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3일 오후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노동·통일운동가 고 이해삼 동지 추모식이 열렸다. 배혜정 기자

"해삼이 형이 제 결혼식 축의금 낼 돈이 없었나 봐요. '성환아, 니 발 사이즈'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서 '265입니다, 형님' 했더니 결혼식 전전날인가 신랑용 구두를 보내셨더라고요."

해맑게 웃고 있는 고 이해삼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의 커다란 사진 앞에 선 가수 박성환씨의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추모객들은 연신 흐느꼈다.

"자기 가진 건 없으면서 남들한테는 빈 주머니라도 털어서 주는 성격이었어요."

"늘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해 주던 분이었습니다."

지난 23일 오후 빈소가 마련된 서울 건국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추모객들은 빈손에 가깝게 살았지만 동지들을 대하는 마음만큼은 강팍하지 않았던 고인을 떠올리며 애도했다.

부리부리한 눈매, 두툼하고 억센 손, 제화공들의 형·아우로 기억되는 이해삼 전 최고위원은 지난 21일 밤 서울 강변북로에 세워진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 결과에 따르면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다. 이날 오전 진행된 부검에 참여한 고인의 지인은 "심장이 보통사람 두 배 정도 커져 있었고, 관상동맥이 세 개나 막혀 있었다"며 "부검의도 어떻게 이 몸으로 견뎠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더라"고 말하며 눈물을 삼켰다.

고인의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이었지만, 지인들은 '마음의 병'이 그의 죽음을 앞당겼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에 참여했던 고인은 지난해 이른바 '통합진보당 사태'에 따른 진보세력 분열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인을 지근거리에서 봐 온 최규엽 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은 "통합진보당 사태 이후 고인의 상태가 심각했다"며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다. 우울증 약도 복용했다"고 전했다.

고인에게 진보정당 운동은 평생의 과업이었다. 그는 1987년 고려대 학내시위로 구속·수감 생활을 끝내자마자 영세 제화공장을 찾아다니며 제화노조를 결성하는 등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97년 국민승리21,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지는 진보정당 운동에도 헌신했다. 자신을 오롯이 내맡겼던 진보정당·세력의 분열은 그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다. 이 즈음 고인은 "너무 힘들다", "죽을 것 같이 마음이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한다.

국민승리21 시절부터 함께했던 노회찬 진보정의당 공동대표는 "우리 모두 이해삼을 죽인 게 사실 아니냐"고 반문한 뒤 "이 동지의 죽음에 나 또한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비통해했다.

하지만 고인이 언제까지 슬픔에만 빠져 있었던 건 아니다. 최근 노동중심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정치 혁신·통합 전국단체인 '새로하나' 집행위원을 맡아 지역 조직활동을 펼치며 진보정당 재건에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박승흡 새로하나 조직위원장은 "27일 새로하나 출범을 앞두고 왕성하게 조직사업을 펼치다 운명을 달리했다"며 "가까스로 마음의 병을 딛고 일어서자마자 이렇게 황망하게 가 버려 가슴이 아프고 또 아프다"고 안타까워했다. 문성현 전 민주노동당 대표는 "나와 그의 공통점이라면 내가 소위 PD 성향이지만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더 많이 같이하려고 한 것이고 그는 NL 성향이지만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라고 추모했다.

분열을 딛고 일어서 새로운 진보정당 운동을 완성하고자 했던 고인은 남아 있는 진보세력들에게 숙제를 남기고 24일 오전 마석 모란공원 납골묘역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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