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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형제 김헌정 4] 환경미화원들, 일어서다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 인간적 모멸을 견디며 살아온 지방자치단체 비정규 노동자들. 고 김헌정 열사는 이들의 눈을 띄우고 희망을 제시했던 등대였습니다. 1998년 환경미화원 노동자들과 첫 인연을 맺은 후 10여년의 조직활동 끝에 2천50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민주연합노조를 세웠습니다. 민주연합노조는 그의 열정과 헌신을 그리는 마음에 2013년 5월 <매일노동뉴스>를 통해 ‘나의 형제 김헌정’이라는 평전을 펴냈습니다. 비정규직과의 연대가 화두가 된 요즘, 그의 정신은 우리 시대의 정신이기도 합니다. <매일노동뉴스>는 글쓴이인 박미경 작가와 책을 발행한 민주연합노조의 양해를 얻어 본지에 김헌정 평전을 매일 1회씩 연재하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깊은 성원 바랍니다.<편집자>

제1부 녹색조끼의 탄생

1999년 7월 25일 일요일 새벽 6시 ·찢어지고 부서진 ‘청소부’의 육신·밥 한 끼 주고 밥줄을 끊은 ‘시장님’·동두천의 경험·홍희덕 씨와 나천봉 씨의 등장·“노조의 니은 자도 모른다. 그래도 한다!”·환경미화원들, 일어서다·노동조합은 지금 ‘공부 중’ ·“지금 여러분께서 하시는 행동은 불법이 아닙니다!”·첫 번째 위기, 그리고 반격·싸운 만큼 되찾는, 그대 이름은 노동자·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경기도노조로·마지막 카드·“파업은 노동자의 학교”·‘인간 쓰레기’를 쓸어 담자·전제만 교육부장의 항변 “잘못한 게 있어야 잘못했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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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미화원들, 일어서다

이날은 우리의 ‘10년 대장정’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에서 출발해 경기도노조를 꾸리고 전국조직인 민주연합노조를 세웠다. 환경미화원·수로원·준설원 등 전국의 지방자치단체에 속한 비정규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며 대한민국 최초의 환경미화원 출신 국회의원을 만들어 냈다.

그 장정의 첫날, 나는 이렇게 인사를 했다.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가 의정부에 있는데 동두천과 구리에서 환경미화원노조가 먼저 결성됐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움을 안고 있었는데 오늘 의정부에서 노조가 결성되어서 아주 기쁩니다.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는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겠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조합원들은 내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눈은 찢어졌지, 광대뼈와 입은 튀어나와 있지, 성질이 고약해 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더 활짝 웃었는데……. 그래도 진흥화 회계감사님은 내 첫인상이 무척 순해 보였다며 나를 두둔해 주셨다. 그 말을 믿기로 했다. 진 회계감사님은 거짓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분이시니까.

노조창립식을 한 이틀 뒤 8월 11일 오전 12시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조합원 전원이 시청사 앞에 집결했다. 의정부시청이 우리 조합원들을 수십 년 동안 부려먹다 밥 한 그릇 사 주고는 공단으로 내쫓은 사실을 노동조합의 이름으로 만천하에 알려야 했다.

시청 앞마당에는 정보과 형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형사들은 환경미화원들이 노조 만든 게 국가나 시민의 안전에 위험요소가 될 소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총경 출신인 공단 이사장에게 후배의 도리를 한다고 정보를 수집하러 나온 것일까.

이날 사회는 나천봉 쟁의부장님이 맡고 조합 간부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 발언하기로 작전을 짰다. 그런데 초장부터 ‘영 아니올시다’였다. 쟁의부장님이 노동조합 설립을 알리는 성명서를 큰 소리로 읽으면서 분위기를 잡기로 돼 있었는데, 웬걸 쟁의부장님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나는 뒤에 서서 까치발을 하고 집회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쟁의부장님은 성명서를 제대로 읽지도 못하고 입만 달싹였다.

나천봉 쟁의부장님은 1948년생으로 전남 나주가 고향이다. 1년에 쌀 한 섬 받고 남의 집 일 해주느라 초등학교를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졸업장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까닭으로 쟁의부장님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고 자주 우기신다. 쟁의부장을 맡을 때도 “나는 글을 모르니까 쟁의부장 할라요”라고 말씀하신 게 기억이 난다.

실은 쟁의부장님은 까막눈이 아니다. 신문을 읽는 분이 글을 모를 리가 없다. 기억력도 좋으셔서 한 번 듣고 본 것은 금방 외우신다. 이런 분이 노조 설립 성명서를 읽지 못해서 더듬거리다니.

