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배우 고수가 분한 장태주가 방파제를 덮친 파도 속으로 뛰어들면서 SBS 월화 드라마 <황금의 제국>은 막을 내렸다.

드라마 속에서 장태주는 늘 물기 없는 웃음을 흘리며 “돈을 벌려면 땀을 흘려선 안 된다. 남의 땀을 훔쳐야 한다”고 말한다.

장태주의 아버지는 신도시 개발에 밀려 억울하게 죽는다. 판자촌에서 태어나 자란 장태주는 어려운 사람을 돕는 판사가 되려는 가난한 법대생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장태주를 괴물로 만들어 버렸다. 시멘트 회사로 시작해 굴지의 재벌그룹으로 성장한 성진그룹을 먹기로 하고 스스로 돈의 노예가 돼 간다.

압축성장기의 한국 사회를 옮겨 놓은 듯한 <황금의 제국>의 줄거리는 대부분 식탁에서 이뤄졌다. 식탁은 가족들의 단란한 대화 공간이 아닌 살육이 오가는 전장이다. 상석에 앉은 최동성(박근형) 회장 말 한마디에 계열사 사장의 목이 날아간다. 장태주는 각고의 노력 끝에 최 회장의 딸 최서윤(이요원)과 결혼했지만 부부는 정상적인 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이렇게 TV면 켜면 재벌과 만나야 한다. 뉴스에도 재벌, 드라마에도 재벌, 성공시대 같은 교양프로그램에도 재벌들만 나온다. 재벌은 TV를 보는 사람들과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다. 왜 이럴까.

드물게 드라마에 나오는 분식집 사장이나 구멍가게 주인 같은 자영업자들은 지지리 궁상맞게 그려지는 건 기본이고, 늘 병신과 머저리 중간쯤의 성격으로 묘사된다. 자영업자나 중소기업주가 주인공인 경우는 거의 없다. TV드라마의 주인공은 대부분 재벌 집 아들딸들이다. 서민 가정의 아들딸들이 주인공이라도 끝에 가선 늘 재벌이 된다.

지난달 13일 서울 여의도 렉싱턴호텔에서 이상한 간담회가 열렸다. '지역·중소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개선과 TV드라마'가 그 주제였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산업통상자원부 관료들과 연출자(PD)·작가 등 TV드라마 제작진이었다.

산자부는 온통 재벌 이야기뿐인 TV드라마에 호소하고 지역·중소기업의 부정적 인식을 바꾸려고 이런 간담회를 열었다고 했다.(전자신문 8월14일 6면)

이날 간담회는 최근 방영되는 TV드라마 대부분이 서울 소재 대기업 중심으로 진행되는 점을 개선하기 위해 마련됐다. 간담회를 준비한 산자부는 국내 지역·중소기업에 대한 사회 전반의 부정적 인식 때문에 청년구직자가 취업을 기피하는 현상까지 있다고 지적했다.

이 자리에서 정만기 산자부 산업기반실장은 “드라마의 막대한 파급효과를 고려해 지역·중소기업을 긍정적으로 그리는 사례가 많아지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간담회에 참석한 한 PD는 “90년대 TV드라마가 진취적 커리어우먼 묘사로 여성들의 의식 변화에 기여했듯이 중소기업 배경 드라마로 긍정적 인식을 확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TV드라마에 중소기업들이 종종 등장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런 식의 억지 연출방식이 대·중소기업 상생과 양극화 해소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중소기업의 성공신화를 가상으로라도 만들어 내겠다는 정부 관료들과 방송사의 웃지 못할 노력보다는 현실 세상에서 중소기업의 상생기반을 구축하는 게 우선이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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