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천과 바다가 만나는 쇠소깎에서 아침부터 여행객들이 카약을 즐기고 있다.

“항상 현장에 매여 있는 건설노동자들이 어디 시간 내기가 쉽나요? 부부끼리 이렇게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니까 금실도 좋아지고 스트레스도 확 풀리는 기분입니다.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시간이 헛되지만은 않은 것 같아요.”

대구 혁신도시 건설현장에서 지역난방 일을 하는 김준회(46)씨는 23년 만에 제주도를 찾았다. 동갑내기 부인 최미연씨와의 신혼여행 이후 처음이다. 부부로 지낸 세월이 무색하게도 가는 곳마다 손을 잡고 다녀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최씨는 “건설현장에서 먹고 자는 경우가 많아 남편을 보면 늘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며 “한 우물을 판 경력과 노력을 인정받아 이런 기회도 생긴 것 같아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건설노동자들을 위한 퇴직공제사업과 각종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건설근로자공제회가 남모른 곳에서 흙먼지를 마시며 일한 건설노동자들에게 ‘힐링 타임’을 제공했다. 공제회는 지난 24일부터 27일까지 건설업 유공근로자와 배우자를 제주도로 초청해 ‘2013년 건설근로자 한가족 탐방’을 진행했다.

이번 행사에는 지난해 건설기능인의 날 정부포상 수상자와 건설기능경기대회 입상자 등 12쌍의 부부와 2명의 개인이 참석했다.

▲ 최창석 팀장이 여행 첫날 열린 워크숍에서 건설근로자공제회가 진행하고 있는 사업을 설명했다.

"40년 철근쟁이인 남편이 가장 멋져요"

“혼저옵서예(어서오세요). 천혜의 자연이 숨쉬는 제주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제주도 출신의 베테랑 여행가이드 김선희(49)씨의 쾌활한 목소리가 제주국제공항을 가득 메웠다.

24일 오후 제주공항에 김포·대구·원주·부산·광주 등 전국 각지에서 날아온 건설노동자들이 모였다. 이들이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 오른 후 처음으로 간 곳은 제주공항 북동쪽에 위치한 용연구름다리였다.

“옛날 용이 살았던 연못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요. 한라산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이곳의 물이 만나 바다로 흘러갑니다. 계곡 사이를 구름다리가 놓여 있는데요. 밤이 되면 조명이 켜져 야경이 기가 막혀요.”

다리를 건너 오른쪽으로 돌면 해변이 펼쳐지고, 파도를 맞고 서 있는 거대한 현무암으로 이뤄진 바위 하나가 나타났다. 용의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용두암이다.

광혁건설에 소속돼 40년째 건설현장에서 철근쟁이로 살아온 박성규(59)씨와 그의 부인 한미자(56)씨의 몸짓이 바빠졌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어. 여기 와 봐.” 박씨의 손이 한씨의 어깨에 얹혀지자 용두암을 배경으로 다정한 부부사진 한 컷이 완성됐다.

“처녀 때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는 힘든 건설 일을 한다고 꺼려했던 적도 있었는데요.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어요. 40년 동안 한눈팔지 않고 한 가지에만 집중해 자식 둘을 공부시킨 남편이 가장 멋지고 근사해요.”
▲ 카멜리아힐에서 한 건설노동자가 부인의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있다.

건설근로자공제회 "1일 공제부금 인상 추진"

숙소로 이동해서는 이번 행사의 취지를 설명하고 공제회가 추진하고 있는 사업을 설명하는 워크숍이 열렸다. 공제회는 2010년부터 건설노동자들의 여가생활을 지원하고 추진사업에 대한 현장 노동자들의 의견을 청취하기 위해 건설근로자 한 가족 탐방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이달 31일부터 진행되는 2차 탐방을 포함하면 지금까지 8회에 거쳐 327명의 건설노동자 부부가 행사에 참여했다. 최창석 공제회 복지사업팀장은 “돈이 있을 때는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는 것이 건설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라며 “지난해 포상을 받은 분들을 중심으로 부부끼리 걱정 없이 여가를 보내시라는 뜻에서 행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최 팀장은 이날 워크숍에서 공제회의 핵심사업인 퇴직공제금 제도에 대해 소개했다.

“건설노동자들은 일반 상용직 근로자와 달리 현장을 자주 오가기 때문에 퇴직금 혜택을 받는 경우가 드뭅니다. 정부와 사업자단체가 97년부터 문제 개선을 위해 공제제도를 도입했는데요. 연간 252일 이상 일을 했을 때 퇴직금이 제공됩니다.”

