오면 사무실에서 보자고 했다. 일부는 차고지의 낮은 담을 훌쩍 뛰어넘어 폐수장 쪽으로, 일부는 회룡역 쪽으로 달렸다.

차고지에 있던 조합원들은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런데 차고지 앞에서 경찰과 비조합원들에 맞서 싸웠던 의정환경의 박형진 분회장님, 포천의 전순영 분회장 등 13명이 붙들렸다. 경찰은 어떤 일인지 이들을 경찰서로 연행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풀어줬다. 박형진 분회장님과 유인준 조합원은 몸싸움을 하다가 다쳐서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같은 시각 서울역에서는 민주노총 집회가 열리고 있었는데, 김정복 문화부장님에게 이 집회에 참석해서 우리 사정을 알리는 발언을 하시도록 했다. 집회 주최 측에 연락을 해 놓았다. 문화부장님이 전국 집회에서 발언했던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다. 뒷날 “경찰 때문에 악에 받쳐서 떨리지는 않았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까만 먹물칠을 해 놓은 것처럼 보였다”고 털어놓으셨다.

정말 정신없는 날이었다. 연행된 조합원들을 빨리 나오게 하려고 조합원들과 가족들이 경찰서 앞에 가서 다시 항의하고 민주노총 법률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토요일 오후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인 강문대 변호사가 민주노총의 연락을 받고 의정부로 왔다. 그런데 변호사를 가장 반긴 이들은 연행된 조합원들이 아니라 형사들이었다.

파업 이전에 경찰에 붙들려 조사를 받게 되면 변호사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내용의 교육을 했다. 우리 조합원들이 교육받은 대로 묵비권을 행사하자 형사들은 간단한 조서 한 장 쓰지 못했고 경찰서는 우리 조합원들로 만원이 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오후 늦게 어제 경찰에 연행된 조합원과 가족들이 풀려났다. 의정부경찰서가 연천·포천·구리 등 인근 경찰서로 조합원들을 분산시키는 바람에 다시 의정부로 돌아오는 데만 해도 한두 시간은 족히 걸렸다. 의정환경의 김윤조 조합원님은 경찰에게 택시비를 내놓으라고 뻗대셨다는 것이다.

어쨌든 간에 돌아온 조합원들은 의기양양했다.

“아유,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두 손으로 조합원들의 손을 잡으며 인사를 드렸다.

“별것 없더만요. 국밥도 주는데 맛있더라고.”

조합원들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이빨을 드러내고 웃으며 내 손을 마주 잡았다. 조합원들은 서로 부둥켜안고 무용담을 나눴고 조합 사무실은 잔칫집처럼 시끌벅적했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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