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방위밴드 마실은 9일 오후 서울 여의도 통기타라이크 카페 자유2에서 '여의도 사람들 2집' 음반 발매를 기념해 쇼케이스 '마실 가는 날' 공연을 했다. 이인규 단장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정기훈 기자

 

 

앨범제작사 아트앤액션의 이인규(50·사진) 단장은 "이 나이가 되니 비로소 젊은이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나만의 의견을 드디어 내놓을 수 있고, 나만의 주관이 이제야 생기고, 그래서 나만의 세계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나의 가능성을 발견했고 새로운 일에 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이런 것이 젊음 아닌가요?"

한 사람의 오늘은 그 사람의 역사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한다. 이 단장은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운동권이 배출한 가장 대중적(?)인 민중가요 노래패로 평가받는 '노래를 찾는 사람들 (노찾사)' 출신이다. 88년부터 91년까지 함께했다.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진 91년 그는 민중가요를 부르는 것을 중단하고 생활인이 됐다. 당시 민중가요 운동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90년대 초반을 지나면서 각자의 삶을 찾아 흩어졌다.

"정치적 대결 양상이 심해야 민중가요를 할 틈이 있는데 90년대를 지나면서 할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어 버렸습니다. '민주주의여 만세' 를 부르고 다녔는데 형식적 민주주의가 진척되면서 점차 이런 노래의 필요성이 희미해졌던 거죠. 갈 길을 잃어버린 겁니다. 당시 새로운 민중가요를 빨리 모색했어야 했는데…."

"민중가요 미래 모색하는 토론조차 못해"

생활인이 된 뒤 민중가요에 대한 향수는 아쉬움으로 나타났다.

"문득문득 생각이 납니다. 왜 민중가요 운동이 나아갈 방향을 놓고 제대로 된 토론 한번 못해 봤을까. 뿔뿔이 흩어진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음악에 대한 미련만 갖고 있던 이 단장은 우연한 계기로 기타를 다시 잡았다. 한·일 월드컵 개최를 3년 앞둔 99년. 축구에 열광하는 '붉은악마'의 응원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별다른 응원가 없이도 나이·성별을 떠나 하나 된 마음으로 응원하는 이들의 모습이 자못 신선했다.

"당시 한국 대중가요는 자본의 논리에 충실했습니다. 의미 있는 노래보다는 돈이 되는 노래만 보급했거든요. 그래서 응원가를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죠."

음악생활을 접은 지 10여년 만인 2002년 그는 '온 국민 응원가'라는 음반을 내놓았다. "제국주의 축제인 월드컵에 동조하는 거냐"는 비판도 받았다.

"2000년부터 서울 여의도에 <자유2>라는 통기타 라이브카페를 차려 운영했습니다. 사람들 속에서 노래를 부르며 민중가요에 대한 생각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민중의 삶을 노래하는 것이 민중가요인데, 그게 꼭 투쟁적이고 전투적이어야만 하는가. 민중의 사랑과 그리움, 삶도 민중가요의 주제일 수 있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민중가요의 다양성을 확대해야 한다는 이 단장의 생각은 월드컵 응원가에서 이달 초 발매한 새 음반 '여의도사람들2'까지 이어졌다. 민중가요의 다음 길을 찾기 위해 그는 2002년부터 올해까지 다섯 장의 앨범을 출시했다.

'여의도사람들2' 제작은 10여년의 실험을 결산하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의 실험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번 앨범은 지인들에게만 나눠 주고 있습니다. 유통을 위한 것은 아니지요. 정식 앨범은 연말에 내놓을 생각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민중가요가 어떤 것인지, 우리의 실력이 어떤지를 대중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마지막을 준비 중입니다."

요즘 이 단장은 낮에는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에 자리한 소극장 학예(學藝)에서 앨범과 공연 준비를 하고, 밤이 되면 <자유2>에서 손님들 앞에 서는 강행군을 이어 가고 있다. 그와의 방담은 지난 19일 오후 학예에서 두 시간 이상 계속됐다.

"80년대 부흥은 민중가요 미래 아니다"

- 민중가요를 부르는 이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민중가요의 수명이 다했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90년대 들어 자본주의가 확산되고 소련이 붕괴하면서 민중가요를 했던 사람들이 갈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외형적 민주주의가 타협적으로 수용되면서 '민주주의여 만세'와 같은 노래는 설 자리가 사라졌지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민중가요를 빨리 모색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문화적 책임을 방기한 채 십수 년을 그냥 흘려보냈습니다. 민중가요를 했던 사람들이 제대로 된 토론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각자 개별화돼 버렸어요. 그렇다고 민중가요의 수명이 다했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민중이 있는 한 민중이 주인공인 음악은 계속될 겁니다."

이 단장은 이 대목에서 "시대에 걸맞은 민중가요가 80년대의 부흥은 아닐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름다운 사랑 연가는 수천 년을 이어 온 민중가요의 바탕이고, 오늘날 민중가요도 인간이 생을 다할 때까지 단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한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 91년 노찾사를 떠나고 생활인이 된 뒤 99년 다시 음악을 시작했다고 들었습니다.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떤 음악을 할까 고민하던 시기에 붉은악마의 응원전을 구경한 적이 있습니다. 연령과 성별을 떠나 한마음이 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이미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생산·보급 체계가 구축돼 있었습니다. 의미 있는 노래보다는 돈이 되는 노래만 보급되는 시대였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응원가를 한번 만들어 보자고 생각했습니다. 2002년에 '온 국민 응원가'라는 앨범을 냈습니다."

