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갑을로 시끄럽다. 슈퍼갑 남양유업의 행태가 뉴스로 보도됐던 것이 벌써 한 달 전이다. 이 업체의 본사 직원이 대리점 주인에게 가하는 막말과 욕설이 인터넷 동영상으로 폭로, 유포되면서였다. 그 뒤 수많은 갑들의 횡포가 폭로됐다. 슈퍼‘갑질’이 정상적인 기업활동이냐고 갑의 횡포, 슈퍼갑으로서의 행태에 관한 비난이 쏟아졌다. 본사와 대리점, 원청 대기업과 하청 중소업체, 정규직과 비정규직, 서비스업체와 고객, 상급자와 하급자 등 우리 사회의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관계라고, 반드시 극복돼야 할 갑의 질서라고 논의되기 시작했다. 급기야는 그로 인한 손해배상을 10배의 징벌적 배상 책임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이른바 ‘갑을관계 민주화법’까지 국회에서 입법하겠다고, 6월 임시국회의 주요쟁점 법안으로 다뤄져야 한다고 논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언급되는 갑을관계라는 것은 우리 사회에 선진자본주의가 아닌 전근대적, 봉건적 인식의 잔존하기 때문에 슈퍼갑이 횡포를 부리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갑을관계가 본격적으로 폭로되기 시작하던 지난달 7일 한 신문사 기사의 제목은 “갑을이 주종관계? 그 시각이 화근”이었다. 자본주의사회는 대기업-대리점, 고객-승무원 등 계약관계로 굴러가고 여기서 계약당사자는 법적으로 평등한 것이 서구의 계약문화인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주종관계여서 지금 이 나라에서 갑을관계가 문제라는 것이다. 글쎄다. 이 세상에서 언제부터 계약이 평등하고 동등한 자들의 합의로 체결, 이행돼 왔다는 것인지. 그렇다면 이 나라가 선진자본주의의 계약문화가 확립되기만 하면 갑과 을이 평등하고 동등하게 계약이 체결돼서 이행되고 그야말로 자유의 왕국이 될 수 있는 것이겠다.

2. 왜 말하지 않는 걸까. 결코 이 세상에서 계약당사자는 계약을 체결하고, 계약의 내용을 정하는 데서 평등하고 동등하지 않다. 이 세상이 말해온 계약의 자유는 계약당사자의 의사에 따른 계약 체결을 말하는 것이었지, 그 의사를 정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이 세상의 힘, 즉 소유의 유무와 권력의 크기까지 전제로 한 자유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그가 가진 힘이 그와 계약을 체결하는 상대방의 힘보다 작아서 어쩔 수 없이 그것이 계약의 내용이 자신에게 불리하게 정해지더라도 그것은 이 세상의 법이 선언한 계약의 자유다. 그 계약을 해석해서 적용하는 법원은 체결된 계약의 내용에 따라 그에게 의무를 이행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거기서 그가 가진 힘이 없어서, 그 힘이 작아서 어쩔 수 없이 불리하게 체결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해봐야 소용없다. 이 세상의 법은 그런 그가 자신의 의사에 따라 하자 없는 법률행위를 했는지를 따져서 판단한다. 계약서에 그가 을이 아닌, 병이나 정으로 표기해 놓았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야말로 오늘도 갑과 을로 표기돼서 체결되고 있는 계약관계의 질서이다. 거기서 당사자들이 동등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3. 그런데 지금 누구나 말하고 있다. 갑을관계가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갑을로 표기하는 계약서가 문제라고 표준계약의 서식에서 이를 바꾸겠다고 한다. 갑을관계가 문제되자 고용노동부는 표준 근로계약서에서 사용자와 근로자를 갑을로 표기한 것을 바꾸는 것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고 뉴스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리고 갑의 횡포를 경제민주화 차원에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하도급관계에서 원청업체의 횡포를 막고, 대리점관계에서 본사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누구나 문제 삼고 있는 것들을 살펴보자. 그것들은 그저 체결된 계약관계 속에서 비정상적인 갑의 횡포에 관한 것이다. 공정한 시장 질서를 해한다는 것들에 관해서 말하고, 정상적인 계약관계 속에서는 행해져서는 안 될 것들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프랜차이즈법, 공정거래법, 하도급법 등 이미 수많은 법률에서 시장지배력을 가진 갑의 횡포를 시장경제질서에 반하는 불공정하고 부당한 행위로서 규제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것이 아니라도 지금 폭로되고 있는 협박, 욕설 등 ‘갑질’은 위법한 것으로 민·형사 책임을 져야 하는 것들이다. 