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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6]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경기도노조로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편집자>

제1부 녹색조끼의 탄생

199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6시·찢어지고 부서진 ‘청소부’의 육신·밥 한 끼 주고 밥줄을 끊은 ‘시장님’·동두천의 경험·홍희덕 씨와 나천봉 씨의 등장·“노조의 니은 자도 모른다. 그래도 한다!”·환경미화원들, 일어서다·노동조합은 지금 ‘공부 중’·“지금 여러분께서 하시는 행동은 불법이 아닙니다!”·첫 번째 위기, 그리고 반격·싸운 만큼 되찾는, 그대 이름은 노동자·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경기도노조로·마지막 카드·“파업은 노동자의 학교”·‘인간 쓰레기’를 쓸어 담자·전제만 교육부장의 항변 “잘못한 게 있어야 잘못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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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운 만큼 되찾는, 그대 이름은 노동자

투쟁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우리는 싸움의 무대를 넓히기로 했다. 1차 서울원정투쟁을 계획했다. 10월 30일은 토요일이었다. 이날 우리는 전 조합원이 명동성당 앞에 모여 집회를 하기로 했다.

시청과 공단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공권력을 총동원했다. 의정부시 관내 전철 4개 역에 경찰들이 쫙 깔렸고 전경버스가 역마다 진을 쳤다. 경찰들은 서울에 가는 전철을 타려는 조합원들을 검문하고 소지품을 검색해 머리띠를 빼앗았다. 경찰은 나에게도 따라붙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야?”

아마도 경찰은 나를 노조의 배후로 점찍고 있었던 듯하다. 그들은 나를 에워싸고 시비를 걸었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 움츠러들 내가 아니다. 나는 의정부역 지하상가 안에서 큰 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의정부 시민 여러분! 시민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불철주야 환경미화원들 뒤만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인천 중부서 형사가 호프집 사장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최근 뉴스 들어보셨죠? 경찰이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시민을 괴롭히고 돈을 받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입니다!”

인천 중부서 이야기가 나오자 나를 둘러쌌던 형사들은 똥 밟은 표정이 됐다. 바삐 지나가던 시민도 형사들 얼굴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내가 의기양양하게 형사들과 눈을 맞추자 그들은 얼굴을 돌렸다. 그런데 나보다 더한(?) 이가 있었다. 나천봉 쟁의부장님이었다. 쟁의부장님은 지하철을 타더니 손잡이를 잡고 통로에 서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민 여러분, 부정부패를 막읍시다! 의정부시청이 저희 환경미화원들 월급을 떼어먹었습니다. 지금 제가 틀린 말을 했다면, 없는 말을 했다면, 저기 앉은 형사 양반들이 저를 가만히 놔두겠습니까? 제 뒤를 석 달 동안 졸랑졸랑 따라다녔는데, 당장 잡아갔을 거 아닙니까! 시민 여러분, 부정부패를 막읍시다!”

자신감이 붙은 쟁의부장님은 청산유수, 아예 만담조로 지하철에 탑승한 시민을 상대로 노동조합을 선전했다. 자신을 따라다니는 형사들을 증인으로 삼아 선전·선동의 신뢰도를 높아다니, 쟁의부장님도 보통이 아니셨다. 기지가 넘치는 쟁의부장님의 당당한 설명에 형사들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못했다. 그 모습이 쟁의부장님의 말씀이 옳다는 것을 승객들에게 알려 주고 있었다.

쟁의부장님이야 원래 괄괄한 성격이었다 치더라도 대부분의 조합 간부들 또한 거침이 없었다. 조합원들은 이제 웬만한 수작에는 넘어가지 않았다.

의정부시는 조합원들의 상경투쟁을 막기 위해 전날인 29일에 체불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조합에 연락을 했다. 그러면서 오후 6시 이후에 조합원들이 모두 모여 있으면 그때 현금으로 나눠 주겠다는 것이었다. 조합원들은 일언지하에 통장에 입금하라고 답하고는 전원이 상경투쟁 길에 올랐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경찰들을 뿌리치고 명동성당 앞에 모여서 집회를 갖고 가두시위까지 벌였다.

공무원과 경찰의 방해공작은 노조 설립 이후 끊이지 않았다. 10월 7일 조합이 의정부지방검찰청에 김기형 시장과 관련 공무원, 시설관리공단 박용래 이사장 등 8명을 직권남용 및 예산 횡령으로 고발하고 난 뒤부터는 아주 노골적이었다.

