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경찰청장 직위해제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이 17일 대우차 조합원 폭력진압과 관련 '유감'을 표명하는 등 자칫 묻혀 버릴 수도 있던 '진실'이 일파만파 확산될 수 있었던 건, '비디오 테이프'라는 확실한 '현장 목격자'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우차 조합원들에게 '악몽'으로 기억되는 그날, 카메라를 들고 현장을 누볐던 대우차노조 영상패 소속 이춘상(40)씨(정리해고자)를 16일 저녁 '폭력진압' 영상물이 상영되고 있는 산곡동 성당에서 만나봤다.


* "싸움보다 기록을 택한 심정은 말로 다 못합니다"

"동지들이 피 터지게 맞고 피가 낭자한 모습을 촬영만 해야 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어요." 카메라까지 튀어오는 피를 보며 그는 "찍어야 할까, 싸워야 할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경찰들이 너무나 많은 노동자를 폭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씨는 '싸움'보다 '기록'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다.

비디오를 봤던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궁금해했던 점이 있다. 기자까지 '폭행'했던 경찰들인데 어떻게 일반인이 촬영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을까?

"진압이 시작되고 3분쯤 지났는데 경찰 한 놈이 '이 자식 연행해'라며 촬영하던 저를 딱 밀쳤습니다. 옆에 있던 경찰이 발로 걷어차기도 했구요." '기록'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이씨는 '아수라장' 같은 분위기를 틈타 전경 차 뒤로 몸을 숨긴 뒤 또 다시 촬영을 시작했다. "플레이를 눌러놓은 카메라는 어느새 스톱으로 돼 있고, 이곳 저곳에서 살려달라 비명은 들리고…" 80년 당시 금남로에서 광주 항쟁을 목격했다던 이씨는 "그래도 그땐 멀리 있었지만 그날은 1미터 안에서 모든 걸 지켜봐야 했다"며 쉽게 지울 수도 잊혀지지도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찰의 폭력성을 더 담아야 했는데…" 이씨는 그날 어떻게 다쳤는지도 모르겠다며 무릎 아래 깊게 패인 상처를 매만진다.


* "이번 사건은 일상화된 경찰폭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일 뿐"

"10여 명의 전경들이 시위대 한쪽 구석에 있었던 건 사실입니다. 폭력이요? 화면에도 있지만 전경들은 담배도 피고, 저도 못 먹은 물도 마시고…" 경찰쪽에서 조합원들이 전경들을 감금하고 폭행했다는 주장에 펄쩍뛰며 "전혀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말한다.

이씨는 박훈 변호사 발언 논란에 대해서도 김대중 정부가 국민들을 기만하는 것이라며 폭력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고 사과를 해도 시원찮은 판에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술책'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87년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노조활동하면서 '옥살이'까지 한 이씨. '옥살이' 1년6개월 후 복직과 함께 대우조선으로 파견근무를 하던 도중 척추디스크에 걸린 이씨는 조직활동을 적극적으로 하기엔 어렵다고 판단한다. 그때부터 사진과 비디오를 배워 '노동자의 삶'을 담으며 새로운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몸이 안좋아 직접 투쟁에 나서지 못하지만 누군가 이 작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대우차 조합원이자 정리해고자인 이씨는 투쟁에 한 발짝 떨어져 있어 '동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크다며 이번 촬영으로 부쩍 유명해진 것에 무척 쑥쓰러워 한다.

"이번 일은 일상화된 경찰 폭력이 대우진압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을 뿐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단위노조에서 알져지지 않은 폭력이 더욱 많다며 언론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아주길 바란다는 이춘상씨.

"아빠 경찰들한테 다치지 않게 조심하세요"라는 말보다 "아빠 회사 잘 다녀오세요"라는 아들 '바다'의 아침인사를 듣는 게 이씨의 간절한 소망. 다시 민주노총으로 일이 있어 가봐야 한다며 그의 '분신'인 카메라를 들고 이씨는 바삐 길을 나선다.

산곡 성당 정문에서 영상물이 반복해 돌아가는 가운데 "그들의 카메라가 '폭력'을 이겼다"는 어느 조합원의 말이 계속 귓전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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