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너무한다 싶었다. 국가정보원 댓글사건으로 확인된 불법 대선개입과 은폐, 속속 드러나는 거짓말은 충격의 시작일 뿐이었다. 뒤이은 국정원발 공안정국은 마치 유신의 부활을 알리는 서곡과 같았다.

연이은 사건을 지켜보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대표신부 나승구)은 엄습하는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사제단이 결성된 7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엄중한 시국은 사제단을 거리로 세웠다. 추석연휴가 막 끝난 지난 23일 서울광장에서 국정원 해체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국미사를 개최했다. 나승구(50·사진) 대표신부는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가까이 온다”며 “일부 언론과 국정원 발표, 청와대 행동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담대해지자”고 강조했다. 27일 오전 서울 장위1동성당 선교본당에서 나 신부를 만났다.

박정희 정권 때인 74년 결성된 사제단은 70~80년대 유신 군부 독재정권과 맞서 싸웠다.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폭로하며 6월 민주항쟁의 계기를 만들었다. 최근에는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광우병 쇠고기 파동·4대강 사업·용산참사·쌍용차 정리해고 사태 등 주요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시국미사를 열고 있다.

"독재·유신 부활이 이런 거구나 … 위기감 높아"

- 국정원 해체를 주장하는 시국미사를 여는 게 쉽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현 시국에 대해 엄혹한 시기에 잡혀가고 고문당하셨던 선배 신부님들의 걱정이 크셨습니다. 저희들도 선배 신부님들에게 전해 들었던 얘기들이 현실로 다가왔다는 걸 느꼈죠. 예전에 긴급조치가 발표되고 인혁당·민청학련 등 공안사건이 이어지면서 신부님들이 잡혀가서 고문받고 그랬잖아요. 외국신부님들은 추방을 당했고.
요즘 시대에 독재라는 건 저 멀리 아프리카 어느 나라 얘긴 줄만 알았어요. 공안탄압이라는 것도 유물화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현실로 다가왔더란 말입니다. 그나마 세상의 얘기를 진실하게 전한다는 신문조차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느끼니까 ‘아, 독재·유신 부활이 이런 거구나. 현실이 그렇다면 우리도 같은 길을 가야 하지 않겠나’라고 생각했습니다."

- 시국미사의 제목이 '거짓의 암흑에 맑은 빛으로 답하라'인데요.

"거짓을 행한 사람들은 이를 덮으려고만 합니다. 그걸 명확하게 보여 주는 장면을 국정원 국정조사 때 봤습니다. 저렇게 덮으려고 애쓰는 걸 보니 저게 진짜겠구나 싶더라고요. 그들이 덮으려고 하는 어둠을 조금만 걷어 낸다면 진실이 드러날 수 있겠지요.
진실을 감추기 위해 허둥대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네들은 자신들이 성공했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아,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할까요. 하지만 더 안타까운 건 거짓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실제 사람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기 시작했어요. 어쩌면 이렇게 독재가 일상화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래서일까요. 지난 광우병 쇠고기 사태 때보다 민주주의 훼손이 심한데도 시민들의 참여나 분노 지수는 그때보다 낮은 것 같습니다.

"현장과 일상이 많이 차단돼 있잖아요. 소위 공중파 언론들이 현장을 찾지 않고,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하지 않으니까 그냥 모르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겠구나 싶어요. 뭔가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실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잘 모르는 거죠.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은 명백히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잘못된 일이니까 내가 나서지 않아도 바로잡힐 거야'라는 막연한 믿음이 작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정권이 불리할 때마다 이런저런 공안사건이 터지는데요. 이른바 '이석기 내란음모 사태'는 어떻게 보시나요.

"공안몰이 대상이 된 통합진보당으로선 당장 안타깝고 힘든 시기를 보내겠지만 시간이 지나고 법정에서 이 사건이 다뤄지면 정말 별것 아닌 것 가지고 그 난리를 떨었구나 할 거예요. 토끼가 떨어지는 열매 소리를 듣고 온 세상을 전쟁통으로 만들었듯이 해프닝 정도로 끝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박근혜 정부 7개월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대통령 스스로가 대통령에 대한 자기인식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대통령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대통령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고민이 너무 없는 것 같아요.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 할 것 없이 모두 해당하는 얘깁니다. 어떻게든 흐름에 맞춰 가려고만 하니 늘 수세적이에요. 대통령직을 통해 국민에게 봉사하는 게 아니라 자꾸 방어하는 쪽으로만 가는 게 항상 안타까웠어요.
국민을 위해 발에 땀이 나도록 뛰어다니는 정부가 있다고 칩시다. 정부 정책으로 인해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국민은 ‘열심히 하다 보면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다’고 받아들일 겁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그렇게 일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평가할 게 없습니다. 그분은 취임하고 나서 외국에 몇 번 다녀온 거 말고는 없어요. '아, 우리 대통령이 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 않는 내용 없는 대통령이랄까요."

- 박근혜 대통령이 한복을 널리 알리고 있다는 평가도 있는데요.