검찰 고발 바로 다음날인 8일 김기열 위원장님과 양미경 부장 앞으로 긴급체포영장이 발부됐다. 11일에는 경찰이 김기열 위원장님을 체포하면서 옆에서 이를 말리던 천영욱 조합원까지 연행했다.

집시법 위반 및 업무 방해 혐의의 참고인으로 출두하라고 했는데 불응했다는 게 영장 발부 사유였다. 조합원들이 거리로 나서고부터 조합원 전원이 경찰로부터 출두요구서를 받고 있었다. 침묵시위가 불법이라는 것이었다. 조합은 출두요구를 거부하자고 결의했고 그래서 아무도 응하지 않고 있었다.

공무원과 경찰은 조합원들 꼬투리 잡기에 혈안이 됐다. 심지어 추석연휴 사흘 동안 쉰 것을 가지고 의정부시청은 업무방해로 검찰에 조합원들을 고발했다. 이때까지 환경미화원들은 1년에 단 3일을 쉬었다. 추석과 설날 당일, 본인 생일, 이렇게 3일만 근무를 하지 않았는데, 올해는 조합원들이 추석에 차례도 지내고 고향에도 가 보겠다며 일을 못하겠다고 했다.

눈부신 변화였다.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한 조합원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추석에 고향으로 간다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조합원들이 추석연휴 3일을 쉬기로 결의하는 과정에서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결의의 목적은 단순히 추석에 쉰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틀 동안 일을 하지 않으면 당장 월급이 깎인다. 그러나 당장의 돈 몇 푼보다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가 먼저다. 그것이 노동조합의 힘을 장기적으로 키우는 길이다. 나는 우리 살림이 비록 어렵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의 노예가 되지 말자고 조합원들을 설득했다.

투쟁의 수위가 올라가면서 탄압의 서슬도 시퍼렇게 당겨졌다. 조합원들은 꿋꿋이 버텼다. 내가 당부했던 대로 준법투쟁의 규칙을 잘 지켰다. 이러니 제 아무리 경찰이라도 조합원들을 잡아갈 이유를 찾지 못했다. 조합원들은 이 점을 무척 고소해했다.

김기열 위원장님이 체포됐을 때는 전 조합원들과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 간부들,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에서도 나서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 덕분인지, 아니면 구속사유가 없었기 때문인지, 위원장님은 이틀 뒤 석방됐다.

교섭으로 가는 과정은 멀고 험했다. 그러나 조합원들은 교섭이 결렬되고 투쟁이 길어진다고 해서 크게 낙담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수십 년 동안 기다려 왔던 일이다. 조합원들 가운데 그 누구도 첫술에 배부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노조 설립 이후 두 달이 지나도 단체교섭이 되지 않자 상급단체인 공공연맹이 나섰다. 10월 14일 연맹은 사용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교섭을 회피하던 의정부시청을 교섭을 전제로 한 간담회 자리로 끌어냈다.

이 자리에서 강제퇴직자 11명은 복직하고, 시청으로 원상회복과 체불임금이나 사망자 보상금 등에 대해서는 이후에 교섭하자는 내용으로 합의가 거의 될 뻔했다. 실은 이게 공공연맹이 요구를 대폭 낮춰 양보안을 내놓았기에 가능했다. 조합원들의 가장 절실한 요구사항인 원상복귀에는 접근도 못한 것이어서 나는 내심 못마땅했는데, 김기형 시장이 이마저도 마지막 순간에 거부해 교섭은 결렬되고 말았다.

이때부터 ‘김기형 시장 퇴진투쟁’이 시작됐다. 교섭 결렬 이틀 뒤 공공연맹 주최로 의정부역에서 결의대회를 크게 열었다. 시장 퇴진투쟁이 시작되자 시에서는 공무원들을 동원해 반상회 시간에 시장은 잘못이 없고 환경미화원들이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유인물을 배포했다.

이에 맞서 노조는 의정부역·의정부북부역·회룡역·망월사역 등 의정부 4개 전철역 앞에서 시장 퇴진을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서울 원정투쟁도 시작했다. 앞에서 소개한 10월 30일 1차 원정투쟁에 이어 11월 6일에는 여당인 국민회의 당사 앞에서 2차 원정투쟁을 벌였다. 이날은 삼미특수강 해고노동자들도 함께했다. 업종을 넘어선 연대를 경험한 조합원들은 “노동자는 하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어깨를 폈다.

