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현대자동차에서 불법파견 특별교섭은 아직도 노사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이와 별개로 사용자 현대차와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비정규직 해고자 복직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언론에 보도됐다. 해고자 복직 규모를 둘러싸고 노사의 생각은 다르다. 사용자 현대차는 114명이,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160여명이 복직 대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사용자 현대차는 대법원이 울산공장에 대한 불법파견 판결을 내렸던 2010년 이후 해고자들이 복직대상이라 하고 있다. 2010년 11월 비정규직지회가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요구하면서 25일간 울산1공장 점거농성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해고자들 위주로 복직시키겠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현대차비정규직지회는 현대차에서 불법파견 논란이 시작된 2003년 이후 노조활동 과정에서 해고된 자까지 복직 대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2. 해고자. 사용자로부터 사업장에서 추방된 자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임금을 목적으로 사업이나 사업장에 근로를 제공하는 자다(근로기준법 2조 1항 1호). 이에 관해서 우리의 법원은 사용자와의 사용종속관계, 즉 사용자의 지휘·명령에 복종해서 사용자의 사업(장)에 사용되는(일하는) 자라고 판결해 왔다(대법원 2006.12.7 선고 2004다29736 판결 등). 뭐 복잡하고 어렵게 말한 거 아니다. 간단명료하게 정의한 것이다. 사업장에서 그는 자유가 없이 일하는 자라고 선언한 것이다. 공장·사무소 등 작업장에 갇혀서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복종해서 일하는 자라는 거다. 그러니 간단명료해진다. 노동자가 갇혀 자유를 박탈당하는 곳이니 작업장은 노동자의 감옥이다. 근로시간은 노동자의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상품으로 판매된 사용자의 시간이다. 형법은 형벌 중 감옥에 갇혀 노역하는 것을 징역이라 한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지만 노역하지 않는 형벌을 금고라고 한다.(형법 67조, 68조). 근대의 형벌제도는 징역형을 주된 형벌로 한다. 따라서 근대의 감옥은 가둬서 노역을 시키는 징벌소고 교화소다. 징역은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자유형이다. 자유형은 감옥에 가둠으로서 자유를 박탈하는 형벌이다. 판사의 판결문에 의한 자유의 박탈이다. 이에 대해 근로시간은 사용자와 체결한 근로계약에 의한 자유의 박탈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자유의 박탈이란 점에선 차이가 없다. 이것이 이 자유의 세상에서 다른 계약과는 다른 근로계약의 비밀이다. 그럼 해고자는, 근로계약으로 인한 자유의 박탈에서 벗어난 자, 사용종속관계로부터 해방된 자, 작업장이리는 근대의 감옥에서 석방된 자라고 불러야 하겠다. 해고자·노예가 아닌 근대의 자유인, 그러나 그는 근대의 감옥을 찾아 헤맨다. 그리고 노동자는 작업장에 갇혀 노동하는 자이니 우리 세상의 자유인·해고자는 근대의 감옥에서 징역을 꿈꾼다.

3. 그랬다. 근대 이후의 시계는 노동하는 자를 노동자로 그의 자유를 박탈하기 위해서만 움직였다. 노동자에겐 세상의 모든 시계가 그렇게 돌아갔다. 노동하는 자의 자유를 빼앗고서 세상은 재생산될 수 있었다. 자본의 세상이든, 위대한 노동의 이름을 갖다 붙인 세상이든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자유가 박탈돼야 했다. 생산의 주역이든 위대한 노동의 군대든 세상의 주인이든 뭐라 불려지든 작업장은 그의 자유를 빼앗고서 돌아갔다. 효율적이고 거대한 생산력 발전은 기술적이고 거대한 규모로 노동자들의 자유가 박탈되는 것을 의미했다. 어찌 보면 근대 이후의 세상은 노동자의 빼앗긴 자유로 세워 온 것이었다. 오히려 노동자 이전, 근대 이전의 세상은 아직은 노동하는 자에게 조금의 자유가 있었다. 비록 영주의 장원에서 일하는 농노라도, 지주의 농지에서 일하는 소작인이라도 영주와 지주의 작업장에 갇혀 그들의 지휘·명령에 복종해서 일하지는 않았다. 거기선 농노와 소작인의 자유의 박탈로 그 세상을 세우진 않았다. 오히려 일하는 자의 자유의 확대로 그 세상은 새롭게 발전해 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일하는 자의 자유의 확대가 발전이었던 것이 일하는 자의 자유의 박탈이 발전인 세상으로 바뀌었다. 자유의 세상이라는 근대는 그렇게 일하는 자의 자유를 박탈하고서 찾아 왔다. 자유가 절대이념인 근대의 세상에서 계약 자유의 원칙으로 사용자와 근로자와의 계약, 근로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계약, 즉 근로계약이 체결됐다. 무엇이었을까. 근대 이전에 그나마의 자유를 누리던 일하는 자가 어쩌다 스스로 자유를 빼앗기는 계약을 체결하게 된 것일까. 농노와 소작인은 일하는 자로서 농지에 자신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경작권이든, 소작권이든, 뭐라 부르든 그 권리로 그는 노동자와는 다른 자일 수 있었다. 비록 영주와 지주가 가진 농지에 대한 권리에 반항할 수 없는 것일망정 그것으로 그는 그나마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빼앗겼다. 그는 그것을 빼앗기고서 근대인, 노동자가 됐다. 