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임금체계는 배보다 배꼽이 큰 구조를 갖고 있다. 낮은 기본급과 복잡한 수당으로 대표되는 기형적인 체계다. 특히 98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임금체계가 급속히 왜곡됐다. 유연화·효율화 논리가 노동시장을 휩쓸면서 성과급이 우후죽순 도입됐다. 연공급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있다.

노사정과 학계는 지난 20여년간 변죽만 울렸을 뿐 임금체계 개편에 관한 바람직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다. 진정성 있는 대화도 없었다. 최근 확산되는 통상임금 소송은 기형적이고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로잡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다.

현재 임금체계 개편 흐름은 정부와 재계가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방향이 잘못된 듯하다. 비용의 문제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통상임금 소송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에 초점을 맞춰 주판알을 튕기고 있다.

이젠 왜곡된 임금체계를 바꿔야 할 때다. 기본급을 올리고 복잡한 수당을 단순화해야 장시간 노동을 줄일 수 있다. 그래야 박근혜 정부가 바라 마지않는 ‘고용률 70%’ 달성도 가능할 것이다. <매일노동뉴스>가 바람직한 임금체계 개편을 기대하며 6회에 걸쳐 주요 쟁점과 논란을 짚어 본다.

<게재 순서>
① 임금체계 개편, 왜 실패했나
② 왜곡된 임금체계-생산직
③ 왜곡된 임금체계-사무직
④ 누구를 위한 통상임금 전쟁인가
⑤ 소송에 가려진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문제
⑥ 임금체계 개편의 바람직한 방향

외국계 자동차 생산·판매업체인 G사는 올해 임금·단체협상에서 사무직 노동자의 임금체계를 연봉제에서 호봉제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기존의 호봉제를 연봉제로 바꾸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는 노사는 많지만 이번처럼 연봉제를 호봉제로 되돌리는 노사합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무직을 상대로 10년 넘게 연봉제를 운영한 G사가 이처럼 의외의 결정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객관적 평가' 사라진 G사 연봉제의 폐해

G사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연봉제가 도입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G사는 사원·대리부터 순차적으로 연봉제를 도입했다. 당시 대규모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 쓰나미가 휩쓸고 간 뒤였다. 해고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던 시절이다.

회사는 개별 노동자를 상대로 연봉제 전환에 합의한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근로기준법은 근로조건을 기존보다 불이익하게 변경할 경우 노동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이나, 노조가 없는 경우 노동자 과반의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절차는 필요하지 않았다.

“연봉제가 도입된다고 하길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프로야구선수 연봉협상을 생각했는데 많이 다르더라고요.”

G사 사무직 노동자 박진우(42·가명)씨의 말이다. 거창한 연봉협상 따위는 없었다. 직원들의 임금은 팀장의 인사고과 점수로 결정됐다.

“처음에는 연봉제에 대해 거부감이 크지 않았어요. 인사고과 점수에 따라 등급이 달라져도, 등급 간 급여 차이가 크지 않았거든요. 그런데 해를 거듭할수록 상황이 달라졌어요. 등급 간 급여 차이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죠.”

연봉제를 적용받는 직원들의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평소 팀장에게 잘 보인 직원은 인사고과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 팀장에게 찍힌 직원은 열등생 취급을 받았다. 한번 찍힌 직원이 그 뒤 일을 열심히 하더라고 점수는 높아지지 않았다. 직원의 인사고과 점수를 변경하려면 팀장이 임원진의 결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찍히면 그걸로 끝입니다. 높은 연봉을 받는 사람은 늘 높은 연봉을 받고, 낮은 연봉을 받는 사람은 늘 낮은 연봉을 받는 구조가 생겨났죠. 직원들 사이에서 ‘팀장들 밤길 조심해야 할 거다’는 불만이 터져 나온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연봉제의 근간을 이루는 인사고과는 회사가 구조조정을 추진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한다. G사는 지난해 사무직을 대상으로 두 차례 희망퇴직을 접수했다. G사 미국 본사가 한국에서의 생산물량을 줄이기로 결정한 직후다.

“부장급 이상 관리자들에게 인사고과 점수는 치명적입니다. 회사가 구조조정에 나설 때 이들은 해고 1순위로 지목되는데요. 회사측의 노골적인 퇴직종용을 거부하면, 회사는 ‘인사고과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주겠다’는 식으로 압박을 가합니다. 불명예스럽게 쫓겨나기 전에 스스로 나가라는 말이죠.”

연봉제에 대한 직원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G사 사무직노조는 지난해부터 ‘연봉제 폐지와 연공급제 도입’을 회사에 요구하기 시작했다. 임금제도에 대한 불만은 노조 조직력 강화로 이어졌다. 노조는 2년에 걸친 협상과 투쟁 끝에 올해 교섭에서 요구안을 관철할 수 있었다.

G사의 사례는 객관적인 평가지표 없이 팀장들의 인사고과에 의존한 연봉제의 폐해를 보여 준다. 주관이 개입된 인사고과가 임금산정의 기준이 되거나 정리해고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업무성과에 따라 임금이 차별화되는 성과중시형 임금체계'로 정의되는 연봉제 본래의 취지는 왜곡된 지 오래다.

