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대 노총 공공부문 노동조합 공동대책위 소속 노동자들이 지난 5일 오후 여의도 산업은행 앞에서 예산지침ㆍ경영평가 요구안 쟁취와 대정부교섭 등을 요구하며 결의대회를 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이번에는 차원이 다른 것 같다."

지난 16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한국노총 전국노동자대회에서 만난 한 공기업 노동자는 최근 정부 주도로 몰아치고 있는 공공기관 구조조정 움직임에 대해 이같이 표현했다.

앞으로 닥쳐올 한파에 대한 체감온도는 노사가 다르지 않았다. 이달 14일 서울 명동 은행연합회관에서 열린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최 공공기관장 조찬간담회에 '부채 상위기관'으로 호출됐던 한 공기업 사장은 모임 후 자사 노조위원장을 만나 "장난이 아닌 것 같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실제 "파티는 끝났다"는 현 부총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기재부발 '특단의 조치'들이 속속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기재부가 추진하는 공공기관 정상화는 크게 △부채 등 경영정보 공개 △경영평가제도 개선 △공공기관운영위원회(공운위) 권한 강화 △복리후생 수준 개선으로 요약된다. 이를테면 정부는 부채가 많은 12개 기관을 중심으로 부채 규모와 성질·발생원인을 연내에 공개하고, 사업 조정·자산 매각 같은 몸집 줄이기에 나선다. 또 176개 기타 공공기관을 경영평가 대상으로 지정하고 공공기관 보수지침·임원선임을 총괄하는 공운위의 권한도 대폭 강화한다. 공공기관 퇴직 임직원 자녀에게 우선채용 혜택을 주거나 안식년·대학생 자녀 학자금지원 같은 단체협약을 솎아 내는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현오석 "공기업 부채, 과잉복지·방만경영 결과물"

노동계 "정부정책 실패가 부채 원인"


정부가 공공기관에 대한 대수술을 감행하면서 내세우는 근거는 막대한 공공기관 부채다. 현 부총리는 "현재 공공기관 상황은 민간기업이라면 몇 차례의 감원이나 사업구조조정이 있었을 정도로 심각하다"며 "현실을 직시하고 재정위험 관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기재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295개 공공기관의 총 부채 규모는 493조4천억원이다. 국가부채(902조4천억원)의 54.7% 규모다. 심각한 수준임에는 틀림없다.

정부는 공공기관 부채가 과잉복지와 방만경영의 결과로 보고 있다. 현 부총리는 "공공기관에 대한 부채·비리·임금·성과급·복리후생·단체협상·권한남용 등 A부터 Z까지 모두 살펴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과연 그럴까. 잘 알려진 것처럼 공공기관 부채의 대부분은 정부정책 실패로 떠안은 '빚' 성격이 짙다. 공공기관에만 책임을 묻기 어렵다는 말이다. 최근 국회 예산정책처의 '공공기관 중장기 재무관리계획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4대강 사업 총대를 멘 한국수자원공사의 부채 규모는 지난해 말 13조7천779억원으로, 2007년 말 1조5천755억원에서 무려 8배 가까이 급증했다. 수자원공사는 4대강 사업에 2조원의 사업비를 쏟아부었다.

142조원에 달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부채는 역대 임대주택건설, 세종·혁신도시 건설, 보금자리주택 등으로 생겨났다. 부채의 책임을 공공기관의 과잉복지와 방만경영 탓으로 돌리는 것에 공공부문 노동계가 거세게 반발하는 이유다.

김주영 공공노련 위원장은 "정부가 공공기관 노동자들에게 엉터리 누명을 덧씌워 부채의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며 "건실한 공기업에 빚 폭탄을 떠넘긴 책임자는 우리가 아니라 정부"라고 비판했다.

박준형 공공운수노조·연맹 공공기관사업팀장은 "공공기관들의 부채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난 이유가 공공기관 자체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기재부도 알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채 문제는 들러리고 진짜 속내는 따로 있다는 얘기다. 박 팀장은 "정부의 방안을 보면 공공기관 단체협약을 손보는 등 노조를 통제하려는 의지가 강하게 읽힌다"고 말했다. 정부와 여당, 언론이 기획한 '공공기관 때리기'라는 설명이다.

방만경영 질타 속 숨은 의도는?

정부의 공공기관 정책에 이상신호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달 초부터다.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이노근 새누리당 의원이 공공기관 경영정보시스템인 '알리오'에 공개된 179개 공공기관 단협을 분석해 '가족 우선채용 조항'을 문제 삼은 것이다. 언론은 '고용세습'이라며 이를 대서특필했다. 곧이어 열린 국정감사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가족 우선채용 조항'을 제기한 이노근 의원은 물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김상민 새누리당 의원도 "청년들이 공평한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며 공공기관 단협 조항을 비판했다.

화룡점정을 찍은 것은 류성걸 새누리당 의원이었다. 기재부 2차관 출신인 류 의원은 지난달 16일 기재부에 대한 국감에서 공공기관 단협 문제를 공공기관 부채·방만경영과 결부시켰다. 류 의원은 "295개 공공기관 중 단협에 일종의 고용세습인 '우선 특별채용'을 명시한 기관은 45곳, 인사규정에 유사한 내용을 명시한 공공기관은 11곳"이라며 "공기업 부채가 심각한 상황에서 불합리한 단협이 공공기관 방만경영의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서울대병원과 한국가스공사의 단협 조항을 직접 언급했다. 그러면서 기재부에는 공공기관의 단협 조항 중 사회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에 대해 실태조사를 해서 보고하라고 주문했다.

이틀 뒤 기재부는 295개 공공기관에 정부 지침과 상이한 내용과 불합리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는 단협 조항 현황을 작성·보고하라는 지침을 내려보냈다.

