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준은 현장에서 노래한다. 대개 천장 없는 거기 무대엔 비바람이 숙명같다. 지난해 9월 한 집회현장에서 우산을 쓴 채 기타를 조율하고 있다. 정기훈 기자

꼬마 시절부터 박준(53·사진)은 유행가를 꽤 잘 따라 불렀다. 초등학교 때 자신보다 1년 앞서 세상에 나온 노래 '처녀뱃사공(1959)'을 구성지게 불렀던 걸 보면 그때 이미 음악인으로서의 끼는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처녀뱃사공' 한 곡조 뽑으면 두 눈 지그시 감고 즐기던 동네 어르신들이 수두룩했단다. 지금도 투쟁현장에 가서 가끔 '나그네 설움'을 부르면, 조끼 입은 아저씨들 열에 아홉은 울기 마련이다. 'X팔' '개새끼' '소새끼' 욕을 덧입힌 '쎈' 노래만 잘 부르는 줄 알았는데 '뽕삘'도 충만한가 보다.

그래도 역시 '박준' 하면 '약속은 지킨다' '깃발가' '들불의 노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듯 터져 나오는 그의 노래를 듣다 보면 속이 뻥 뚫린다. 그가 셀 수 없이 많은 투쟁현장에서 러브콜을 받은 이유이기도 할 게다.

요즘처럼 노동현안이 펑펑 터지는 시기에는 박준의 발걸음도 더욱 분주해진다. 대한문·평택·아산·여수·밀양·울산·부산·제주…. 전국 팔도 투쟁현장에서 걸려 오는 전화를 가려 받을 법도 하지만 그네들의 절박한 마음을 알기에 공연요청이 들어오면 밤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내려간다.

그런 그도 웬만하면 다른 약속을 잡지 않는 날이 있다. 비정규직·해고·산재를 당한 노동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들불장학회' 거리공연이 있는 월요일이다. 이날은 오후 5시30분부터 밤 10시까지 명동성당 앞에서 후배가수들과 돌아가며 노래를 부른다.

박준을 만난 지난 18일도 월요일 저녁 명동성당 앞 공연장이었다. 마이크를 후배가수 연영석에게 넘긴 그는 "후배들이 있으니까 괜찮다"며 기자를 커피숍으로 안내했다.

사제를 꿈꾸던 청년

- 명동성당 앞 공연은 언제부터 하셨나요.

"85년에 우연히 후배 친구의 병문안을 갔다가 한 병실에 있던 다섯 살짜리 심장병 환자 주연이를 만났어요. 주연이한테 갖고 싶은 게 있냐고 물었더니 '숨 안 쉬고 밝게 웃고 있는 곰 인형' 얘기를 하더라고요. '숨 안 쉬고'라는 표현이 가슴에 팍 꽂혔어요. 이제 다섯 살짜리가 인생 다 산 것처럼…. 주연이 곰 인형 사 줄 돈을 모으느라 처음으로 성당 앞에서 노래를 시작했어요.

성당에서 앰프를 빌렸는데 고장 나서 신부님들한테 '돈 좀 주세요' 해서 고쳤어요. 그때 좋은 앰프가 있었나요. 파란색 확성기 2개 가져다 놓고 삐삐선으로 연결해 썼어요. 그야말로 마음 하나 갖고 시작한 일이었죠."

박준이 어떻게 명동성당에서 스스럼없이 앰프와 돈을 빌릴 수 있었을까 의아하다면 그의 전사(前史)를 알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그에게 명동과 명동성당은 고향이나 다름없다. 그의 20대 꿈은 사제였다. 신앙심이 깊었던 아버지의 영향도 있었지만 계성초등학교를 다니며 명동성당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유년기를 거쳐 명동성당 청년단체연합회(명청련) 활동까지…. 그때는 사제가 되는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명청련 시절 "형· 동생" 하던 전종훈 신부와는 함께 사제가 되자며 경남 산청의 나환자촌에서 도원결의한 사이다.

그대로 살았다면 사제가 됐을 박준의 팔자가 바뀐 건 이른바 '백골단'과의 악연 때문이다. 1년 365일이 데모였던 84년 명동성당 앞에서 백골단에 잡힌 여학생을 구하려다 곤봉으로 딱 '죽기 직전까지' 얻어터졌다. 정신을 차려 보니 병원이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몸무게가 48킬로그램까지 빠졌다. 몇 달을 산송장처럼 살았다. 사제공부도 접었다.

흔히 '심장병 어린이 돕기 가수'라고 하면 '수와 진'을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사실 원조 격은 박준이다.

"주연이를 알게 되면서 다른 심장병 어린이들을 많이 만났어요. 사제 공부는 그만뒀겠다, 할 일은 없고, 기타는 손에 있어서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한 공연을 꾸준히 했죠. 86년 5월에는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영혼의 메아리'라는 제목으로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한 콘서트를 기획했는데, 윤복희 선생님·해바라기·오선과 한음을 찾아다니며 콘서트에 모셨어요. 가수 김승덕씨가 군에서 갓 제대한 쌍둥이 형제가 있다면서 안상수와 안상진 형제를 데려왔죠."

- 심장병 어린이 돕기면 '수와 진'인데, 이전에 박준이 있었네요.

"하하. 그런가요?"