조합원들에게 자신감이 생긴 이유를 내 나름으로 분석하자면 이렇다. 첫째는 경험이었다. 모르면 두려움도 크고 의심도 생기는 법이다. 조합원들은 조직과 투쟁의 경험을 거치며 많은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고스란히 조합원들의 것이 됐다. 노조활동은 무조건 불법이 아니며 법적 요건을 갖추고 조합원들이 똘똘 뭉치면 사용자도 꼼짝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둘째는 싸운 만큼 되찾았다. 9월 5일 월급날에는 월급이 시청에서 받던 만큼 나왔다. 노동사무소의 결정으로 그동안 못 받았던 야간근로수당 3년치를 받았다. 소송 가능한 기간이 3년이었다. 11월에는 퇴직금도 다시 정산해서 받았다. 싸워서 되찾은 것뿐인데, 조합원들은 통장을 보고 또 보며 신기해했다.

셋째는 뭉치면 이긴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같은 일을 하고 있어도 뿔뿔이 흩어져 한마음이 되기 어려웠다. 그런데 노동조합의 깃발 아래 단결하자 시청이나 공단도, 관리자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깨달았다.

12월 28일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는 ‘시민과 함께하는 우리들의 작은 소망’이라는 이름의 음악회를 열면서 20세기의 마지막을 마무리했다. 조합원들은 작은 꽃처럼 타오르는 촛불을 양손으로 보듬고 노동자로 거듭난 올해의 기억을 되새기며 다가오는 새해를 기대했다.

나는 확신했다. 우리 조합원들이 이제까지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나을 것이라고. 그들이 되찾은 것은 월급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름을 되찾았다. 단결의 힘을 깨달은 그대 이름은 노동자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경기도노조로

2000년 1월 설 명절을 쇠고 한숨 돌리고 있는데,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로 포천군 소속 환경미화원과 기능직 기사들이 찾아왔다. 찾아왔다기보다는 황망히 문을 두드렸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데, 아무튼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사정을 들어보니 의정부보다 더 심각했다.

포천군은 2000년 1월 1일자로 군청에서 해 오던 청소업무를 민간위탁으로 바꾸었다. 군청 소속이던 환경미화원, 기능직 기사들에게 사표를 받고는 청소업체 소속으로 일하라고 했다. 의정부는 시설관리공단에 넘겼지만, 포천은 업체에 위탁한 것이다. 업체가 공단보다 훨씬 더 일하기 팍팍하고 임금이 박하다는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민간위탁을 하면서 군청의 담당 공무원들은 환경미화원과 기능직 기사들에게 예산안 서류를 보여 주면서 업체로 가도 근로조건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들 업체로 가는 게 싫었지만 공무원들의 태도가 워낙 강경해서 사표를 쓰는 수밖에 없었다. 해고가 아니라 직장이 바뀌는 것이고 근로조건이 그대로라니 찜찜해도 시키는 대로 했다.

새해 들어 출근하기 전날 이들은 ‘사장님’을 찾았다. 명색이 사장이고 앞으로 잘 지내야 하니 미리 인사를 하러 간 것이었다. 업체 사무실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들은 청천벽력 같은 통고를 받았다. 사장은 인사는 받는 둥 마는 둥 기존 월급보다 70만∼80만원 적게 줄 테니 알고 있으라며 고개를 돌린 것이었다.

혼비백산한 기능직 기사와 환경미화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군청으로 뛰었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무엇인가 착오가 있어서 이렇게 됐을 것이라고 애써 뛰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다. 헐레벌떡 달려온 그들에게 군청 행정과장은 “사표 쓰고 나갔으니 업체와 이야기하라”며 입을 씻었다. 하늘이 노래지고 억장이 무너졌다.

막막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생각에 의정부의 한 변호사 사무실을 방문했는데, 변호사의 첫마디가 “사표 썼어요? 안 썼어요?”였다. 도리가 없구나 싶어서 무거운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변호사 사무실에서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라는 곳이 있는데 한 번 가 보라”고 귀띔을 했다. 이들은 밑져야 본전 심정으로 우리 사무실을 찾았다. 그 변호사가 우리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포천군 환경미화원들이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나는 김인수 국장·조명심 국장과 함께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군청의 소행이 참 모질고 비정했다.

