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노진귀(63·사진) 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장이 묵직한 프로젝트를 안고 돌아왔다. 2011년 정년을 맞아 일선에서 물러났던 그가 올해 8월 <운수산업 작업장규칙 형성실태 연구-버스·택시·도시철도·철도> 연구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이번 보고서는 시작에 불과하다.

한국노총 중앙연구원은 올해부터 2년간 '교섭전략 4부작'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프로젝트에는 정부 정책에 따라 노사 간 힘의 관계와 교섭전략이 어떤 과정을 거쳐 단체협약(작업장규칙)에 반영 혹은 제외되는지 추적하고, 단체협약 같은 작업장규칙의 실태를 분석하는 내용이 담긴다.

노진귀 전 원장의 현재 직함은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상임자문위원이다. 지난해 10월부터 중앙연구원으로 출근하고 있다. 이정식 중앙연구원장은 자신의 방을 쪼개 노 상임자문위원의 연구실을 만들었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20일 그의 연구실을 찾았다.

노 상임연구위원은 “무엇보다 정리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렬했다”고 말했다.

“현직에 있을 때는 일에 매몰돼 있잖아요. 그때그때 흐름에 묻혀 지나가게 돼요. 밖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게 어렵죠. 한국노총에도 단지 뒤편에 앉아 차분히 정리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않았을까요. 이제 그럴 위치가 됐네요. 허허허.”

"운수업에서 시작해 각 업종 단협·규칙 훑겠다"

노 상임자문위원은 운수산업을 시작으로 내년까지 제조업과 공공·금융·서비스업에 대한 작업장규칙 형성실태를 분석할 예정이다. 첫 연구과제로 운수업을 택한 이유는 정부 정책과 노사 간 협약이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일례로 버스업의 경우 정부의 요금조정 정책에 따라 임금수준이 결정된다. 택시업이나 도시철도·철도도 마찬가지다. 모두 대정부 관계를 대등하게 만드는 교섭전략을 필요로 한다.

노 상임자문위원은 보고서에서 “버스·택시·지하철·열차·항공 등 여객 운수업의 특성상 수요 비탄력성이 높기 때문에 노동자 간 연대는 교섭력의 증가로 직결된다”며 “운수업에 공통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대정부 교섭에 대한 절차나 규칙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연구를 위해 그는 전국택시노조연맹과 전국자동차노조연맹의 모든 지역본부(노조)와 사용자단체를 찾아 노사 관계자들을 만났다. 단체협약·취업규칙·노사가 관행으로 만든 사소한 규정까지 분석했다.

“버스나 택시는 작업장규칙이 오랜 기간 관행으로 돼 있는 경우가 많아 취업규칙을 입수하기가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운수업은 동질성이 강한 편인데 제조업은 통계청 세세분류상 업종이 450개나 돼요. 450개 업종은 못하더라도 소분류 80개 업종은 모두 방문할 생각입니다. 요즘 한 달에 절반은 출장이네요.”

기업별노조 한계 극복 위한 작업장규칙 연구

왜 하필 연구대상이 작업장규칙의 형성 실태일까. 노 상임자문위원은 “기업별 체제를 뛰어넘지 않으면 노동운동의 활력을 되찾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노조의 시야가 기업 내부에 한정돼 있는 탓에 상급단체의 교섭지침을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현실을 바꿔야 한다는 설명이다.

“기업별 교섭은 이미 틀이 잡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응이 쉽지 않아요. 근로시간단축 관련 근로기준법 개정 문제도 상급단체가 나서고 기업별노조들이 받쳐 줘야 풀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상급단체와의 괴리가 커지면서 불신도 커지고, 기업별노조가 하는 역할은 축소되고 있어요. 노동운동이 그래서 침체된 겁니다. 기업별노조 체제의 폐해를 오랫동안 언급하긴 했지만 여전히 강조할 수밖에 없는 지점이지요.”

노 상임자문위원은 “기업별노조의 한계는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데 그걸 뛰어넘지 못하는 게 문제”라고 비판했다. 당장 산별전환이 어렵다면 상급단체를 강화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설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흔히 일본이 대표적인 기업별노조 체제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나라가 더 심해요. 일본은 상급단체의 위상이나 역할이 우리보다 상위에 있습니다. 상급단체 의무금 비중도 훨씬 높고요. 일본 노동운동에 대해 손가락질을 많이 하는데, 이대로라면 그 손가락이 우리를 향하게 될 겁니다.”

노 상임자문위원은 “비판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 전환이 갖는 성과는 여전히 크다”며 “도 아니면 모라는 식의 선택이 아니라 최악이 아닌 차악, 최선이 안 된다면 차선이라도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말했다.

“상급단체를 만든 이유가 뭘까요. 기업별노조 차원에서 안 되니까 상급단체를 만든 거지요. 대기업보다 영세기업 노조들이 뭉쳐서 만든 울타리였어요. 기업별노조로 축소되고 왜소화되는 것을 막으려면 산별노조 전환이 안 되더라도 상급단체 역할을 강화하는 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적극적인 단체교섭이 노조운동의 동력

“단체교섭이 약화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인 것 같아요.”

기업별노조 체제에서 단체교섭은 거의 모든 틀을 갖추고 있다는 게 노 상임자문위원의 진단이다. 노사관계에서 손댈 것도, 노조가 개선할 영역도 점점 사라지면서 조합원들의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노사 단체교섭을 광범위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나오지 않는 배경이기도 하다. 현재의 노사관계는 새로운 비전을 담을 수 있는 틀이 안 된다는 게 노 상임자문위원의 판단이다.

“노조가 기존 시각 그대로 현실을 보면 할 게 없어요. 복지 문제나 조금 개선하는 수준에 그칠 겁니다.”

노 상임자문위원은 “새로운 노동운동의 비전을 세우고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단체교섭은 노조운동의 핵심이다. 단체교섭이 침체된다면 노조의 역할도 축소될 수밖에 없다. 사측이 노조를 특별히 공격하지 않는 한 노조는 조합원을 동원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람은 가끔 움직여 줘야 해요. 운동을 안 하면 노쇠해지죠.”

노 상임자문위원은 “건강하게 활동하는 노조의 리더들이 기업 안에만 있지 말고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자기 노조만 강해진다고 노동운동이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노 상임전문위원이 노동계에 던지는 충고다.

“조직에 대한 채찍질, 피하면 퇴조한다”

끝으로 그는 내셔널센터에서 싱크탱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싱크탱크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조직은 큰 걸음을 가기 어렵다. 싱크탱크가 부담스러운 조직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지역노동계가 노동운동 혁신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게 연구소를 세우는 거였습니다. 우리나라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흐름 속에 빠져 피동적으로 흘러가는 데 안주해서는 안 돼요. 조직은 채찍질을 해 줘야 합니다. 채찍을 맞으면 누구나 아픕니다. 그렇다고 피한다면 퇴조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노 상임자문위원이 ‘교섭전략 4부작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노사관계를 담는 그릇인 단체협약은 여러 가지 변수들이 작용한다. 정부의 경제정책이나 기술환경, 원자재시장 동향, 노동시장 흐름이 모두 영향을 미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내년까지 단체교섭 종합분석보고서를 발간한다는 계획이다.

노사정 각각의 주체들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대응해 왔는지를 종합적으로 분석할 때 노조운동이 가야 할 방향을 설정할 힘도 생긴다. 노 상임자문위원이 단체협약을 파고드는 이유다.

글=김미영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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