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의
공인노무사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법규부장)

공인노무사가 된 뒤 간혹 10년쯤 못 본 대학동창이나 사돈의 팔촌에게서 뜬금없이 반가운 연락을 받는 경우가 있다. 십중팔구 각종 노동 관련 문의이고 부탁이다. 그런 이유로 얼마 전 명문대 2학년생 A양을 만났다. A양은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치솟는 등록금을 벌기 위해 휴학 후 서울 강남의 한 웨딩숍에서 사무보조로 일했다. 시급 6천원에 하루 9시간씩, 주 6일을 일하고 주당 32만4천원을 받았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최저임금을 겨우 받는 데 비해 높은 시급이 매력적이어서 그녀는 사장이 부탁하는 온갖 잡무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맡게 된 업무 중 하나가 주차도우미였다. 그러던 어느 날 주차장에서 작은 접촉사고가 있었다. 고객은 자신의 서툰 운전실력을 탓하는 대신 아무런 잘못이 없는 알바생 A양을 다그쳤다. 며칠 뒤 사장이 50여만원 상당의 차량정비 영수증을 그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지금 당장 그만두면 일주일치 주급을 안 주는 걸로 무마해 주겠다고 했다. 단골이던 고객이 'A양이 나가지 않으면 발길을 끊겠다'고 엄포를 놓았기 때문이란다. 처음 A양은 50만원이 너무 아찔해 30만원의 주급을 포기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단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억울함이 커져 결국 ‘노동운동’에 관심이 많은 선배를 향해 전화기를 들었다.

A양과 첫 상담. 나의 첫마디는 “주휴수당과 연차수당도 못 받은 데다 심지어 이건 부당해고”라는 것이었다. A양은 ‘외계어’를 대하는 눈빛이었다.

그때부터는 상담이 아닌 노동법 강좌가 시작된다. “주휴수당은 근로기준법 제55조에 나오는 건데요….” 그러자 그녀는 신세계에 눈을 뜬 듯했다. 그러나 곧이어 “사장에게 일단 청구하시고 안 주면 노동부에 진정합시다”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집이 어려워 졸업 후 곧바로 취업해야 하는데 진정 같은 거 하면 빨간딱지 붙는 거 아니냐”고 주저했다.

필자가 일하는 민주노총 서울본부 부설 노동법률지원센터는 연간 3천여건(월평균 250여건)의 노동상담을 처리하고 있다. 엄청난 양이지만 상담내용은 A양 사건보다 단순한 문제들이 상당수다. 한마디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최소한의 법적 권리인 근로기준법을 알고 있었다면 당하지 않을 억울함이라는 거다.

2011년 서울시교육청이 중·고등학생들에게 노동인권교육을 시행한다고 발표하자 경제단체들은 “이념적 편향성”, “반시장경제질서 유발” 등을 이유로 반대했다. 더 나아가 보수단체들은 “빨갱이 교육”이라며 맹비난을 퍼부었다. 헌법에 노동 3권이 노동자의 권리로 명시돼 있는 나라에서 도대체 이해가 가지 않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43년 전 돌아가신 전태일 열사가 지하에서 통곡할 일이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필자가 속한 노동법률지원센터는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노동의 권리를 알려 내기 위해 ‘시민노동법률학교’를 개최하고 있다. 노원·구로·은평구 등 서울 각지에서 그야말로 플래카드 하나 걸고 참여자를 모집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저녁 7시부터 2시간씩, 4~6주간 진행되는 강좌에 회당 평균 50여명의 시민들이 노동법을 배우기 위해 모여들었다.

강의 평가도 놀라웠다. 이제야 알게 된 자신의 권리에 가슴을 치기도 했고, 왜 이런 걸 나이 50에 알게 됐는지 한탄했다. 그러면서도 노동하는 스스로를 뿌듯해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국민이 일해서 먹고살아야 하는 나라, 그럼에도 공교육 과정에 '노동인권'이 한 자락도 들어 있지 않는 우리의 현실에서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노동법 교육을 ‘빨갱이 교육’으로 몰아가는 우울한 현실이지만 일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할 노동법 교육을 ‘필수’로 정하는 것, 이제는 바꿔야 할 필수과제다. 오늘도 필자는 밀려오는 시민노동법률학교 강좌 문의에 시달리며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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