포천군은 민간위탁도 문제이지만 이에 앞서 환경미화원 몇 분을 미리 해고시켰다. 가산면에서 일하던 환경미화원이 5명인데 그중에 1명을 해고시키려고 담당 공무원이 환경미화원들을 불러서 제비뽑기를 시켰다. 통 속에 주황색 탁구공 1개와 하얀 탁구공 4개를 넣어 놓고는 주황색 공을 뽑은 사람에게는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안타까웠던 점은 기능직 기사들의 사표였다. 기능직 기사는 공식적 절차를 거쳐 채용된 공무원으로 해고요건이 까다롭다. 본인이 사표를 쓰지 않으면 그만이다. 기능직 기사로 청소차를 운전하던 전순영 씨는 업체로 가라는 말에 사표를 쓰지 않고 버텼다. 군청이 직급말소 시킨다며 더 심하게 압력을 가하자 전순영 씨는 “어디 가서 밥 먹고 못 살겠느냐”고 하면서 사표를 썼다. 얼굴을 보니 순하게 보였다.

포천에서 상담하러 오신 분들은 상황을 되돌릴 수 있는지 없는지 애가 타는 어조로 질문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해결사가 아니다. 내 대답은 이랬다.

“노조를 만들어서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좀 받으셔야 됩니다.”

포천에서 오신 분들이 돌아가시고 난 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봤다. 실로 기다리던 일이었다. 우리는 의정부만이 아니라 경기도 나아가 전국의 환경미화원들이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권익을 보호받아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당장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리는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의 투쟁을 지원하면서 겨우 틈을 내어 의정부시의 쓰레기 수거업체인 의정환경과 미래환경의 미화원들, 시립 공공주차장에서 근무하는 주차관리원, 분뇨 수거원들을 만나 노조 가입을 권유하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서도 이렇게 활동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의정부’라고 지역을 정해 놓은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 포천의 환경미화원들과 기능직 기사들을 가입시킬 수는 없었다. 쉬운 방식은 포천지역시설관리노동조합을 만들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는 노동조합 형태에 대해 기존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의 조직 형태는 지역노조다. 일정한 지역에서 비슷한 업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조합인 지역노조로는 청계피복노조가 유명하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부터 업종 사양화·하청계열화·공장이전 등으로 지역별·업종별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부터 노동자들의 고용이 불안정하게 되자 이런 경향이 심해졌다.

의정부의 예를 들더라도 자치단체에 시설관리만이 아니라 다양한 업종의 노동자들이 고용돼 있었다. 의정부시청의 사무보조노동자, 보건소에서 업무를 보조하는 노동자 등 하는 일도 다르고 자치단체에 고용된 형태도 다르지만 노동자로서 권리를 못 찾고 있기는 환경미화원과 비슷했다.

이즈음 민주노조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지역일반노조라는 조직형태가 논의되고 있었다. 업종이나 고용 형태를 불문한 지역단위 노동조합이 지역일반노조다.

민주노조운동이 진행된 과정을 보면 기업별 노조의 경제적 조합주의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산업별 노조 건설로 나아갔다. 민주노총은 산별노조 건설 지향을 분명히 했다. 1998년 병원노련이 보건의료노조로 전환하고 대학노조 같은 산별노조가 속속 생겨났다. 하지만 여전히 기업별 노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산별노조체제로 간다 하더라도 산별노조는 노동자의 힘을 중앙으로 모으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지역이 공동화된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크고 지역 노동운동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경우에는 문제점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세에서 업종과 산업을 불문해 “노동자는 하나”라는 지향점을 분명히 하고, 기업별이나 산업별 노조운동이 포괄하지 못했던 중소·영세·비정규 노동자를 조직화할 수 있는 지역일반노조는 우리가 실현하려고 하던 노동운동과 가장 가까운 노동조합의 형태였다.

물론 이런 생각이 단번에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과 토론했다. 우리는 덕계노동자사랑방을 하면서 전국노동단체협의회의 참관단체로, 노동사회연구소의 단체회원으로서 노동운동 내부에서 진행되던 다양한 논의와 토론에 참여하고 있었다.

