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노무사
철도노조 법규국장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노동조합을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자주적으로 단결하여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근로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조직하는 단체 또는 그 연합단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근로조건의 유지·개선이라는 경제적 기능이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고 이러한 경제적 기능을 수행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은 사용자에 대한 단체교섭 및 쟁의행위다.

모 회사에는 수년 동안 노동조합이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조합이 없었기에 임금인상은 제멋대로였고 심지어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임금반납을 강요받기도 했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당해 근로자와의 실질적인 협의나 동의 없는(물론 지극히 형식적인 협의나 동의가 있기는 했다) 휴일·연장근로는 일상적이었고, 연차는 회사 인터넷 게시판의 연차신청 공지에 댓글로 신청하는 순서대로 부여됐다. 기숙사 침대 아래에는 고양이가 나타나고, 보일러·에어컨이 작동되지 않아도 누구 하나 나서 시정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3명이 1조가 돼 근무했지만 인력부족을 이유로 2명이 1조가 됐고, 심지어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인턴을 투입해 함께 근무하게 했다. 당연히 노동강도는 예전에 비해 훨씬 높아졌다.

어느 날 갑자기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직원들은 누가 만들었는지는 잘 몰랐지만 그래도 노동조합이 있으면 계속 후퇴만 하는 근로조건이 좀 나아지겠지, 몇 년째 동결 중인 임금도 좀 올라가겠지 하는 기대에 가입원서를 작성했고 조합비를 납부했다.

그런데 노동조합에 가입하긴 했는데 노동조합이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려 주지를 않았다. 그러던 중 사내게시판에 단체협약이 체결됐다는 내용의 공지가 떴다. 노동조합이 체결한 단체협약이 게시돼 있었다. 조합원들의 요구조건이나 불만을 파악하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체결한 절차적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단협의 내용이 조합원들의 불만을 폭발시켰다.

임금은 별도의 협약에 따른다고 정해서 아무런 내용이 없었고, 근로시간 역시 사용자가 제정한 관련 규정을 그대로 따르도록 명시했다. 그동안 공휴일에 근무하면 별도의 휴일수당을 지급했는데, 이마저도 삭제됐다. 이전 근로조건보다 후퇴한 단협이 체결된 것이다.

경조사비 역시 노동조합이 동의해 지급이 중단됐다. 근로조건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가장 큰 무기인 단체행동권도 스스로 포기했다. 단협에 임의중재 조항을 넣어 합의해 버렸기 때문이다. 임의중재는 교섭이 결렬됐을 때 노사 일방이 중재를 신청해 분쟁을 종결하는 것으로 사용자가 신청할 경우 노동조합은 쟁의행위를 할 수 없다.

한편 사용자의 편법적인 연장근로에 항의하다 징계를 받은 조합원이 노동조합에 도움을 요청했는데, 해당 조합원은 “사용자의 인사권에 개입하기 어렵다”는 답변만 들었을 뿐이다.

다시 노동조합의 정의를 생각해 본다. 과연 지금의 노동조합은 근로조건의 유지·개선을 위한 자주적인 단결체인가. 노동조합의 기본전제인 조합민주주의가 존재하는가.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논의를 한 결과 몇몇 근로자들은 더 이상 현 노동조합에 기대를 걸지 않기로 했다. 만연한 휴일·연장근로와 갈수록 높아지는 노동강도, 그리고 근로기준법에 보장된 연차·생리휴가 등의 사용이 배제돼 있는 지금의 상황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을 스스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설렘과 약간의 두려움을 가지고 그 첫걸음을 조심스레 내딛는다. 그들은 바로 철도노조 코레일관광개발지부의 KTX 승무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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