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욱 변호사
(금속노조 법률원)

지난달 3일 쌍용자동차 대한문 분향소가 방화로 소실된 적이 있다. 서울 중구청은 이를 계기로 같은달 8일 분향소 철거시도를 하더니 이달 4일 새벽 기습적으로 철거를 감행하고 그 장소에 화단을 설치했다. 그리고 경찰은 철거 과정에서 무려 49명의 노동자·시민들을 연행했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에 대해서는 영장청구까지 했으며 지금도 대한문 앞에서 개최되는 집회참가자들에 대해 수시로 연행 협박을 하고 있다.

위법한 공무집행

중구청과 경찰은 대한문 분향소 설치가 집시법·도로법 등 여러 법령을 위반하고 있어 적법하게 철거 및 행정대집행이 이뤄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저항하는 것은 공무집행방해라고 한다. 그러나 그간 여러 차례 보도자료를 통해 밝힌 바와 같이 집시법·도로법 위반의 문제는 없다. 되레 중구청의 철거와 행정대집행이 위법한 행위다. 서울행정법원은 지금의 분향소 규모보다 더 큰 천막이 있었는데도 교통소통에 방해가 되지 않으며 경찰의 집회금지통고가 위법하다고 판시한 바 있다. 김정우 지부장에 대한 영장청구 사건에서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는 철거 및 행정대집행이 위법하다는 취지로 영장을 기각했다.

누구를 위한 철거였나

중구청과 경찰의 개별적인 공무집행이 적법하냐 위법하냐를 따지기에 앞서 그들 주장대로 적법하다고 한들 도대체 그 “적법(適法)”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중요하다. 중구청과 경찰의 행위를 통해 보호하고자 하는 법익(法益)이 무엇인지 묻고 싶다. 중구청과 경찰이 제시하고 있는 법령들은 전부 소위 공공의 이익에 관한 법률조항들이다. 사익(私益)과 대비되는 공익(公益)을 보호하고자 하는 법률들이다. 중구청과 경찰이 주장하는 공익은 원활한 교통소통과 도로관리다.

현재 중구청은 대한문 분향소를 철거한 후 그 자리에 화단을 설치했다. 화단(花壇)이라는 것은 꽃을 심고 가꾸기 위한 것인데, 대한문 앞의 화단은 꽃을 가꾸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리를 차지해 분향소를 다시 설치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것이므로 화단이라고 볼 수 없다. 단순한 장애물에 불과하다. 장애물에 꽃을 꽂아 놓은 것일 뿐이다. 중구청이 주장하는 대로 대한문 분향소가 교통소통과 도로관리에 방해가 돼 철거한 것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은 그야말로 자가당착이고 중구청의 철거가 공익(公益)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익(空益, 누구의 이익도 아님)을 위한 것에 불과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 해결의 공익성(公益性)

좁은 지면에서 쌍용차 정리해고의 부당성에 대해 일일이 지적하는 것은 힘들다. 다만 그 올바른 해결이 가지는 공익성에 대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리해고 제도는 외환위기 당시인 96~97년 입법화됐는데 그 과정에서 매우 격렬한 사회적 논쟁이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 같은 유럽국가에서는 정리해고가 유효하기 위한 필수적 요건으로 해당 기업이 사회적 계획(social plan)을 제시하도록 하고 있다. 국가와 지자체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정리해고 문제가 단순히 한 기업과 정리해고 당사자의 문제로 치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한국사회의 사회적 문제인 쌍용차 정리해고 문제가 진실규명과 사회적 치유의 과정을 통해 올바로 해결되고, 그 과정에서 정리해고 남용을 방지하는 값비싼 사회적 교훈을 얻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큰 공익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구청과 경찰은 공익을 이유로 꽃을 심었다는 핑계를 더 이상 대지 말아야 한다. 지금 대한문 앞의 꽃들에게 필요한 것은 중구청과 경찰의 공익(空益)이 아니라 쌍용차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통한 공익(公益)과 정리해고된 피해자들이 희망을 가지며 다시 삶을 움켜쥘 수 있게 하는 희망(希望)이다. 마치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노래 가사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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