2000년 5월 한국비정규노동센터를 창립한 박승흡 대표가 비정규노동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 대표로부터 지역일반노조운동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많이 받았다. 박승흡 대표는 노동사회연구소 김금수 선생님의 소개로 만났는데, 알고 보니 나와도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내가 대학 시절 첫 번째 감옥살이를 할 때 옆방에 계시던 분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박충흡 씨였다. 학생이었던 내게 옥살이의 경험을 전수해 주면서 위로하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그분의 동생이 박 대표였다.

포천의 환경미화원과 기능직 기사들이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로 상담을 해 온 것을 계기로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라는 틀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심사숙고한 결과 경기도 전역의 노동자를 조직 대상으로 하는 일반노조를 창립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일반’이라는 단어가 노동자들에게는 어렵고 낯설게 들릴 것 같다는 지적이 있어 ‘일반’은 빼고 경기도노동조합으로 정했다.

조직형태를 바꾸게 되면서 노동조합의 지도부 구성을 놓고 고민이 시작됐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의 김기열 위원장님이 포천까지 다니면서 노조활동을 하기에는 아직 무리였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는 아직 싸우는 중이었고 전임자도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지역일반노조는 건설 과정이 기업별 노조보다 훨씬 어렵고 복잡하다. 현장 출신인 김기열 위원장님에게 지금보다 더 많은 짐을 안겨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자칫하면 자리를 잡아 가는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경기도노조의 위원장은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 멤버 가운데 나와야 한다. 나·김인수·조명심·양미경, 넷 중에서 내가 그 역할을 맡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이때 우리는 어느 사업장에 고용된 임금노동자가 아니어서 아는 분이 운영하는 작은 컴퓨터업체에 취업하는 형식을 취했다.

경기도노조를 창립하자 지역의 일각에서는 지역일반노조를 만들면서 왜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나 지역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활동가들과 사전에 논의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결정해서 만들어 버렸느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상식적이고 타당한 지적이었다.

지역 내 논의를 생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되면 일이 아주 더디게 진행될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오랫동안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서로 뻔히 아는 선후배들과 ‘지역일반노조란 무엇인가’부터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는 여전히 투쟁 중이고 곧 포천도 조직해야 했기 때문에 한시라도 틈을 두고 싶지 않았다.

또 하나 내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은 의정부참여연대 시민광장을 이끌면서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목영대 선배의 존재였다. 그는 내가 경기도노조 위원장이 되는 것을 반대할 게 분명했다. 목 선배와 나는 같은 ‘운동권’이지만 많이 달랐다. 목 선배는 민주노총의 체계를 우선하는 입장이어서 지역일반노조는 시기상조라고 할 것이었다.

나는 논쟁보다는 조용히 독자적으로 일을 추진하는 쪽을 택했다. 이 통에 입장이 곤란해진 사람은 내 아내였다. 당시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 최혜영 사무처장은 목 선배의 부인이었다. 최 사무처장과 조직부장인 아내가 지구협의회 사무실에서 크게 다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었다.

최혜영 사무처장이나 양 부장은 남편들과는 무관하게 각자의 판단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짝을 만났다. 두 사람에게 각자의 남편은 동지이기도 했다. 경기도노조 창립 문제도 각자의 의견으로 부딪혔지만 공교롭게도 각자 남편들과 의견이 같았기에 남들에게는 아내들의 대리전으로 보였다.

경기도노조 창립으로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에서 활동하기가 불편했던 양 부장은 파업 이후 보건의료노조 조직부장으로 옮겼다. 경기도노조 위원장이 된 나를 배려해서 아내 스스로 결정한 것이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를 경기도노조로 전환하고 내가 위원장이 되는 것에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의 간부나 조합원들은 특별히 반대를 하거나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았다. 포천도 함께해야 하니까 경기도노조를 만드는 것이고 환경미화원만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의 노동자들이 모두 함께해야 하니까 조합 이름에 시설관리라는 말을 빼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위원장을 내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6개월 동안 투쟁을 하면서 다져진 신뢰가 있었기에 별다른 반대가 없었다.

2000년 1월 20일 경기도노조를 창립하면서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는 가로분회가 됐고 분회장은 시설관리노조 김기열 위원장님께서 그대로 맡으셨다. 홍희덕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사무장님은 경기도노조의 사무장이 됐다. 투쟁의지를 모으는 1박2일 단합대회로 창립기념행사를 치렀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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