외환위기 이후 급증한 연봉제

우리나라에서 연봉제로 대표되는 성과연동임금제도의 역사는 길지 않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인사고과가 개입되지 않는 연공급이 확산되자, 사용자들은 연공급의 ‘경직성’을 문제 삼으며 임금체계 개편을 모색했다. 보다 유연한 임금체계로의 탐색이 시작된 것이다.

90년대 초반 사용자들은 일본의 능력 중심 임금체계를 모방한 직능급 도입을 추진했다. 직능자격제도를 도입해 노동자들에 대한 능력평가와 인사평가를 임금에 연동시키겠다는 발상이다. 일명 ‘신인사제도’로 불리는 이 같은 시도는 큰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인사고과제도의 영향으로 노동강도가 세질 것을 우려한 노조가 반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업들은 직능자격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할 만한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연봉제가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97년 외환위기 이후다. 전 세계적인 신자유주의 바람을 타고 적극적인 노동유연화 전략을 추진한 사용자들은 노동통제 효과가 큰 연봉제로 눈을 돌렸다. 직능급과 달리 복잡한 제도가 필요하지 않은 데다, 1년 단위로 노동자를 평가함으로써 노동통제 효과를 높일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연봉제는 빠른 속도로 확산됐다.<그래프 참조>
 

 


때마침 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상승세를 타던 노조의 조직력이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크게 약화됐다. 사용자들은 너도나도 연봉제를 도입했다. 당시 시도된 임금체계 개편의 기본방향은 임금의 연공성을 약화시키고, 능력·성과 연동성을 높이는 것이다. 고용노동부의 2006년 임금제도 실태조사에 따르면 외환위기 이후 관리자급 호봉제를 폐지(21.7%)하거나, 사원급 호봉제를 폐지(14.4%)하는 등 임금체계에 변화가 나타났다.<표1 참조>
 

 


연봉제가 만들어 낸 '대가 없는 노동'

연봉제는 1년 단위로 임금을 산정한다는 점에서 시급제·월급제 같은 임금지급 형태의 일종이다. 업무수행능력을 평가해 임금액을 정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직능급과 같은 능력주의 임금체계로 분류한다.

연봉제의 임금체계는 단순하다. 기본급이나 수당처럼 세분화된 임금항목이 없고, 별도로 지급되는 상여금도 없다. 기본급과 각종 고정수당·정기상여금 등은 기본연봉으로 통합하고, 변동급여인 성과상여금과 초과근무수당을 별도의 성과상여로 분리한다.<표2 참조>
 

 


성과와 업적을 기준으로 하는 연봉제는 노동을 ‘양’이 아닌 ‘질’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기존 임금체계와 차이가 난다. 따라서 노동시간과 노동량을 임금결정의 기준으로 삼는 업종이나 생산직, 업무를 배우는 단계의 신입사원에게는 적절하지 않다.

연봉제는 필연적으로 노동시간 유연화를 수반한다. 일한 시간만큼 급여가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성과만큼 급여가 지급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일의 완수를 위해 장시간 노동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구조에서 등장한 임금지급 방식이 포괄임금역산제도다. 포괄임금역산제도는 초과근로나 실제 노동시간을 정확히 측정하기 어려운 업무의 연장·야간·휴일근로 등에 대한 가산수당을 월급에 미리 반영해 지급하는 임금제도다. 연봉제 사업장인 G사 사무직들도 매월 18시간에 해당하는 포괄적 시간외수당을 적용받아 왔다. 18시간을 초과해 근무하더라도 돈을 더 받을 수는 없다. 이와 관련해 G사 사무직노조는 올해 임금교섭에서 18시간을 초과한 근무에 대한 수당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회사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 급여가 지급되는 생산직보다는 주로 사무직에서 발견되는 ‘대가 없는 노동’이다.

노조 조직률 10% 시대, 작아지는 "연봉제 폐지" 구호

연봉제의 특징 중 하나는 ‘고임금·저인건비 실현’이다. 기여도가 높은 고생산성·고부가가치 직원에게 고임금을 지급하고, 이들이 더 큰 생산성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도록 함으로써 기업 전체적으로 저인건비를 실현한다는 목적을 담고 있다.

하지만 G사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대기업의 연봉 평가마저도 친소관계에 의해 점수가 결정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당초 사용자들이 의도했던 임금유연화를 통한 인건비 감소 효과도 미미한 수준이다. G사가 10년 넘게 유지했던 사무직 연봉제를 폐지한 이유도 연봉제를 유지한다고 해서 회사가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과가 크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물론 G사처럼 시간을 거슬러 연공급제로 돌아가는 기업이 얼마나 늘어날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노조 조직률이 10% 초반에 머물러 있는 상황에서 노동계의 “연봉제 폐지”의 구호는 점점 잦아들고 있다. 반면 2016년 정년 60세 시행을 앞두고 임금피크제와 성과연동임금 확대를 요구하는 재계의 목소리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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