공제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으로 피공제자수가 387만명, 부금조성액은 2조1천209억원에 이른다. 지금까지 19만5천315명의 건설노동자들에게 2천740억원의 퇴직공제금이 지급됐다. 1인당 평균 140만원이다.

최 팀장은 “현재 국가와 건설기업이 납부해야 하는 1인 공제부금이 4천원인데 많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며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1만원까지 인상하는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취업능력향상 교육훈련사업 △고등학생·대학생자녀 학자금 지원 △결혼출산보조금 지원 △유족 위로금 지원 등의 사업을 소개했다.

최 팀장은 "건설노동자들을 위해 2011년 보험료 전액을 공제회가 납부하는 단체보험에 가입했다"며 "올해부터는 채무불이행 등 건설근로자들을 위한 무료 법률지원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 직업훈련소 1기 수료생이라는 도로공사 작업반장 함종성(62)씨가 부인 김종옥(52)씨와 함께 유채꽃 사이에 섰다.

사는 곳은 달라도 '같은 건설노동자'

건설노동자들의 삶이 닮아서일까. 저녁 술자리가 시작되자 모르던 사람들 사이에서 말보따리가 풀렸다.

이들은 작업현장의 위험과 일에 대한 자부심 등 다양한 화제를 쏟아냈다. 강원도 고성에서 도로공사 작업반장으로 일하고 있다는 함종성(62)씨는 우회적인 수법(?)으로 건설노동자로 살아온 삶에 대한 만족감을 드러냈다.

“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이 만든 직업훈련소 1기 수료생이에요. 목수로 말이죠. 중간에 택시운전으로 잠깐 외도를 한 것을 빼면 40년 가까이 건설로만 살아왔습니다. 중동에도 다녀왔고요. 대한민국에 크레인 하나 없던 시절부터 현장에서 일을 했죠. 시멘트를 지고 공사판을 오르다가 죽을 뻔했던 적도 많아요. 최근 금강산 도로가 막혀 작업량이 줄었는데요. 요즘은 그게 좀 안타깝네요.”

"죽을 뻔했다"는 얘기가 나오자 옆에서 김준회씨가 거들었다.

“가끔 현장에서 난방을 위해 심어 놓은 파이프가 터지기도 하는데요. 난방용수는 도수가 높아 피부에 닿으면 심한 화상을 입어요. 일을 준 곳에 얘기하면 원청에 가서 따지라 하고, 원청에 얘기하면 일감이 떨어집니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하루에도 여러 번 위험한 순간이 발생하거든요. 원·하청이 서로 책임을 미루면서 일을 키우고 있는 셈이죠.”

한라건설 관리부장으로 일하는 이석균(54)씨는 28일 개통한 평택-시흥 고속도로 마무리 작업 때문에 뒤늦게 술자리에 합류했다. 이씨는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건설 입찰에서 최저가 낙찰제를 고수하고 있어 부실공사와 건설노동자들의 저임금을 야기하고 있다”며 “적정가 낙찰제로 제도를 개선하고, 국가가 나서 다단계 하도급 구조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3일 일당 대신 경험한 '힐링'

“오늘의 첫 코스는 한라산을 뒤로하고 있는 동백꽃 테마 공원 카멜리아힐입니다. 동백꽃의 꽃말 다들 아시죠? 영원히 당신만을 사랑해.”

참가자들은 봄이 한창인 동백 숲을 조용히 거닐며 힘든 노동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 부부 간 못다 한 얘기도 나눴다.

이를 기점으로 25~26일 이틀 동안 빡빡한 문화체험이 시작됐다. 새섬 트랭킹·쇠소깍 관광·유채꽃 농장 방문·올레길 투어·마라도섬 관광 등이 이어졌다.

광주광역시에서 25년째 페인트칠을 하고 있다는 조정순(66)씨는 올레길을 거닐며 남달리 즐거워했다.

“솔직히 지금까지 건설근로자공제회가 뭐 하는 곳인지 몰랐어요. 지금 보니까 건설노동자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네요. 한 이틀 일당을 못 벌었지만 이렇게 좋은 것 보고 맘 편하게 쉬어 본 지가 언젠지 모르겠네요.”

여행 마지막날인 27일에는 일출랜드 방문과 제주도의 명물인 말타기 체험을 했다. 이어 일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참가자들은 서로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다음을 기약했다.

삼성물산에서 아파트 재개발 방수교육을 한다는 장석현(57)씨의 아내 김복희(55)씨가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남편 자랑을 한마디 했다.

“공제회에도 고맙지만 33년간 방수 전문가로 일하며 레미안도 짓고 중동도 다녀온 애아빠가 최고야. 우리 남편이 진정한 마스터야,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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