‘어! 이상하다’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내 아내가 형사들을 향해 냅다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야! 이 싸가지 없는 새끼들아! 환경미화원들에게 이런 짓을 해 놓고 미안하지도 않아! 노사관계에 정보과가 왜 껴! 낄 데 안 낄 데 다 끼고! 누가 짭새 아니라고 할까 봐 그래!”

상황이 파악됐다. 쟁의부장님이 마이크를 잡았는데 형사들이 곁에서 ‘불법’이라고 이죽거렸다. 쟁의부장님이 멈칫거리자 아내가 나선 것이었다. 조합원들을 만만하게 보면서 시비를 걸던 형사들은 내 아내의 서슬에 놀라 아무 말 못하고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내의 고함소리는 쟁의부장님의 긴장을 풀기에 충분했다. 형사들이 주춤하는 모습을 보고 쟁의부장님은 다시 힘을 내셨다. 조합원들은 목소리를 높여 원상복귀를 요구했다. 조합원들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집회는 처음이다. “음지에서 양지로 나온 우리 모습에 감명받았다”는 김정복 문화부장님의 말씀처럼 첫 집회의 감동은 노조창립식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집회가 끝나자 나천봉 쟁의부장님은 아내에게 달려가셨다.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걸쭉한 남도 사투리가 그냥 튀어나왔다.

“아니, 여자잖아요. 청바지 입고 수수하게 보이잖여. 저 양반이 뭘 할 수 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는디. 오메, 형사 보고 짭새라고 함씨롱 삿대질을 하고 욕을 허벌나게 하더랑께요.”

쟁의부장님은 아내 곁을 떠나지 않으며 연신 “무서운 여자, 무서운 여자”라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사람은 나천봉 쟁의부장님이었다. 아내와 형사들의 대거리는 엄청난 학습효과를 가져왔다. 이날 이후 쟁의부장님은 형사를 ‘짭새’가 아니라 ‘참새’로 봤다. 수많은 집회나 시위현장에서 쟁의부장님의 목소리가 줄어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공권력 앞에만 가면 쟁의부장님은 더 펄펄 날았다.

내 아내라고 남들 보는 앞에서 상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상대는 일제시대 이래 강자에게 머리 조아리고 약자 후려치는 데 이골이 난 정보과 형사들이다. 조합원들에게는 첫 집회였다. 앞으로 갈 길이 까마득한데 시작부터 주눅이 들면 될 일도 안 된다. 예의는 개에게나 주라지.

공개된 장소란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조합원들에게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자리였다. 환경미화원들이 자신의 직업을 자랑스럽게 여기기란 참으로 힘들다. 맨 처음 일할 때는 창피해서 한여름에도 모자를 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게 보통이다. 취직하기 전에 자녀에게 ‘아빠가 청소부 해도 괜찮겠느냐’고 물어보시는 분들도 많다.

밥줄이 끊기는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을 선택했지만 내심으로는 갈등하고 있었다. 도시를 청소하는 일은 론스타 같은 투기자본의 마름 노릇을 하며 몇백억원씩 챙기는(그래 봤자 론스타에게는 푼돈이지만) 김앤장의 변호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놈의 세상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한다. 김앤장의 변호사들은 성실해서 펜대를 굴리고 의정부의 환경미화원들은 게을러서 비질을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고방식에서는 김앤장의 변호사들이 버는 몇백억원의 수수료는 노력의 대가이고 의정부의 환경미화원들이 받는 백만원 남짓한 월급은 노동의 대가가 된다. 사실을 말하자면 환경미화원들은 노동력의 대가도 받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이러니 환경미화원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조합원들은 자신의 일이 어디 내놓고 자랑할 게 못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노동조합 활동을 하기 위해서라도 환경미화원이라고 대놓고 떠들어야 한다. 이게 보통 마음의 부담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조합원들이 긍지를 찾아야 한다고 믿었다.

긍지가 없으면 자신감도 없다. 자신감이 없으면 동료도 믿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단결력이 생길 수 없다. 첫날 집회 평가에서 일부 간부들은 불안해하고 동료를 의심했다. 집회 현장에 형사들이 먼저 나타났다는 것은 “내통자가 있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다.