"한복을 알리는 것도 귀하고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소중한 일들이 태산같이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네요.(웃음)."

- 새누리당이 대선에서 약속한 쌍용차 국정조사는 감감무소식입니다.

"노동자들은 굉장히 공허할 겁니다. 쌍용차 국정조사 약속을 이행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으니까. (정부가) '노동자는 이것을 고치고, 회사는 이걸 고치면 같이 일할 수 있다'는 조합조차 못 만들고 있어요. 답답한 노릇입니다."

"쌍용차 해고자들 죽이고 갈 건가"

- 사제단은 지난해에는 매주 월요일, 지난 4월부터는 매일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위한 미사를 진행하고 있는데요. 쌍용차 문제에 집중하는 이유가 있나요.

"2009년 용산참사가 벌어지고 나서 용산가족들과 함께 남일당을 지킬 때였습니다. 경찰이 용산 진압과 비슷한 방식으로 컨테이너를 이용해 노동자들을 진압하는 걸 봤어요. 그리고 같은해 하반기부터 4년간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로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습니다. 어쩌면 그분들의 죽음이 우리를 부른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주 월요일 미사가 매일 미사로 바뀐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입니다. 올해 4월4일 분향소가 철거되고 화단이 세워지면서 대한문에 어떤 암운이 드리워지는 걸 봤습니다. 대한문 분향소가 설치된 뒤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분들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분향소가 철거되니까 그곳을 지키던 분들의 얼굴이 굉장히 비장해지고 어두워졌습니다. ‘막장’이랄까요. 우리가 같이 있어 주면 또 다른 죽음은 막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서 매일 미사를 하게 된 거예요.
저희는 생명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잖아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생명이 사회적인 압력에 의해 죽어 간다면 사회의 일원인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 책임을 면피하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함께할 겁니다."

- 매일 미사 후 노동자들의 표정이 달라지던가요.

"많이 달라졌는데, 이제 또 단식을 하잖아요. 추석연휴가 지나고 나서 이분들이 ‘정말 안 되나’ 이런 생각을 하신 것 같더라고요. 정상적이라면 올해 정기국회에서 쌍용차 문제가 다뤄지고 어떤 방안이 나와야 하는데, 3자회담이 깨지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얼굴이 어두워진 것 같아요.
아마도 ‘무의미한 단식을 하는 게 아닌가’, ‘언제까지 싸워야 하지’, ‘정말 죽어야 되나. 죽으면 이 문제가 풀리려나' 이런 생각을 하시는 것 같아서 요즘 대한문 가기가 겁납니다. 미안하고 마음도 무겁구요. 정말 다 죽이고 갈 셈인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정부도 괴롭겠죠.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되면 좋을 텐데 마음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노사 양측이 모두 말을 안 듣는다는 생각도 하겠죠. 그런데 정부의 역할이 뭔가요. 말을 듣게 하는 게 아니라 양쪽이 대화를 하게 만드는 겁니다. 대화의 산물이 나오게끔 끊임없이 중재하고 조절하는 것이죠. 몇 번 만나고 나서 '내 할 일 다했다, 이제 내 소관이 아니다'라고 손 놓는 건 책임 방기일 뿐입니다."

- 일부에서 '종북신부'니 '정치신부'니 매도하기도 하는데. 괜찮으신가요.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정말 그분들이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싶어서, 우리나라와 국민을 진짜 사랑해서 거기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는 신부들을 향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다면 그거야말로 아름다운 일이죠. 그러나 그분들이 저나 같은 일을 하는 신부들을 얼마나 알까요. 모르면서 비난을 하는 것은 굉장히 우스운 일입니다. 현실과 동떨어지게 되는 법이죠."

- 현 시국을 힘들어하는 국민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여유 있게 봤으면 좋겠어요. 대다수 국민이 대통령 임기보다는 오래 살지 않겠어요. 하나하나에 스스로가 쌓아 온 가치나 귀한 것들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금방 뒤바뀔 문제들이죠. 불안하니까 조그만 얘기에도 끌려다니는 것 같아요.
국민이 주인이라는 마음을 가진다면 청와대가 이렇게 결정했기 때문에 힘들고, 국정원이 이렇게 나쁜 짓을 해서 힘들고 그러진 않을 겁니다. 그들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할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우리 스스로 간직했으면 좋겠어요. 그럴 때 올바른 저항도 일어날 것이고 올바른 국민의 모습도 있겠다 싶어요.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가까이 오니까요. 일희일비하지 말고 담대하게, 여유를 가졌으면 합니다."

- 끝으로 박근혜 정부에 조언을 하신다면.

"아까 말했듯이 내 역할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편 내 편 가를 게 아니라 모두가 자기 국민이라는 생각을 해야죠. 누군가 '독재자의 딸'이니 '유신공주'니 비판해도 대통령이 자기에게 맡겨진 역할을 성실히 수행할 때 그 사람은 그냥 '박근혜'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마 '박정희 때문에', '김기춘 때문에', '시대가 그랬기 때문에'라는 구차한 얘기가 계속 따라붙을 겁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역할을 잘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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