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공포로 시끄럽다. 핵폭탄과 미사일, 전쟁의 공포로 시끄럽다. 그런데 이 공포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가 나타난 것일까. 분명히 한반도의 남과 북, 아니면 태평양 건너편에서 잠자고 있다가 문득 깨어난 것이겠다. 개성공단사업도 남과 북의 대화와 협력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고 오늘 전쟁의 공포는 떠들어대고 있다. 정전이든 평화든 뭐든 전쟁 앞에선 안전할 수 없는 것이라고 공포를 선전하고 있다. 그래 있는 대로 말해보자. 지금 공포는 국가의 일이다. 전쟁의 공포, 그것은 국가의 지배자인 권력이 부르고 있는 노래다. 이 세상에서 권력은 전쟁을 통해서 또는 전쟁의 공포로서 더욱 더 강해졌다. 국가권력,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폭력이 힘이다. 인민에 대한 권력의 지배는 아무리 합리화해도 어떠한 평화의 언어로 설명해도 그 껍데기를 벗겨내면 그 힘의 실체가 무엇인지 드러나고 만다. 군주국이 아니더라도, 민주공화국이든 인민공화국이든 또 무슨 공화국이라도 어쩔 수 없이 그렇다. 전쟁 앞에서는 껍데기를 벗고서 그것의 실체가 드러난다. 이렇게 전쟁의 공포야 말로 국가권력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2. 이 세상에서 전쟁이 어디 국가 간에만 있을까. 제가 가진 폭력의 힘으로 제 의지를 관철하겠다는 전쟁이 어디 국가의 일만이겠는가. 이 세상에서는 종교든 경제든 언어든 문화든 뭐든 그 차이로 하나의 집단을 만들고서 다른 집단에게 제 의지를 폭력으로 관철해왔다. 하긴 인간의 역사에서 노동하는 인민과 권력이 아닌 그의 또 다른 지배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국가가 권력의 일로 자리를 잡고서부터는 노동하는 인민은 폭력과 경제적 강제로 나뉘어서 지배 받아 왔다. 어찌 보면 이 자본의 세상이 시작되기 전부터 경제적 강제로 권력이 아닌 지배자가 노동하는 인민의 노동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의 역사는 수천 년 동안 노동하는 인민의 또 다른 지배자와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노동하는 인민이 경제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항거는 그 지배자의 탄압뿐만 아니라 범죄로 불법으로 국가 권력의 폭력으로 엄단됐다. 이 자본의 세상에서도 그랬다. 봉건 권력과 지배자를 이 세상의 악으로, 공공의 적으로 규정짓고서 인민의 의지를 물질적 힘, 폭력으로 모아 봉건 권력의 폭력과 지배자의 재산을 몰수했다. 이렇게 세워진 이 시민혁명의 세상도 경제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항거는 여전히 범죄고 불법이었다. 노동운동은 일정한 요건의 파업 등 쟁의행위를 범죄와 불법이 아니라고 이 세상의 법전에 새겨 넣었다. 그러니 오늘 지배자 사용자에 맞서 경제적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노동자의 항거는 합법적으로 또는 불법적으로 취급되고 있다. 폭력과 경제적 강제로 구분돼서 국가 권력과 경제적 지배자가 각기 그것을 행사해야 한다는 세상에서도 물론 폭력은 여전히 지배자가 노동자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직접 사용하기도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만 그렇다. 그가 가진 재산의 힘, 즉 경제적 강제로써 노동자에게 제 의지를 관철할 수가 있으니 폭력은 국가의 일로 남겨둬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는 어떠한가. 제가 가진 힘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합법적인 항거수단으로 일정한 경우에 허용된다는 쟁의행위 중 가장 위력적이라는 파업조차도 단지 제 노동력 제공을 거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력 제공을 통해서만 생활할 수 있는 노동자에겐 그것은 합법적이라도 사용하기 어려운 전쟁의 무기다. 그건 어찌 보면 사용자의 힘, 경제적 강제를 전제하고서 행사하는 노동자의 무기다. 그러니 파업 등 쟁의행위는 이 세상에서 사용자에겐 근본적인 공포가 되지 못한다. 그저 얼마나 버틸지 당장 타협하면 내줘야 할 것과 타산하는 게 사용자가 할 일이다. 그런데도 노동조합의 임단투 시기만 되면 사용자와 사용자의 단체는 공포라고 시끄럽다.