근대인은 자유인이라고 이 세상의 법을 선언했지만 그는 진정으로 자유인이 될 수가 없었다. 일하는 자는 그나마의 자유조차도 박탈된 채 오직 생존을 위해 임금을 지급받기 위해 사용자가 시키는 대로 근로를 제공해야 하는 노동자가 됐다. 사실 노동자를 일사불란하게 편제해서 사용자가 정한 규율에 따라 복무하는 노동조직은 군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노동운동조차도 그것이야 말로 자본의 세상을 넘어설 수 있는 노동의 힘이라고 말했다. 어찌 보면 노동의 자유를 노래하지 못한 채 노동운동은 지금까지 달려왔던 것이다. 작업장의 소유를 자본의 것에서 협동적 소유라는 공유로, 더 나아가 인민적 소유라는 국유로 전환해내는 것만이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 노동운동이 가야할 길이라고 선언하고 그것을 이 세상에서 실현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사회주의에서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자였다. 노동자가 주인이라고 위대한 노동자라고 수도 없이 외쳤지만 그는 작업장에서는 자유가 박탈된 채 일하는 자였다. 그는 여전히 근대의 시간에서 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공유와 국유라는 현실사회주의의 소유관계에서 일하는 자, 그가 행사할 수 있는 권리는 무엇이었을까. 생산의 사회적 성격에 걸맞는 소유형태라고 내세웠지만 거기서 권리는 모두의 것이라서 일하는 자, 그가 행사하는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가 주인이라고 선언했지만. 노동자는 여전히 자유인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자유를 말하고 있지도 않다.

4. 지금 현대차에서 복직논의의 대상자는 사내하청업체 소속 해고자들이다. 현대차 공장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현대차를 사용자라고 부르지 못하는 사내하청업체 근로자, 비정규 노동자로서 불법파견 정규직화를 주장하며 투쟁하다 해고된 자들이다. 자유가 박탈된 노동자 중에서도 달리 취급당해서 차별받다가 해고된 자들이다. 그들은 해고돼서 더 이상 자유가 박탈되지 않아도 된다고 자유 만세를 외치고 있지 못하다. 어디 그들뿐인가.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누구라도 해고됐다고, 실직됐다고 자유 만세를 노래하고 있지 못하다. 작업장에 관한 어떠한 권리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는 오직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고서야 생산의 일부를 임금으로 지급받을 권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니 이 세상에서 자유는 그의 것이 아니다. 2010년 7월 최병승 사건에서 현대차 자동차생산공정에서 사내하청근로가 파견근로라고 대법원이 판단했다. 그러니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들은 자신의 진짜 사용자 현대차를 사용자라고 부를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하다 현대차가 듣지 않아서 파업 등 노조활동을 하다가 해고된 것이라고 판결한 것이다. 투쟁하다 해고됐다지만 그들은 노동자의 자유를 외치다 해고된 것이 아니고 진정으로 자신의 자유를 빼앗는 자 현대차가 사용자인 거라고 주장하다 해고됐던 것이다. 2010년 7월 최병승 사건의 대법원 판결이 있고 나서야 그것을 요구하고 주장하다 파업 등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것이 아니다. 2003년부터 사내하청근로가 불법파견이라고 주장하며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활동을 하다가 수많은 비정규 노동자가 해고됐다. 현대차를 상대로 이를 주장하며 사용자로서 교섭을 요구하고서 이를 관철하기 위해 파업 등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됐다. 현대차 사내하청근로는 파견근로가 아니니 그 해고는 정당한 것이라고 현대차는 주장했다. 그런데 2007년 6월 서울중앙지법은 현대차 자동차생산공정에서 사내하청근로는 파견근로라고 최초 판결했고, 2010년 7월 대법원도 위와 같이 최병승 사건에서 동일하게 판결했다. 그리고 현대차 자동차생산공정에서 사내하청근로는 2003년 이전부터 있었다. 그 당시는 아직 불법파견이 본격적으로 문제가 되기 전이라서 지금보다 훨씬 더 혼재 정도가 심하고 작업지시 등에서 파견근로로 판단될 요소들이 뚜렷했다. 최병승은 2002년 3월 현대차 사내하청업체 소속 근로자로 입사해서 2005년 2월 해고됐다. 대법원은 입사한 지 2년이 도과된 2004년 3월부터 최병승은 구파견법의 고용의제조항에 의해서 현대차 근로자라고 판결했다. 그러니 최병승이 현대차 근로자라고 한 대법원 판결은 동일하게 근무하다 해고된 자들도 현대차 공장에서 불법파견근로에 제공된 자인 거라고 판단한 셈이다. 현대차에서 불법파견 관련 해고자의 복직 논의를 한다면 최병승과 같이 근무하다 불법파견 철폐, 정규직화 등을 주장해서 노조활동을 하다 해고된 자들도 그 대상에 포함되는 것이 당연하다. 현대차에 근로를 제공해고서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그들도 보장돼야 마땅하다. 이것은 근대의 시간에서 보장된 노동자로서 최저수준의 권리라고 봐야 한다. 이거라도 노동자는 교섭과 투쟁으로 권리로서 쟁취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복직 논의하고 있으니 이 세상에서 노동자의 자유와 권리는 아직 논의가 본격 시작되지 않았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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