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범 공인노무사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승진은 노동자들이 직장생활에서 얻을 수 있는 큰 기쁨 중 하나다. 특히 임원으로의 승진은 노동자들이 직장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높은 수준의 성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노동자들에게 승진이 기쁨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원치 않는 임원승진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A사는 일정 기간 이상 근속한 40대 초중반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일률적인 이사승진 발령을 냈다. A사는 직원 중 절반 이상이 임원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임원이라는 형식상 표현에도 불구하고 A사 이사들의 근로기준법상 노동자성은 당연히 인정될 수밖에 없다.

A사는 기존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하는 노동자들에게 일괄적으로 사직서 제출을 요구했다. 임원의 경우 기존 호봉제가 아닌 연봉제 계약을 체결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연봉제 계약이 체결되면 기존보다 임금이 저하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될 경우 퇴직금 손실이 발생할 수 있기에 퇴사를 통해 미리 보전을 받으라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임금수준 결정방식이 호봉제인지 연봉제인지는 근로계약의 연속성과 전혀 관련이 없기에 사측의 첫 번째 논리는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미 기존에 이사로 승진한 직원들은 연봉제 계약이라는 이유로 임금이 대폭 삭감된 계약체결을 강요받고 있다. 심지어 무급연봉계약서를 제시받은 노동자도 있다. 실제 대부분의 이사들이 승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삭감된 임금을 지급받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퇴직금 액수에서 큰 손실을 입게 될 것이 자명한 이사승진 대상자들은 사직서를 제출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A사가 일괄적인 이사승진 발령을 내는 이유는 간단하다. 승진이라는 표면상 이유를 내세워 인건비를 줄이고 해고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이다. A사는 이사승진을 이유로 사직서 제출을 강요해 근로관계를 종료한 뒤 연봉제 형태로 새롭게 근로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최초 계약 시에는 기존 근로조건보다 일정 정도 오른 연봉을 제시하지만 갱신 시점에는 대폭 삭감된 임금을 제시한다. 노동자가 이를 수락하지 않으면 재계약을 거절하는 방식으로 근로기준법상 해고제한 규정을 회피하고 있다. 노동자 입장에서는 사측의 압박과 퇴직금 손실에 대한 부담으로 사직서를 제출할 수밖에 없다. 연봉제 형태로 신규 근로계약을 체결한 이후에는 갱신시점에 제시되는 삭감된 연봉액을 보고 스스로 다시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노동조건 저하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구태여 최저기준 설정이라는 근로기준법의 기본정신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퇴직금 산정은 법정 기준 이상으로 정하면 그만이다. 승진 이후 이뤄지는 임금삭감 때문에 퇴직금에 손실이 발생되는 구조라면 임금삭감 이전까지의 퇴직금액은 당시 기준으로 보전해 주고, 임금삭감이 이뤄진 이후에는 별도로 산정하면 되는 것이다.

사측이 그런 방식으로 취업규칙을 개정하거나 노사합의를 하면 쉽게 해결될 수 있는데도, 마치 노동자를 위하는 것처럼 본질을 호도하며 사직서 제출을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 또한 근로계약만으로 임금수준을 정하고 있는 경우 노동조건을 불이익하게 변경하기 위해서는 개별 노동자의 동의가 필요하다. 개별 노동자가 거절한다면 전년도 연봉보다 저하된 연봉을 적용할 수 없다.

결국 개별 노동자 입장에서는 승진 여부에 관계없이 사측의 사직서 제출 요구와 삭감된 연봉계약 체결 요구를 거부하면 되는 것이다. 노동관계법은 노동조건을 지켜 내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만을 마련하고 있을 뿐 본인의 권리를 지킬 수 있도록 행동하지 않는 자까지 알아서 보호해 주지 않는다. 사측은 노동자가 사직서를 제출하지 않겠다고 하거나 삭감된 연봉계약을 체결할 수 없다고 버틸 때 각종 유무형의 압박으로 굴복을 강요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가 끝까지 버텨 낸다면(특히 집단적으로 버텨 낸다면) 기존의 노동조건을 지킬 수 있다. 기억하자. 버티면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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