3. 쌍용차, 재능 등 학습지교사, 현대차비정규직, 현대차지부, 기아차지부, 유성기업, 공무원노조, 진주의료원, 그리고 수많은 투쟁 사업장…. 정리해고, 노동자 지위, 정규직화, 주간연속 2교대제의 임금보전, 노조탄압, 해고자와 노조설립, 폐업, 그리고 임단투 등 수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는 여러 가지 제 요구를 관철하겠다고 사업장, 철탑과 농성장, 광장과 거리에서 사용자를 상대로 교섭을 하고 교섭을 위해서 사용자를 상대로 투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공포의 정체를 알고나 있는 것일까. 분명히 사용자를 상대로 이 나라에서 노동자는 파업하고 농성과 시위를 하고 있건만 사용자는 어떠한 공포에 떨고 있다는 것일까. 광장과 거리에서 농성과 시위는 사용자에게 여론에 조합원에게 호소하는 수단일 테고 그것이 사용자에겐 직접적인 공포가 될 수가 없다. 파업은 분명히 직접적으로 사용자에게 공포가 될 수 있겠는데 그것은 쉽지가 않다. 파업기금이다 뭐다 산별노조나 대규모 사업장노조에서 적립해놨다고 해도 그것으로는 몇 개월의 전면파업도 지속하기 어렵다. 그렇지만 이 세상에서 노동자에게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의 무기는 그야말로 노동자에겐 공포다. ‘신분에서 계약으로’, 그래서 노동하는 인민도 이 세상에 태어나 자유의 세상에 살련다고 노래하고 있건만 노동하는 인민은 근로계약을 체결하고서 노동자로서 사용자에게 복종한 채 살아가고 있다. 봉건의 세상에서 노동하는 인민이 그나마도 가졌던 노동의 생산수단, 농지에 대한 경작권이라는 1차적이고 직접적인 권리는 시민혁명으로 쟁취된 근대의 질서는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이제 전적으로 노동자는 제가 가진 노동력을 사용할 사용자의 처분에 전적으로 맡겨지게 됐다. 제 노동력을 제 값을 받고 팔기 위해서 교육과 훈련을 받고서 치열한 이력서 경쟁을 통해서 근로계약을 체결한다. 실업의 공포가 짓누른다. 노동자로서 일할 수 있는 것도 사용자의 처분에 달려 있다. 징계해고, 통상해고, 정리해고 등 해고는 언제나 사용자의 권한이다. 단지 노동법은 부당한 해고의 권한 행사를 제한할 뿐이다. 갖가지 사용자 사정에 의한 사업장 폐업과 해산은 위장된 것이 아닌 한 사용자의 권한이고 자유다. 임금 동결과 삭감 등 임금 조정, 잔업과 특근의 감축 등 근로시간 조정, 명예퇴직과 희망퇴직 권고사직, 정리해고 등을 통한 인적 조정, 기업의 합병 분할, 사업의 양도 등 기업 변동 등 사업장에서 절대적인 권력은 사용자에게 있다. 단지 최소한의 노동법적 제한이 가해지고 있을 뿐이다. 사용종속관계, 즉 노동자는 사용자의 사업장에서 사용자의 지휘·명령에 복종해서 사용자를 위해 일하는 자인 것이라고 이 세상의 법은 법원의 판례는 선언해오고 있다. 제 스스로 경작하는 농노도 아니고 제 스스로는 노동할 수 없는 노동자라고 규정지어졌다. 사업장에서 노동자는 그야말로 절대군주인 사용자에 복종하는 일하는 노예로 살아가고 있다. 진정으로 공포는 이런 것이다. 제가 살아가는 생존의 수단을 갖지 못한 채 생존을 위해서는 하라는 대로 복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것을 질서라고 부르든 법이라고 선언하든 진정으로 공포다. 그런데 이 진정한 공포로는 시끄럽지 않다. 거짓이 아니고 날마다 노동자를 짓누르고 있는 공포인데도 세상은 오늘도 평화를 노래한다.

4. 전쟁의 공포가 거짓인지 아닌지, 그것이 무엇이라도 그 공포는 권력의 일이다. 그것으로 권력은 더욱 더 강해진다. 그리고 노동자에겐 또 다른 공포가 있다. 노동자를 노동자로서 살아가게 하는 공포가 있다. 그것은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도 사용자는 날마다 그 무기를 행사하고 있다. 겁박할 것도 없다. 그저 행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도 너무도 당연하게 별다른 제한을 받지도 않고 노동자에게 행사되고 있다. 노동조합이 있어도 그것은 그건 당연히 사용자가 행사하는 권한이었다. 노동운동이 있어도 그것은 노동자가 직접 행사하는 것은 아니고 노동자가 행사하는 것이라고 의제된 채 여전히 노동자는 복종해서 일해야 했다. 자본의 세상이든 아니든 지금까지 노동운동은 이것을 위해서 많은 실험을 해왔다. 그러나 아직은 꿈꾸는 세상을 온전히 실현해내지는 못했다. 폭력이든 재산이든 뭐든 그것이 권력과 지배자의 힘인 한 노동하는 인민에겐 세상은 공포가 지배한다. 그런 세상에선 공포는 언제나 노동자를 떠돈다. 전쟁의 공포만 공포가 아니다. 노동자를 지배하는 이 진정한 공포로 시끄러워야 세상은 노동하는 인민의 세상을 말할 수가 있다. 공포가 세상의 질서인 세상은 아직 노동하는 인민이 꿈꾸는 세상은 아니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제10조와 “근로조건의 기준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도록 법률로 정한다”는 제32조 제3항의 대한민국 헌법은 노동자도 존엄과 가치를 가지는 인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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