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주 변호사
(금속노조 법률원)

지난 4일 오전 10시 서울 남대문경찰서 앞에서 재능OUT 국민운동본부의 기자회견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서울시청 앞 학습지노조 재능지부 농성장에 걸린 현수막이 다섯 차례에 걸쳐 소리 소문 없이 밤중에 사라졌고, 배후를 철저히 수사해 달라는 기자회견이었다.

기자회견 내용을 알리는 플래카드를 펼치고 기자회견문을 앞에 놓고 10명 정도의 참가자 중 한 명이 발언을 시작하려는 찰나, 남대문경찰서 경비과장은 마이크로 “여러분들은 지금 불법집회를 하고 있습니다”라고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기자회견을 하는 건데 무슨 불법집회냐고 항의하니 플래시몹은 집회 아니냐고 주장했다. 경찰은 기자회견 진행 중간 중간에 자진해산 요청과 해산명령을 했다.

기자회견에 참석하기 위해 남대문경찰서 앞에 갔던 필자는 기자회견을 무조건 집회라고 우기며 해산명령을 하는 행태에 화가 났다. 여기저기 항의하고 탄원하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런데 막상 어디에 연락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검사에게 전화를 해서 탄원을 하면 들어줄까 싶어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안 됐다. 이번에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전화를 걸어 긴급구제 요청을 했다. 이어 전화번호부에 있는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막무가내로 취재요청을 했다. 그렇지만 기자회견 30분이 끝나도록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난 후에야 국가인권위에서 긴급구제를 요청했냐고 전화가 왔다.

대한민국 한복판에서 부당한 일이 벌어졌는데, 부당한 일을 당한 우리는 누구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지 몰랐다. 지원의 손길도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

요즘 방송되고 있는 TV 드라마에서 본 장면이 생각난다. 국선변호사가 청각장애인을 변호했다. 변호사는 재판장의 말을 잘못 알아듣는 연기를 하면서 재판장을 그 청각장애인의 편에 서 보게 했다. 재판장은 변호사가 자신의 말을 못 알아듣자 1분도 안 돼 호통을 치고 법대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피고인인 청각장애인은 평생 아무리 외쳐도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 답답함과 고통을 겪으면서 살아오고 있었다고 이야기했다.

그저께는 금속노조 발레오만도지회가 조합원과 용역 간 충돌 동영상을 제출하고 국가인권위원회에 긴급구제신청을 제기했다. 녹취록에는 노무과장이 “제가 패도 돼요? 갯값 물어 주실래요?”라고 묻고, 사장이 “갯값이야 얼마든지 물어 주지”라고 답을 하는, 보고도 믿기 어려운 대화가 담겨 있다.

대낮에 버젓이 자행되는 폭력과 회사 사장이 조합원들을 개라고 지칭하는 기가 막힌 일을 발레오만도 조합원들이 겪고 있을 때 고용노동부와 검찰, 이 사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최병승·천의봉 두 동지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앞 송전탑에서 고공농성을 한 지 280일을 향해 가고 있다. 22일은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지 3년이 되는 날이다.

법에 없는 것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저 파견법 규정과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회사는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 버티고 있다. 그러니 노동자들은 법을 준수하라는 요구를 철탑 위에 올라가 농성하는 방식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극한의 선택을 하게 됐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과 연대단체 사람들이 매일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대선 전 정치권에서 약속했던 쌍용차 정리해고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를 이행하라는 것이다.

개인도 아니고 국민들을 대표하는 지위에 있는 국회의원·정치인들이 공연히 뱉은 말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오늘도 쌍용차 해고자 동지들은 ‘1인 시위’라는 방식으로 온몸으로 ‘말’을 할 수밖에 없다.

말을 하기 위해 철탑에 올라가야 하고, 밤이나 낮이나 1인 시위를 해야 하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인가.

노동자의 말을 들어줘야 할 의무를 지고 있는 사람들, 검사·근로감독관·판사·국회의원·정치가·대통령…. 그들이 노동자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듣는 사회, 입장을 바꿔 단 1분이라도 생각해 보는 사회, 그런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다.

그들이 “노동자의 목소리가 들려”라고 하는 그날을 염원하고 또 만들어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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