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기 교수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라는 이유로 국내 개봉이 망설여졌다는 2009년 스페인 영화 <아고라>는 로마 시대의 천재 천문학자 히타피아의 짧은 생애를 다뤘다.

그는 종교를 무의미하다고까지 비판하며 당대의 혹세무민하던 이교도와 유대교 및 기독교를 동시에 비난하는 무신론자였다. 무신론과 지동설을 주장해 마녀로 재판받아 처형되기까지 그의 인생은 진리를 추구하는 삶이었다.

아고라를 종교와 철학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정치 영화로 읽는다면 우리는 권위와 대중의 신념이라는 코드로 분석할 수 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히타피아와 대립되는 인물들은 정치적 권위를 선택한 오레스테스와 종교적 권위를 선택한 키릴로스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보다는 다소 거슬러 올라가지만, 초기 로마의 권력은 정치적 권위에 기반한 것이었으나 후기로 가면 점차 종교적 권위에 의존하게 되고 이후 중세 암흑기로 이어졌다. 이 전환의 시기가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며 오레스테스가 키릴로스에게 굴복하는 것이 이를 상징한다.

로마의 권력은 주변국들을 끊임없이 침공해 복속시키는 무력과 신민들을 통합해 간 로마 시민권 사상에 토대를 뒀다. 로마 후기와 중세 시대의 권력은 교황의 정치 개입과 노예와 서민들을 통합시켜 낸 기독교 사상에 토대를 뒀다.

결국 두 시대의 공통점은 대중의 신념을 중요한 축으로 사회적 권위를 수립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초기 권력의 성립과 전환기의 권력 교체는 모두 대중들의 신념에 바탕을 둠으로써 가능했다는 얘기다.

영화의 제목이 아테네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고라라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우연이 아니다. 실제 정치적 논쟁과 종교적 토론이 아고라에서 시작되고 종결되는 장면은 영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신념은 권력 지향적인 선동가나 엘리트들에 의해 조장되고 동원될 때 혹세무민으로 이어져 진리를 거부하고 차단하기도 한다. 그리고 진리가 사라진 곳에는 결국 새로운 절대 권력과 전체주의적 권위가 들어선다.

직접민주주의가 전개되는 광장인 아고라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모독과 집단 학살이 버젓이 자행되는 장면들은 이를 표현한 것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집단들이 존재하고 이들 간에 갈등이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해관계의 다양성과 갈등은 억압이나 진압을 통해 해소할 대상이 아니라 인정하고 조정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이것은 비단 조정자인 정부나 국가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며 갈등 주체인 집단에게도 적용된다. 다른 집단을 배척하거나 모독하는 행위는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른바 ‘새 정치’는 국민의 이름만으로는 담보될 수 없다. 국민 자체가 단일한 ‘현 실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다수의 이름으로 포장된 추상일 뿐이다. 발전된 민주주의는 대중의 신념에 반응해야 하지만 다수의 신념만을 허용하는 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다수가 지배하는 상황에서는 소수의 비판이 더 진리에 가까우며, 이 소수가 억압받는 경우에는 더욱 그러할 공산이 크다. 따라서 억압받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 진리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으며 더 정의로운 사회를 도모해 갈 수 있다. 새 정치는 사회적 소수자들의 신념과 비판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때 진정 새로울 수 있다.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yungkee@y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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