"민중운동의 위선이 민중가요를…"

- 응원가 발매 때도 그렇고, 카페 운영하면서 제작한 앨범도 그렇고, 노래가 나올 때마다 '노찾사 전 멤버'라는 타이틀이 붙네요.

"노찾사의 이름을 팔지 말라는 비판을 많이 들었습니다. 물론 제가 직접 판 건 아니었습니다.(웃음) 제가 뭘 해도 노찾사라는 수식어가 따라오더라고요. 응원가를 만들 때도 제국주의 축제를 옹호한다는 지적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민중가요의 필요성을 아는 사람으로서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길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한참을 머뭇거리던 이 단장은 과거의 일화를 꺼냈다. 89년 김호철씨가 작사·작곡한 '단결투쟁가'는 서정적이면서도 투쟁적인 가사와 멜로디로 민중가요 운동진영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단결투쟁가에 일본 제국주의적 색채가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잘 모르던 저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쳤는데요. 나중에 엘리트 위주의 노래운동 진영에서 김호철씨의 존재를 인정하기 싫어했던 기류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적의 위선을 지적했지만 우리 스스로 위선으로 뭉쳐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엘리트 의식이 계속 이어져 민중가요의 재생산과 발전을 이끌었다면 모르겠는데…. 90년대에 접어들며 사라진 이들을 보면 긍정적이진 않았던 거죠."

- 벌써 여러 장의 앨범을 만들었네요.

"응원가에서 시작해 최근까지 다섯 장의 앨범을 냈습니다. 2010년에는 카페 손님들과 함께 '여의도사람들'이라는 앨범을 만들었죠. 십시일반 모은 자금으로요. 두어 곡 빼고는 대중가요와 다름없는 노래였습니다. 인생의 그리움과 회환 등을 주제로 했거든요. 사람들과 함께 그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드는 작업이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의도사람들 2' 가 나온 거고요."

'전방위밴드 마실' 구성 … "민중 속에 있는 팀 만들고 싶다"

- 밴드도 구성하셨는데. '전방위밴드 마실'이라는 이름이 독특합니다.

"지난해 초 언론사 파업이 치열했잖습니까. 그런데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압승한 뒤 파업에 참여했던 기자들이 저희 카페에 와서 엄청 울더라고요. 언론사 기자의 최소한의 양심이 짓밟히고 해고를 당한 그들을 보면서 이들에게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나 생각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대선 결과마저 비참했던 거죠. 다시 해직기자들과 함께 펑펑 울었습니다. 술김에 '야 그래도 우리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 있잖아'라고 외쳤는데요. 희망의 불씨 하나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겠다, 이제는 음악을 제대로 해야 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습니다."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를 거치면서 이 단장은 그동안 알고 지낸 지인들과 밴드를 만들었다. 멤버들에게는 "대중들도 자기가 주제가 되는 노래를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그런 노래를 해 보자"고 설득했다. 3명이 모여 '전방위밴드 마실' 을 구성했다.

"어디라도 가고, 무슨 노래라도 하고, 주관이 없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갈망하는 것이라면 어떤 음악이라도 하겠다는 각오를 표현한 겁니다. 마실은 '마을'이라는 뜻인데요. 가령 파업현장을 간다면 비장한 마음으로만 가는 게 아니라 즐겁게 해 주고 단결하게 해 주고, 싸울 의지를 북돋아 주자는 거죠. 거리감 없이 마실가듯 우리 역할을 해 보자는 의미입니다. 전방위적으로 때로는 머슴으로, 때로는 전사로, 때로는 친구처럼 민중과 함께 있는 팀을 만들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 '여의도사람들2'는 정식으로 출시한 앨범이 아닌가요.

"6월9일 '마실가는 날'이라는 제목으로 쇼케이스를 했습니다. 지인들 중심으로 저희의 성과를 소개하는 자리였죠. 유통을 위한 음반은 연말 발매를 준비 중입니다. 음반에 대한 지적과 평가를 반영해서 대중음악 시장에 내놨을 때 손색없는 음반을 만들고자 합니다. 유통음반이 나오면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야지요."

전방위밴드 마실의 멤버 3명은 요즘 소극장 학예에서 연습에 여념이 없다. 7월부터는 매달 한두 번씩 공연도 할 예정이다.

- 밴드 활동을 하는 데 나이가 부담이 되진 않습니까.

"50이 돼서야 젊어진 것 같습니다. 나만의 의견을 내놓을 수 있고, 나만의 주관이 이제야 생기고, 그래서 나만의 세계가 비로소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나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일에 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 같네요. 이런 것이 젊음 아닌가요."

- 전방위밴드 마실의 목표가 있나요.

"음악을 한다는 것은 역사적 책무가 따라 다니는 일이라고 봅니다. 멤버들에게 'SM과 JYP를 이기자. 그들이 망하는 것을 보자. 대중은 결국 우리 편이고 우리의 삶을 노래하면 결국 우리가 이긴다'고 말합니다. 답이 됐나요.(웃음)"

그의 공식 직책은 앨범제작사인 아트앤액션의 '단장'이다.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곱게 꾸민다는 의미의 단장이다. 자신의 인생을 계속 꾸며 나가겠다는 다짐을 담았다.

사실 이 단장은 87년 민주화항쟁의 덕을 본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는 86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했다. 같은해 12월 고문을 당한 뒤 검찰에 송치돼 교도소에 들어갈 때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고문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교도소 창 밖의 햇살이 그리도 따스해 보일 수가 없었단다. 이듬해 1월 박종철 열사 사건이 터지자 민주항쟁이 발발했다. 이 단장은 6개월 만에 풀려났다. 시대에 빚을 진 그가 끊임없이 '단장'을 하며 살고자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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