어느 조직이든 비밀은 약간씩 새기 마련이다. 중대한 보안사항이 아니라면 ‘고자질쯤이야’라고 넘기고 그것이 노조활동의 발목을 잡지 않도록 해야 된다. 누군가 알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형사들이 넘겨짚고 시청으로 왔을 수도 있다. 환경미화원들이 노조를 창립했으니 다음날 시청에서 어떤 식으로든 행동에 나설 것이라는 정도는 노련한 정보과 형사들에게는 너무나 쉬운 추리였다. 그런데 조합원들은 이 문제에 집착하는 눈치였다.

우선 작은 싸움부터 풀어 나가고 이기는 경험을 차곡차곡 쌓아야 했다. 동두천의 사례를 떠올렸다. 의정부에서도 환경미화원들의 임금이나 퇴직금을 갖고 장난을 쳤을 수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조합원들의 임금과 퇴직금 내역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고 그러려면 명세서가 있어야 했다.

조합원들은 시청에 가서 그동안 수령한 임금과 퇴직금 명세서를 요구했다. 나와 김인수는 조합원들에게 개인적으로 가지 말고 전체가 모여서 함께 받아 오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다. 퇴직금 명세서 받기가 일종의 노조활동이자 낮은 단계의 투쟁이었던 셈이다.

조합원들은 시청 민원과로 가서 퇴직금 명세서를 달라고 했다. 퇴직금 명세서를 어느 과에서 주는지 몰라 민원과로 찾아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는 73명이 길게 줄을 서서 느긋하게 기다렸다. 조합원들은 이렇게 해서 퇴직금 명세서를 흔들며 돌아왔다.

“어려운 일도 아니네!”

나와 아내가 노조활동을 지원하면서 세운 원칙은 항의하고 싸우는 일만큼은 조합원들이 직접 계획하고 나서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시범조교처럼 처음에 한두 번만 나섰다. 실은 이게 쉽지 않다.

일의 속도를 생각하면 우리가 하는 게 훨씬 빠르다. 시나 관리공단에 시정을 요구하고 항의하는 것도 경험 있고 젊은 우리가 하는 게 낫다. 또 우리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분들이 몸에 익지 않은 일을 힘들게 하시는 모습을 보면 안타깝다.

그러나 우리가 서두르고 마음이 약해져서 대신하다 보면 조합원들은 들러리가 되고 만다. 노조활동을 통해서조차 자신감을 찾을 수 없다면 조합은 무용지물이 된다.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일이 많아지면서 일손이 달렸다. 김인수는 임금과 퇴직금 분석에 들어갔고, 아내는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 조직부장으로 다른 노조의 일도 도우면서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를 지원하느라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랐다.

조명심 씨에게 SOS를 쳤다. 조명심 씨는 이화여대 사학과 출신으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했던 경험이 있었다. 덕계노동자사랑방에서 함께 활동하면서 서로 잘 아는 처지였기에 염치 불고하고 결혼해서 시부모님 모시고 아이 키우는 데 전념하고 있는 조명심 씨를 불러냈다. 성품이 착한 조명심 씨는 환경미화원들의 투쟁이라고 하니까 흔쾌히 수락하고 경기북부노동정책연구소 총무국장을 맡았다.

노동조합은 지금 ‘공부 중’

의정부지역시설관리노조 시절 내가 맡았던 일은 지원업무였고 그 가운데에서도 주로 기획과 교육이었다. 나는 특히 교육에 신경을 썼다. 그때 우리는 조합 간부들과 날마다 회의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조합원 전원이 참석하는 회의 겸 교육시간을 마련했다. 장소는 민주노총 경기북부지구협의회 사무실이나 한국노총 노동회관을 빌렸다.

교육 첫 시간을 내가 맡았다. 강의 내용은 ‘노동조합이란 무엇인가’였다. 나는 노동조합 활동이 불법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최대한 강조했다. 대한민국 헌법 33조에 노동3권이 보장돼 있고 노조활동을 이유로 해고할 수 없다며 조합원들을 안심시켰다. 설령 사용자 측이 해고를 시키더라도 불법이므로 법적인 절차를 통해서 얼마든지 복직할 수 있다고도 설명했다. 이와 함께 근무시간에 사용자 측에 빌미를 줄 만한 행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근무시간에 술을 마신다든지, 부업하는 아내를 돕기 위해 일을 일찍 끝내고 근무지를 벗어난다든지, 재활용 물품을 팔아 단돈 1만원이라도 이익을 취한다든지 하면 꼬투리를 잡힌다고 거듭 당부했다.

근무 중 음주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환경미화원이 맨 정신으로 일하기가 지루하고 괴로워서 술을 마셨다. 이런 일이 생기면 즉각적으로 개입해서 다음부터는 절대 그런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관리책임을 진 공무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엄연히 자신의 업무임에도 반장이나 연장자에게 미루는 것이었다.

