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민주당 홍익표 의원의 ‘귀태’ 발언으로 시끄럽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박정희 전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것인지 박근혜 대통령을 모욕했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인터넷 지식사전을 검색해 읽었다. 본래 귀신에게서 태어난 아이를 뜻한다는데 이 세상에서는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이 태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홍익표 의원은 지난 11일 국회 브리핑에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란 책을 인용하며 “책에 귀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태어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이 태어났다는 뜻”이라며 “만주국의 귀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후손들이 아이러니하게도 한국과 일본의 정상으로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홍익표 의원은 귀태의 의미까지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2. 귀태의 의미를 알게 되자 나는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를 알고 싶어졌다. “1896년 야마구치현에서 출생하였다. 1920년 도쿄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농상무성에 들어가 신관료의 지도자가 돼 군부파시즘을 지지했다. 1936년 만주국 정부(제2차 세계대전 중의 일본 괴뢰정권)에서 산업계를 지배하다가 1941년 도조 히데키 내각의 상공대신이 됐으나 총리와 대립해 내각 총사퇴를 초래했다. 패전과 동시에 A급 전범용의자로 복역 중 1948년에 석방됐다. 1955년 자유민주당의 간사장이 되고, 1957년 총리가 됐다. 1966년과 1972년 민간 외교 차원에서 한국을 찾은 것을 비롯해 그 뒤에도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두산백과).

이번에는 대통령 박정희가 아닌 일제와 해방 직후 박정희가 궁금해졌다. “1917년 경상북도 선산에서 출생했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교사로 근무하다 만주의 제6군관구 사령부 신경(新京·지금의長春)군관학교를 지원해 합격했다. 나이 제한에 걸려 1차에서 낙방했으나 장교가 되겠다는 자신의 간곡한 편지를 보내 합격했다. 우등생으로 선발돼 1942년 일본육군사관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44년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57기로 졸업했으며, 8·15광복 이전까지 주로 관동군에 배속돼 일본군 중위로 복무했으며 팔로군을 공격하는 작전에 참가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귀국 후 1946년 9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에 입학해 3개월간 교육을 마치고 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소위가 됐다. 박정희는 군부에 비밀리에 조직된 남로당에 가입해 활동했으며,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이 일어나자 육군 정보사령부 작전참모로 배속됐다. 그해 박정희는 당시 국군 내부 남로당원을 색출하자 발각돼 체포됐으며 군법회의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만주군 선배들의 구명운동과 군부 내 남로당원 존재를 실토한 대가로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다. 이후 15년으로 감형돼 군에서 파면됐다. 육군본부에서 비공식 무급 문관으로 계속 근무하다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소령으로 군에 복귀했다.”(두산백과)

둘 다 관료, 장교로 일본제국주의에 적극 복무했다. 대한민국헌법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것이라고 전문에서 선언함으로써 일본제국주의를 부정하고서 대한민국이 서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제 관동군은 일제에 맞서 무장투쟁까지 전개하고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겐 무엇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해방을 위해서는 타도해야 할 적, 일제의 무력이었다고 한국사는 말하고 있다. 설사 신념이 아니라 생계형이었다 변명해도 대한민국의 백과사전에 기록된 일제의 박정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그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에서는 귀태인 거라고 대한민국의 건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와 대한민국의 적대적 운명에서 비롯된 것이지 인간 박정희의 출생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3. 귀태. 이 세상은 수많은 것들을 귀태로 부정하고서 세워졌다. 근대의 민주공화국은 봉건절대왕정·귀족정·군주국·파시즘 등 수많은 정치형태와 국가형태를 부정하고 서 있다.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아야 할 것들이 어디 그뿐이겠는가. 근대국가는 자유와 평등을 자신의 이념으로 해서 세워졌다고 선언했다. 대한민국 헌법도 “사회적 특수계급의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해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국민의 평등을 규정하고 있다(제11조 제1항, 제2항). 이것은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며,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할 것이라고 한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도 표현되고 있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모든 국민의 평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수천명의 노동자를 고용하고 있는 사용자라도 그와 노동자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대한민국의 법 앞에 평등해야 하고, 사용자에 대해 노동자라고 해서 정치적·경제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며, 어떠한 일이 있어도 사용자와 노동자의 관계가 사회적 특수계급 제도로 기능해서는 안 된다. 과연 그럴까. 오늘 대한민국에서 자본과 노동의 관계가 헌법이 선언하고 규정하고 있는 평등의 눈으로 볼 때 평등하다고 보일까. 오늘도 수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는 투쟁하고 있다. 불법파견·부당(정리)해고·임금체불·노조활동 탄압 등이니 파견법위반·근기법위반·노조법위반 등 사용자의 각종 불법행위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다. 그것은 대부분 공정하고 엄정한 법집행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법 앞의 평등이라면 노동자와 사용자에 대한 법집행에서 차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대차 비정규직 투쟁 등 지금 전개되고 있는 대표적인 투쟁사업장의 문제는 이것이 문제라고 노동자는 외치고 있다. 10년을 불법파견이라고 파견법 위반으로 수도 없이 진정하고 고소고발 했지만 현대차 사용자는 단 한 번도 처벌받지 않았다. 오히려 불법파견이라며 현대차 사용자를 상대로 교섭을 요구하고 쟁의했던 비정규직노조 간부와 조합원만 업무방해죄 등으로 처벌받았다. 불법파견이면 비정규직 조합원들이 파업을 할 때 하는 사용자의 대체근로 투입은 불법이고 노조법 위반의 범죄행위다(노조법 제43조 제1항, 제91조). 법 앞에서 평등이면 이미 대법원에서 불법파견이라고 판정된 현대차 사용자를 파견법 위반, 노조법 위반으로 처벌해야 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그러니 오늘도 현대차에서 비정규 노동자들은 현대차 사용자를 상대로 불법파견 중단과 정규직 전환을 외치며 파업을 진압하고 대체인력을 투입하는 사용자의 불법에 법 없이 맨 몸으로 맞서고 있다. 분명히 이 나라의 법 앞에서는 불법과 범죄라고 파견법과 노조법이 규정해서 사용자의 행위를 부정하고 있음에도 비정규 노동자의 요구와 행동만 부정당해왔다.

