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신분에서 계약으로’ 봉건제를 폐지하고서 근대의 세상이 열렸다. 신분에 의해서 물건에 대한 권리, 사람에 대한 권리가 주어지고 그 권리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정해지던 봉건제의 세상은 계약자유의 선언으로 종말을 고했다. 시민의 혁명과 전쟁 시기에 권리장전과 인권선언은 봉건지배의 물적·인적 지배를 추방할 수 있었다. 계약자유의 원리로 그것을 뿌리째 이 세상에서 추방할 수 있었다. 계약은 근대의 무기였다. 인민이 국가의 시민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근대국가질서는 사회계약론과 그 아류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돼 왔고, 국가권력의 장이 아닌 근대사회질서는 계약에 의해 정당성이 부여돼 왔다. 계약은 연장된 근대인 오늘도 권력과 권리의 정당성 근거이고 우리의 세상을 재생산하고 있다. 이에 대해 신분은 더 이상 오늘 권력과 권리의 정당성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이를 이유로 한 차별은 국가법질서가 용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신분을 앞세운 질서는 사회적 폐습과 불의로 타파돼야 했던 것이고(헌법 전문), “누구든지 …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하고,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헌법 제11조 제1항, 제2항) 근로관계에서도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근로조건에 대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하고”(근로기준법 제6조), “노동조합 조합원은 어떠한 경우에도 고용형태, 신분에 의하여 차별대우를 받지 아니하도록 정하고 있다.”(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9조)

2. 근대의 세상에선 계약에 의해서 권리의무가 정해진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물건에 관한 권리, 즉 소유권만 가지고 있다면 그 소유자가 자신의 노동에 의해서만 그 권리를 실현할 수 있을 뿐이다. 아무리 거대한 규모로 소유권을 가진 자라도 자신의 노동이 미치는 범위까지만 물건에 관한 권리를 향유할 수 있다. 그 노동조차도 없으면 소유권은 그저 등기부등본의 갑구에 아무개의 것이라고 기재돼 있는 권리에 지나지 않는다. 잠자고 있는 권리에 불과하다. 그것으로는 사람의 세상에서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지배자가 될 수가 없다. 그러니 사람에 대한 권리를 통해서만 소유권은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가 있다. 소유권은 다른 사람의 노동에 의해서 이 세상에서는 자본으로서 존재할 수 있고, 그것으로 재생산될 수가 있다. 다른 사람의 노동을 자신의 사업에 사용하기 위해 지배하는 권리는 사람에 대한 권리다. 이 세상에서 그것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지배하려는 근로계약에 의해서 확보하게 된다. 이로써 물건에 대한 지배가 사람에 대한 지배로, 소유권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자본으로 전화된다. 근로계약은 이렇게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자본의 재생산과정의 일부가 됐다. 여기서 자본의 재생산에서 신분은 없다. 신분은 아무것도 아니다. 계약만이 자본을 재생산해서 세상의 주인이 되게 한다. 그러니 자본의 세상인 근대는 봉건의 세상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서 설 수가 있었다. ‘신분에서 계약으로’를 전면적으로 선언하고서 세워질 수가 있었고, 오늘도 그렇게 세상은 재생산되고 있다.

3. 그래서 근대의 법은 계약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사회질서의 기본원리로 선언하고 있다. 특히 그 계약이 신분으로 될 수도 있는 근로계약에서는 특별히 노동자와 사용자의 지위가 인신구속이 되는 신분제도로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법적 규제를 뒀다. 근로기준법 제16조에서는 “근로계약은 기간을 정함이 아니한 것과 일정한 사업의 완료에 필요한 기간을 정한 것 외에는 그 기간은 1년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1년을 초과하는 기간으로 근로계약 기간을 정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1년이 도과하면 노동자는 언제든지 해지할 수가 있다.(대법원 1996.8.29 선고 95다5783 전원합의체 판결)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에 자유롭게 그 노동자가 사용자의 사업장에서 1년을 초과해서 장기간에 걸쳐 근로제공하도록 한 근로계약의 효력을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이미 근로계약은 1년을 초과하는 기간으로 존재한다. 근로관계의 장기간 존속보호, 즉 고용안정이 자신의 요구가 돼버린 오늘 노동자는 오히려 종신노동을 희망한다. 입사할 때 단 한 번 체결한 근로계약으로 자신의 노동력이 다 소진할 정년퇴직 때까지 근무할 수 있는 정규직의 신분이기를 욕망한다. 오늘 노동자의 욕망은 근대의 원리를 버렸다. 위 근로기준법 제16조는 1년을 초과하는 기간으로 정한 근로계약은 노동자는 해지할 수 있지만 사용자는 1년이 경과하였음을 이유로 근로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는 법해석에 의해서 이러한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 보장해줬다.(대법원 1996.8.29 선고 95다5783 전원합의체 판결) ‘신분에서 계약으로’를 선언했던 근대의 법은 근로계약에 의해서 ‘계약에서 신분으로’ 근로관계가 변화될 것을 염려했던 것인데 이런 법의 취지에 가장 부합하는 근로계약은 단시간·일용직·기간제·계약직 등 비정규직 근로계약이고, 그것은 결코 노동자의 희망이 아니다. 근로계약에 의해서 한 사업장에서 종신토록 근무하는 것으로 정하고 있다고 해도 여기서 해방돼서 자유를 찾겠다고 노동자는 계약자유를 주장하며 ‘신분에서 계약으로’를 자신의 구호로 외치지 않는다. 어찌 보면 학력과 자격을 취득하고서 보다 나은 직장에 취업하겠다고 학교와 학원에서 학생으로서 사력을 다하는 것도 이미 우리의 세상은 1년을 초과하는 기간으로 한 근로계약의 체결하고자 하는 의지에서다. 근로계약은 이미 ‘신분에서 계약으로’를 넘어섰다. 그것은 ‘계약에서 다시 신분으로’ 안정된 정규직의 신분을 위한 욕망이 춤추는 신분계약이 된지 오래다. 오늘 근로계약, 어쩔 수 없이 신분을 만드는 계약이다.