반장이나 연장자들은 공식적으로 권한을 위임받은 게 아니기에 사람에 따라 눈감아 주기도 하고 심지어는 이를 약점으로 잡아 두는 경우도 있었다. 매사가 이런 식이니 근로관계가 정상이 될 리가 없다. 동료를 믿지 못하고 반장이나 연장자 또는 관리자에게 줄을 서는 버릇은 이래서 생겼다. 이것은 명백히 공무원들의 잘못이다.

나는 항상 동료애를 힘주어 말했다. 동료애에서 나오는 단결이야말로 노동자들이 사용자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내 딴에는 열성적으로 설명했다. 지난 시절 이쪽저쪽으로 나뉘어 반목하던 잘못된 풍토를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체교섭에 대해서도 교육을 했다. 교섭 절차나 형식도 중요했지만 노동자와 사용자는 대등하다고 먼저 못을 박았다. 교육시간 내내 고개를 끄덕이던 조합원들도 이 대목에서는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단체교섭 석상에서 ‘시장님’과 환경미화원이 동등하다니! 노동조합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조합원들로서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조합을 설립하고 첫 단체교섭을 진행하면서 우리는 공단이 아니라 시청에 교섭을 요구했다. 공단은 허수아비였다. 공단의 자본금을 의정부시가 전액 출자했고 시장이 공단 이사장 임면권을 가졌으며 공단 임원과 직원에 대한 급여 및 퇴직수당의 지급기준을 정하는데도 시장의 승인을 얻게 돼 있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시장은 자신은 조합원들의 사용자가 아니라며 단체교섭에 응하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단체교섭을 실제로 겪지를 못했으니 내 말을 믿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했던 것은 교육시간에 조는 분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조합원들은 새벽부터 일하기 때문에 남들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근무시간에 교육을 잡을 수는 없으니 저녁에 교육을 해야 하는데, 이 시간이 조합원들로서는 피곤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때인 것이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눈은 감기지 않았다. 내가 교육을 잘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전에 대중강연이나 교육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덕계노동자사랑방에서 노동자들과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눈 게 전부였다. 무경험자의 강의에도 조합원들은 ‘세상에 저런 것도 있구나!’라고 감탄을 하고 ‘우리만 모르고 있었구나!’라며 책상을 치고 ‘그동안 속고 살았구나!’ 하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리 조합원들의 평균학력은 중학교를 넘지 못했다. 초등학교만 나온 분들도 상당수였고 글을 완전히 깨치지 못한 분도 있었다. 그들에게 교육이란 몸에 잘 맞는 옷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교육이냐에 따라 반응은 달라진다. 조합원들은 교육이 길어지면 약간 답답해하면서도 무엇을 배운다는 것에 흠뻑 빠져들었다.

공부하기 싫어서 학교에 가지 않은 청소년은 거의 없다. 모두들 가난해서, 부모의 배움이 덜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한 것이다. 비좁은 걸상에 엉덩이를 붙인 채 책상 위에 공책을 펼쳐 놓고는 내 강의를 받아 적어 가며 교육에 집중하는 조합원들을 보며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을 감춰야 했다.

우리 조합원들은 김헌정 하면 대개 교육을 떠올린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명강사가 아니었다. 듣는 사람의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웃고 울리는 그런 교육시간을 만들지는 못했다. 내가 교육을 하면서 주의를 기울였던 점은 알기 쉽게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하고 한 번 교육했던 내용이라도 정리해서 반복하자는 정도였다.

이런데도 우리 조합원들은 “교육을 받고 감동했다”고 말했다. 어떤 조합원은 “시청의 하수인으로 살아온 세월이 억울하다”고 안타까워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전태일 열사의 그 말을 떠올렸다.

“나에게 대학생 친구가 한 명 있었더라면…….”

우리 조합원들은 참으로 오랜 세월 동안 대학생 친구를 기다려 왔던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왜 환경미화원을 노동자로 생각지 않았을까. 누군가 환경미화원들이 노동자냐고 물어봤다면 임금을 받고 일을 하니까 노동자라고 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라고 하면 제조업 금속 노동자를 우선 생각했다. 나를 비롯해 사회과학서적으로 세상을 파악한 ‘먹물’들이 금속노동자를 비롯한 제조업 노동자들을 짝사랑하는 동안 환경미화원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외롭게 견뎌야 했다.