결국 지난 한달 동안 이 나라를 들끓게 한 갑을관계, 갑의 횡포에 대한 규제는 이 세상에서 새로운 질서를 세워 갑을관계를 새로운 평등한 관계로 변경해 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문제되고 있는 갑의 횡포를 불공정행위의 유형에 포함시키거나 위법한 갑의 횡포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갑과 을은 계약관계에서 모두 그 계약상의 권리와 의무를 지는 동등한 계약의 당사자인데 어찌 갑이 주인인양 을을 노예로 맘대로 자신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계약 내용을 정하고 을을 부릴 수 있느냐며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새누리당이건 민주당이건 진보의 당이건 누구나 그것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4. 그런데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다. 어찌된 일인지 이 자본의 세상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체결해서 살아가고 있는 계약관계, 근로계약관계는 갑을관계로 말하고 있지 않다. 지금 이 나라를 들끓게 하는 문제들을 근로계약서의 갑을, 즉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에서 살펴보자. 근로계약 체결에서 사용자인 갑이 거의 모든 것을 정한다. 근로시간, 임금 등 근로조건의 내용을 정해놓고서 근로자인 을이 될 자를 정해서 근로계약을 체결한다. 그 조건도 근로계약서에서 사용자가 정해놓은 취업규칙에서 정한다고 해놓고 있다. 그야말로 갑이 절대적인 우위에서 계약의 내용을 정하고 있다. 문제는 그렇게 체결된 근로계약의 내용, 근로계약관계이다. 근로계약관계는 근로자가 임금을 지급받고서 사용자의 사용종속관계 아래에서 그 사용자의 구체적인 지시나 명령에 복종해 근로를 제공하는 관계를 말한다(대법원 1989.07.11 선고 88다카21296 판결; 대법원 1992.06.26 선고 92도674 판결; 대법원 1997.12.26 선고 97다17575 판결 등). 여기서 사용종속관계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근로계약관계도 아니다. 그야말로 사용종속관계가 근로계약관계의 실체인 것이다. 사용자와 근로자는 갑과 을로 계약의 당사자임에도 결코 동등하지 않고 그 계약에서는 사용종속관계 아래서 사용자의 지시나 명령에 복종하는 관계, 즉 주종관계인 거라고 보고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지금 갑과 을 사이에 문제라고 폭로되고 있는 것들은 사용자 갑이 노동자 을에게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행하고 있는 것들이다. 사용자는 일방적으로 취업규칙 등으로 그 업무의 내용을 정하고 사업장에서 구체적으로 근로자에게 이래라 저래라 지시·명령을 해 근로자 을을 부리고 있다. 이것을 이 세상에서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의 계약이라고, 법이라고 날마다 우리의 법원에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갑을로 시끄러워도 우리는 진짜 갑과 을은 말하지 않고 있다. 노동현장에선 법적으로 갑을이 사용종속관계, 즉 주종관계다. 그런데도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본사와 대리점의 관계를 갑을관계로 부당하다고 비판해도, 그 본사와 대리점 내에서 존재하는 사용자와 근로자의 관계를 갑을관계로 그것이 부당하다고 비판하지 않는다. 지금 문제라고 폭로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하고 있는 갑을관계는 근로계약관계에서는 그것이 문제라고 폭로하고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야 말로 근로계약관계의 실체라고 이 세상의 법은 선언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슈퍼갑을 말해도 이 세상에서 진정한 슈퍼갑에 관해서는 우리는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 오늘 수퍼갑의 횡포를 규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어도 이 세상에서 슈퍼갑의 횡포를 진정으로 규제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고작 근로계약관계에서 갑을관계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 근로자들 사이의 관계에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아직 진정으로 갑을관계를 말하지 않았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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