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현
공인노무사
민주노총법률원 대전충청지부

수개월 전 소규모 사업장에서 일하는 버스 노동자들이 실근로시간에 못 미치는 법정수당을 지급받아 왔음을 확인하고, 회사에 미지급된 임금의 지급을 요구했으나 일언지하에 거부당하자 어쩔 수 없이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후 다시 만난 자리에서 그들은 재판에서 승소했고, 회사가 1심 판결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결과가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그런데 한 달 가량 지나 다시 찾아온 그들은 고민스런 표정이 역력했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근로계약서를 다시 작성할 것을 요구하면서 재작성을 거부할 경우 징계 등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까지 했다는 것이다.

회사가 서명을 요구했다는 새로운 근로계약서의 내용을 살펴보니 전과 동일한 시간을 근무시키면서도 각종 수당을 탈법적으로 미지급할 근거를 마련하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었다.

회사는 버스운행시간 또는 대기시간 등 명백한 근로시간을 휴게시간으로 간주하는 방식으로 실근로시간을 줄여 놓은 다음 연장·야간수당 등 법정수당은 미리 책정해 놓은 임금 안에 모두 포함되는 포괄임금제 방식을 취한다고 근로계약서에 기재해 놓았다.

법원에서 법정수당을 미지급한 것으로 판단하게 만든 사실관계들을 모두 무력화하려는 목적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근로계약서에 정한 근로시간보다도 실근로시간이 더 적은 경우에는 그에 상당하는 수당액을 포괄임금액에서 공제할 것이라고 덧붙여 놓은 것이다.

결국 법에 정한 임금·수당보다 적게 지급하기 위해 포괄임금을 적용한다고 했다가 법에 정한 임금·수당보다 포괄임금이 많을 것 같으면 다시 포괄임금을 적용하지 않고 실근로시간만큼만 주겠다는 것이다. 한 푼이라도 이익을 챙기려는 사업주의 철저한 욕망(?)에 놀라고, 또 그 욕망을 관철하기 위한 어처구니없는 꼼꼼함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포괄임금 규정은 근로기준법 적용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고, 사실상 실근로시간을 산정해 임금을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근무형태상 실근로시간 예측이나 산정에 별다른 어려움이 없는 사업장이어서 근로계약서의 형식적인 문언만으로 포괄임금제에 의한 임금지급계약을 유효하게 체결한 것으로 볼 수 없었다.

심지어 회사는 정년을 지나 채용한 또 다른 노동자가 사업주 지시에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지 않자 정년을 이유로 해고했다가 노동위원회가 ‘기간의 정함이 없는 근로계약’을 체결한 것이고, 새삼스럽게 정년 규정을 적용해 해고한 것은 부당해고에 해당한다고 판정하자 1년의 계약기간을 설정한 근로계약서 체결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연히 그 버스노동자에게는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변경한 근로조건에 동의해 줄 의무가 없으니 새로운 근로계약서 체결을 거부해도 된다고 했다. 새로운 근로계약서에 서명을 거부했다고 해서 징계와 같은 불이익을 받을 일도 없을 것이다. 설사 사업주가 자신의 이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부당한 징계를 감행한다고 하더라도 현저히 불이익하게 변경된 근로조건을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혹시 있을지 모를 불이익은 그것대로 싸워 나갈 수밖에 없다.

그 버스 노동자는 사업주가 요구한 근로계약서 서명을 거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 “사업주가 불리한 근로계약서에 서명하라고 강요하면 우리는 유리한 근로계약서를 작성해서 사업주 보고 서명하라고 요구하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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