어디 이것뿐이겠는가. 우리 세상에서 비정규직은 차별의 다른 이름이다. 단순히 고용형태만이 아니라 임금·인사 등 근로조건에서 차별받는 노동자를 말한다. 오늘 비정규직은 더 이상 예외가 아니다. 시간제·일용직·기간제·계약직 등 고용의 기간으로, 파견·사내도급·소사장·개인사업자·특고 등 고용의 형태로, 무기계약직이니 준규직 등의 근로조건으로 달리 취급되는 자 모두의 이름이다. 그런데 이러한 비정규직은 “사회적 신분을 이유로 차별적 처우를 하지 못”하도록 한 근로기준법·파견법·기간제법 등 이 세상의 법이 금하기는커녕 창설한 것이다. 노동자 일부를 비정규직으로 계약 체결하고서 정규직과 다른 신분으로 처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우리 세상의 질서다. 이 세상에서 계약의 질서는 노동자 일부를 비정규직으로 정해서 차별을 두는 것을 자유라고 선언하고 있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주장하고 내세우지만 동일노동 동일신분의 원칙은 예외적으로만 주장하고 내세우고 있다.

4. 이 세상에서 차별의 다른 이름이 비정규직인 것이라면 노동운동은 비정규직을 귀태로 선언하고서 철폐를 위해 투쟁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의 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길에 서는 순간 노동운동은 자신부터 비정규직을 부정해야 한다. 자본의 세상에서 노동자는 단결할 자유를 권리로 쟁취했다. 노조는 단결해서 활동하기 위한 노동자의 단결체다. 단결이니 비정규직 노동자도 노조에 가입해서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이 나라에서 노조운동은 그렇지 못했다. 일시적이고 예외적이라고 해서 조직대상에서 제외했다. 그런데 오늘 비정규직은 일시적이지도 예외적이지도 않다. 노동자의 단결, 노조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조합원으로 가입시켜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노조운동은 비정규직 조직화를 주된 사업으로 정해왔다. 그런데 어떤가. 오늘 기존 정규직의 노조는 비정규직을 조직대상으로 하고 있지 못하다. 하고 있다 해도 비정규직 조합원은 노조에서 주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주변에 머문다. 비정규직 조직화는 비정규직 노조를 조직하는 것이 되고 있다. 비정규직끼리 단결해서 활동하는 것이 비정규직 조직화로 되고 있다. 큰 단결을 외쳐온 산별노조조차 정규직, 비정규직 구분 없이 하나의 노조로 단결해서 활동하자던 조합원들의 산별노조 전환 결의는 정규직·비정규직으로 분리해서 노조의 조직과 활동을 하는 것으로 망각하고 있다. 비정규직 철폐나 차별금지는 사용자를 상대로 투쟁해야 하는 노조의 활동 문제이지만, 비정규직 조직화는 오로지 노동자끼리의 단결인 노조의 조직의 문제이다. 누굴 탓하는 것으로 변명이 되지 못한다. 지금 귀태로 시끄럽다. 귀태, 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 그것은 민주공화국 대한민국 앞에서는 일본제국주의의 박정희를 부르는 이름일 수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법과 노조법 앞에서는 어떤 사용자를 부르는 이름이다. 무엇보다도 노조운동 앞에서는 비정규직을 부르는 이름이 되고 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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