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현
공인노무사
민주노총 충남본부
법규부장

어느 날 조합원의 가족이라는 A씨가 상담을 요청했다. A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둘 생각을 하고 사업주와 사직일자를 합의한 뒤 퇴직금 지급을 요청했다. 그런데 사업주가 퇴직금은 줄 수 없고 적당한 수준의 위로금을 주겠다고 했단다. A씨는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다.

간단하게 몇 가지 확인해 보니 퇴직금을 받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이에 정식으로 퇴직금 지급요청을 하고 그래도 지급하지 않으면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하도록 안내했다.

며칠 뒤 A씨는 전화를 걸어왔다. 회사를 그만뒀는데도 사업주가 퇴직금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에 회사를 그만둔 B씨도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해서 함께 상담을 하고 진정서를 접수하기로 했다. 상담을 하다 보니 이들은 퇴직금뿐만 아니라 연차휴가도 제대로 사용한 적이 없었다. 퇴직금과 미사용 연차수당을 모두 요구했다.

진정서를 접수하고 10여일이 지나도록 노동부로부터 별다른 연락이 없었다. 그래서 근로감독관에게 전화를 하고 출석일시를 잡은 후 진정인들과 같이 출석조사를 받았다.

대질조사에서 급여나 재직기간에 관한 다툼은 없었다. 사업주가 퇴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사실은 명확했다. 미지급 연차도 단지 금액만 문제될 뿐이었다. 대질조사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퇴직금이나 연차수당과 관련해 더 이상 다툼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이후 출석조사에는 당사자들만 참석하고 진행상황만 체크하기로 했다.

진정사건 처리기한이 한 번 연기되고 난 뒤 A씨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근로감독관이 계속 연차수당과 관련해 대질조사를 한다며 출석요구를 한다고 했다. 이에 다른 직장에 다니고 있던 B씨가 눈치 보며 출석하기 어려운 관계로 연차수당을 포기할 테니 퇴직금만이라도 달라고 근로감독관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곧바로 근로감독관에게 전화해서 부당한 업무처리에 대해 항의했다.

출석조사를 한다고 해도 사실 조사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사업주는 처음부터 퇴직금은 물론 연차수당도 지급할 의사가 없었다. 노동부 조사 과정에서도 회사 입장은 바뀌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당사자끼리 적당히 합의시켜 사건을 종결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정인 입장에서는 더 이상 진술할 게 없는 상황에서 지급의사가 없는 사업주와 대질조사를 이유로 노동부에 불려 다니는 것이 고역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포기하게 되고 사업주와 소위 ‘원만한 합의’에 이르게 된다.

어쩌면 A씨의 사업주가 이러한 ‘원만한 합의’를 근로감독관이 강제해 줄 것으로 기대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경우 노동부는 노동자들이 체불된 임금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관이 아니라 사업주들의 체불임금 지급의무를 면제해 주는 도우미가 돼 버린다.

“우리는 고용노동부를 찾는 국민을 가족과 같이 대하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노동부 홈페이지에 쓰인 글이다. 임금체불 때문에 진정서를 접수한 A씨와 B씨는 노동부가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생각할까. 그들은 근로감독관이 이끌어 내는 ‘원만한 합의’를 최상의 서비스로 여길까. 아마 근로감독관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