기재부가 '불합리한 단협'의 사례로 든 내용에는 휴가, 의료비·학자금 지원, 노조간부의 인사시 협의 등 광범위한 사항까지 포함됐다. 심지어 '적법한 쟁의행위시 민·형사 면책'과 같은 조항도 불합리한 조항이라고 규정했다. 정당한 쟁의행위에 대해서는 손배청구를 금지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밑도는 수준으로 단협을 개정하라고 강요한 셈이다.

노동계가 "정부가 국정감사를 빌미로 공공기관 단협에 개입하려 한다"고 반발하자, 기재부는 "국감과 언론에서 공공기관 단협에 대해 문제제기를 많이 하니까 도대체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 실태파악 차원에서 하는 조사"라고 선을 그었다.

국감이 끝나자 이번에는 정부가 몽둥이를 들었다. 현오석 부총리의 "파티는 끝났다" 발언 이틀 뒤인 18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정감사에서 지적된 공공기관의 방만경영과 예산낭비가 반복되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해 나가겠다"고 쐐기를 박았다. 뒤이은 대정부 질문 과정에서 정홍원 국무총리는 정부의 입장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냈다. 정 총리는 공공기관 부채와 방만경영 문제에 대해 "도덕적 해이 등 여러 문제가 혼재돼 있다"며 "노사관계에서 노조의 요구를 많이 들어주다 보니 방만하게 흐른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 포커스를 '노조의 요구', 즉 '단협'에 맞춘 것이다.

김철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위원은 "처음에는 공공기관 부채 문제를 중심으로 얘기가 됐는데, 갈수록 과다한 복리후생에 초점을 맞춰 단협 부분을 치고 들어오는 것 같다"고 우려했다.

MB도 방만경영 바로잡겠다며 단협 개악

정부가 공공기관 단협을 손보겠다고 팔을 걷어붙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공공기관 선진화'를 명목으로 공공기관 단협 개악을 시도했다. 부풀려진 보수·직급과 조직·사업 구조라는 이른바 '3대 거품'을 빼서 공공기관의 방만경영을 바로잡겠다는 이유를 댔다. 당시 대부분 공공기관에서 △노조활동 축소 △연봉제 등 성과 중심 임금체계 도입 △복지후생 축소 △인사경영 참여 배제 등을 요구했다. 기재부는 각 부처 소속 공공기관의 단협 개정 현황을 월 단위로 점검했다. 실적이 나쁘면 기관장의 옷을 벗기는 공공기관 경영평가도 실시했다. 노사관계 비중을 확대하고 과락제까지 도입했다.

노사협상은 사라졌다. 공공기관은 단협 해지를 둘러싼 노사갈등으로 몸살을 앓았다. 2009년 한 해 동안 한국노동연구원·5개 발전회사·한국가스공사·한국철도공사 등 12개 공공기관에서 단협이 해지됐다.

노동계는 이명박 정부하에서 '단협 개정 요구→거부→단협 해지→파업→대량해고'로 이어졌던 노사관계 악순환이 박근혜 정부에서 재연될까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상진 공공연맹 정책실장은 "이명박 정부 때 공공부문 노사관계 선진화 전례로 봤을 때 이번에도 비슷한 형태로 탄압 순서를 밟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 공기업 노동자는 "누가 '이명박근혜' 아니랄까 봐 탄압양상도 비슷하다"고 꼬집었다.

노동계와 전문가들은 국가정보원 대선개입 등 정치적 수세에 몰려 있는 박근혜 정부가 공공기관을 '국민 비호감'으로 만든 뒤 정국 전환을 시도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송민우 공공노련 정책실장은 "정부가 '공공기관 때리기' 단기·중장기 계획을 가지고 국민여론을 호도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김철 연구위원은 "공공기관 부채 문제나 고연봉은 때리기만 하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할 주제이기 때문에 정국전환용으로 자주 이용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벼랑 끝 몰린 공공노동자들 "이제는 못 참는다"

정부의 타깃이 명확해지면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기류도 "(정부·언론이) 때리면 맞을 수밖에 없다"에서 "더 이상 못 참겠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 그야말로 '탈탈 털렸는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는 비판이다.

LH노조 위원장인 박해철 공기업정책연대 의장은 "옛날처럼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 의장은 "이명박 정부 선진화 정책으로 이미 급여·복리 후생 등을 축소·폐지했는데 또 뭘 양보하라는 것이냐"며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이 행한 비리나 밥그릇 챙기기를 마치 모든 공기업 노동자들의 문제인 양 침소봉대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다음달 초 내년에 적용할 ‘공기업·준정부기관 예산편성지침’을 확정하기 위해 공운위를 개최한다는 방침이다. 그간 정부가 주장해 온 공공기관 구조조정·단협 변경 등 강도 높은 공공기관 정상화 방안이 마련될 것으로 관측된다.

이와 관련해 양대 노총 공공부문노조 공동대책위원회(금융노조·공공노련·공공연맹·공공운수노조연맹·보건의료노조)는 28일 현오석 부총리를 만난다. 공대위는 노정 간 정책협의를 통해 공공기관 부채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마련하자는 입장이다. 특히 공공기관 단협에 대한 부당한 개입을 중단하라고 정부에 촉구하고 있다. 현 부총리가 공대위 요구에 별다른 해법을 내놓지 않고 기존 입장을 고수할 경우 노정 정면충돌 양상이 빚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인상 공공연맹 위원장은 "정부의 말도 안 되는 단협 지침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정부가 끝까지 통보하는 식으로 나온다면 전면투쟁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말했다. 공공부문 단협 개악 논란이 연말을 뜨겁게 달굴 것으로 전망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