4. 아무리 근로계약을 신분계약이라고 평가해도 우리의 경우는 유별난 것이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규직 사이에서도 차별이 존재한다. 우리의 경우 그가 입사할 때 생산직이면 생산직 노동자로 정년퇴직한다. 그가 정년퇴직 때까지 근무하는 회사에서 그는 다른 무엇도 아닌 생산직 노동자일 뿐이다. 회사의 운영은 그가 결정할 무엇이 아니다. 그는 정해진대로 생산공정에서 로봇과 함께 작업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로봇이 수명을 다하면 폐기되고 교체되는 것처럼 그는 노동력이 다 소진할 때가 되면 퇴직한다. 회사의 운영은 주식회사의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 이사 등 임원이 하거나 그 임원에 복종해서 사무관리직 노동자가 하는 일이다. 이 나라에서는 유별나게 뚜렷이 이렇게 구분돼 있다. 다른 길은 없다. 대졸사원, 즉 사무직 노동자로 입사해야 그는 회사의 운영에 관여하는 관리자, 임원이 되는 사다리의 맨 바닥에 자리하게 된다. 생산직, 기능직이면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곳은 그의 자리가 될 수 없다. 물론 생산직 기능직이 중심이 돼서 조직된 노조에서는 다르다. 노동자로서 권리, 근로조건에서도 현저히 다르다. 근로기준법이 정한 주 40시간 노동제는 사무직 노동자에겐 자신의 노동시간을 규제하는 노동제이지만, 생산직 노동자에겐 법정수당의 산정기준시간에 불과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분명히 우리의 회사는 생산직과 사무직으로 노동자의 신분을 가르고 있다. 생산직과 사무직으로 근로계약서를 달리 체결하고서 엄연히 신분이 다른 노동자가 하나의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심지어 사업장에 따라서는 아무리 그의 근속이 얼마라도 사무관리직은 지시하고 생산직·기능직 노동자는 복종하고 있다.

5. 봉쇄된 처지를 뚫고자 하는 노동자의 욕망이 솟구칠 때 그것을 노동자집단의 것으로 조직할 수 있다면 노조·노동자정당 등 노동자권리를 쟁취하기 위한 것으로 발전할 수가 있다. 그것조차도 현실에서 작동하지 않을 때는 개인의 출세를 위한 경력으로 노조 자리든 뭐든 활용될 수가 있고, 그것은 노동자조직·노조의 타락을 부른다. 이 나라에서 수많은 노조간부들이 그러한 길을 걸어왔다. 바야흐로 지금은 노조는 선거의 계절이다. 금속노조 사업장들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업장 노조조직에서 선거가 실시되고 있다. 사업장 노조조직의 선거는 많은 후보들이 나와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2013년 가을 노조 선거의 특징이다. 이미 선거가 치러진 지엠지부도, 선거를 치르고 있는 기아차지부도 그렇다. 이러한 양상은 조만간 후보등록을 마치고서 선거를 하게 될 현대차지부의 선거에서도 나타날 조짐이다. 생산직 노동자가 중심이 된 사업장 노조조직의 선거는 근로계약이 신분계약인 이 자본의 세상에서 생산직과 사무직을 가르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는 질서를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를 위한 것으로 세우기 위한 실천 공약을 두고서 경쟁해야 한다. 그것이 근로계약이 ‘계약에서 다시 신분으로’ 전개돼 버린 이 신분사회를 넘어서고 나아가 자본의 재생산의 일부로만 기능하는 ‘신분에서 계약으로’ 하는 근로계약의 근대질서를 넘어서 노동자집단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노동자의 조직적 무기로서 노조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이것이 현대의 신분사회에 대한 노동자의 대답이어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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