조합원들이 교육시간을 좋아하니 덩달아 나도 선생님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담임선생이라도 된 것처럼 조합원들 가정방문까지 다녔다. 조합 설립 초기에 간부를 했던 분들의 집은 빼놓지 않고 다 가 본 것 같다. 특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어떻게 사시는지 궁금했다. 혹시라도 조합을 시작하고 나서 어려움이 생겨난 게 없는지도 살펴야 했다.

넉살도 좋지, 꼭 밥때에 맞춰 찾아갔다. 밥 한 끼 얻어먹고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노조 간부들의 살림은 빈한하기는 했어도 대체로 안정적인 편이었다. 작아도 내 집 마련을 했거나, 전셋집에 살았다. 여기에는 숨은 공로자가 있었다.

바로 아내였다. 조합 간부들의 배우자들 가운데에는 골병드신 분들이 많았다. 남편의 벌이만으로는 집 한 칸 마련하기란 불가능하다. 부부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는데, 그 일이라는 게 남의 식당 일이거나 미싱 일이었다. 이런 일을 오래 하면 몸 성한 곳이 없기 마련이다.

조합 간부들에게 당면한 가장 큰 현안은 자녀교육이었다.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면 대학 학비 걱정, 공부를 못하면 취업이나 장래를 걱정했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사교육이라는 게 기승을 부리지 않았다. 그래서 사교육비 걱정은 덜했던 것 같다. 1999년이면 국민의 정부가 등장한 지 1년이 지났을 때다. 그로부터 10년 동안 사교육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았다. 그리고 보니 민주화는 민주화로되 서민에게는 양극화였다는 게 실감이 난다.

내 임무는 교육이었지만 어쩌면 공부를 한 사람은 나였다. 인생 굽이굽이 수많은 사연을 안고 있는 조합 간부들이 모두 나의 선생님이었다.

홍희덕 사무장님은 환경미화원이 되기 전에 삼양유지 사료창고에 다니셨다고 한다. 사료 한 포대에 25kg이 나가는데 그걸 트럭에 싣고 내리는 일을 했다는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다. 홍 사무장님은 또래의 한국 남성 평균보다 키도 작고 몸무게도 적으시다. 말수도 적고 온화하게만 보이지만 뚝심이 보통이 아니셨다. 홍 사무장님은 사료창고에서 스트라이크를 한 경험담을 들려주셨다.

창고에서 8명이 일을 하는데 일이 힘들어서 며칠 하다가 그만두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무실 직원들은 인원충원을 하지 않고 본사에서 내려오는 8명의 인건비를 그대로 받아 결원의 인건비는 자기네들이 유흥비로 써 버렸다. 8명이 해야 하는 일을 줄어든 인원으로 하자니 홍 사무장님과 동료들은 죽을 맛이었다.

하루는 홍 사무장님이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모두 이끌고 대낮에 막걸릿집으로 갔다. 일하는 사람들이 없어지자 다급해진 사무실 직원들은 사료 한 포대에 두셋이 엉겨 붙어 날랐는데, 그게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무거운 짐을 싣고 나르는 데는 요령이 필요하다. 땀으로 범벅이 된 창고 소장이 막걸릿집으로 찾아오자 홍 사무장님은 “8명의 인건비를 우리한테 내놓든지 인력충원을 하라”고만 대꾸하셨단다. 소장은 꼬리를 내렸다. 가정방문을 하면서 의외의 성과도 있었다. 어느 조합 간부의 집에서다. 부인이 자꾸만 남편 흉을 보는 것이다. 외간 여자들에게 눈길을 자꾸 주신다는 게다. 다른 말로 설득을 하면 인생 후배인 내가 무례를 범하는 것 같아서 접어 두고, 노동조합 간부가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참을 떠들었다. 부인의 요청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아 냈다. 그날 이후로 그 조합 간부의 부인은 노동조합이라고 하면 두 손 들고 환영했다.

노동조합을 만들고 처음 맞은 토요일에는 수락산 아래 동막골에서 노래와 구호를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유쾌한 자리였다. 하지만 나는 조합원들의 처진 어깨, 굽은 허리, 쭉쭉 펴지지 않는 팔을 보면서 속이 쓰렸다. 몸이 움츠러든 것은 고된 노동이나 나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노동조합 활동은 조합원들의 몸과 마음을 활짝 펴 놓아야 한다. 그러나 금방은 되지 않는다. 내 마음이 아프다고 해서 급하게 바로 세우려 한다면 부러지고 만다.

작가 박미경

<계속 이어짐>

박미경 작가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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