▲ 명동성당 들머리 공사 가림막을 배경 삼아 박준이 노래한다. 비정규,해고,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들을 지원하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이 함께 만든 명동 들불장학회 거리공연이다. <정기훈 기자>

소통을 꿈꾸는 가수

심장병 어린이 돕기로 시작한 명동 공연의 주제는 해를 거듭하면서 도시빈민·철거민·장애·노동으로 확장됐다. 94년에는 도시빈민음반 '시작의 노래'에 참여했다. 금속산업연맹가를 부른 박준의 음색에 매료된 노동가요 창작가 김호철의 끈질긴 권유로 99년에는 '민주노총 공식음반'이라는 이름을 단 '박준 1집'이 나왔다. 이 음반에는 '약속은 지킨다' '깃발가' '들불의 노래' 등이 담겨 있다. 박창수 열사 추모곡인 '들불의 노래'는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는 가사가 '너무 쎄다'는 이유로 당시 민주노총이 음반에 수록하기를 꺼려했단다.

"말이 안 되는 거였죠. '반동의 붉은 피'보다 더한 것도 할 판에…. '피의 불벼락을 내리자'고 한 노래도 있잖아요."

- 음반이 나온 뒤로는 투쟁현장에 뛰어들었겠네요.

"서울지하철 노동자들 파업에 거의 매일 갔던 것 같아요. 그때 딱 1주일 만에 7킬로그램이 빠졌어요. 2001년 한국통신 비정규직 파업 때도 붙어 살다시피 했어요. 마이크 대신 쓰는 헤드셋을, 그때 처음으로 낙원상가에 가서 사 왔어요."

- 그때 헤드셋이면 아이돌그룹이 주로 쓰던 거잖아요.

"서태지 같은 가수들이 썼죠. 그래서 처음에는 엄청 쪽팔렸어요."

- 쪽팔린데 왜 사용했나요.

"소통을 해야 하니까요. 맨날 700~800명 되는 인원이 인도에 늘어서 앉으면 그 줄이 얼마나 깁니까. 음향이 안 좋으니까 뒷사람들은 들리지도 않고…. 무대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데 꼭 원숭이가 된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생각에 헤드셋을 끼고 대오 속으로 들어갔죠. 가끔 무대 앞에 보기 싫은 사람이 앉아 있을 때도 헤드셋이 유용해요. 하하."

집회 판에 헤드셋을 도입한 첫 가수인 셈이다. 요즘에는 그 말고도 헤드셋을 착용한 민중가수들을 왕왕 볼 수 있는 걸 보면 박준이야말로 민중가요계의 '패피(패션피플)'다.

- 노래 부르기 싫을 때도 있나요.

"99년부터 지금까지 두 번 정도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몰라서 때려치우려고 했던 적이 있어요.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여기 있나 생각한 거죠. 2004년 비정규직 관련법안이 국회에 상정된 날, 여의도 앞 투쟁대오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뒤 20~30명이 앉아 있더라고요. 그때 남은 사람들 힘 좀 내자고 닭장차 위에 올라가서 노래하고 그랬어요. 그러고 나서 허무하기도 하고 성질도 나서 삭발했습니다. 머리카락이 꽤 길고 결도 좋아서 이발소 아저씨가 가발 만들겠다고 가져가더라구요. 나는 눈물이 나 죽겠는데."

박준은 집회현장에 알게 모르게 만연해 있는 문예일꾼들을 하대하는 듯한 분위기도 지적했다. 언젠가 한 노조간부가 그를 향해 "어이. 잠깐 이리 와 보라. (당신) 잘나가니까 우리가 부르면 자주 와야 된다"고 해서 대판 싸운 적도 있다.

"문예일꾼들은 노래 몇 곡 부르러 현장에 가는 게 아니에요. 최소한 현장에 대한 이해를 하고 사전공부를 하고 갑니다. 집회에 가 보면 별의별 일이 다 있어요. 대공장에 가면 더 심하죠. 최근에도 노래하려고 무대에 올라갔는데 밑에서 '빨리빨리 해라. 시간 없다'고 윽박지르는 거예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문예일꾼이 봉이냐'고 내지른 적도 있고…. 이런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보니 문예일꾼들이 확대재생산이 안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배인 나라도 계속 문제제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 요즘 현장에 가면 분위기가 어떤가요.

"글쎄요. 노동자들 숙여진 고개를 들게 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 스마트폰 때문인가요.

"아뇨. 뭐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사람들이 너무 힘든 거예요. 장기투쟁 사업장 같은 곳에 가면 분위기가 무거워요. 손배·가압류라는 게 사람을 감당 못하게 만들죠. 어깨가 축 쳐져 있어요. 공연할 때마다 '동지들, 고개 들고 어깨 펴고 힘 냅시다'는 얘기를 먼저 합니다. 노동자들을 짓누르는 게 뭘까요. 주제 넘는 얘기 같지만 근본적으로 노동계가 하나가 되지 못한 문제도 있는 것 같아요. 이소선 어머니가 말씀하신 '민주노총이든 한국노총이든 하나가 돼라'는 거 있잖아요. 다들 안다고 하면서 노력하지는 않죠. 이런 것들이 노동자들을 침체되게 만드는 것 같아요."

- 노래를 통해 이루고 싶은 게 있다면.

"음…. 지금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동지들이 가지고 있는 노동자란 계급, 그 자존심만큼은 세우자. 노동이란 단어를 떠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잖아요. 노동의 가치가 얼마나 숭고합니까. 세상을 만드는 위대한 힘이죠. 그런데 그 위대한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짓눌려 있다는 게 억울해요. 노동자들이 '노동자'라는 이름 앞에 어깨를 펴고 고개를 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50세가 되면 하늘의 뜻을 안다고 했던가. 어느덧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인 쉰을 훌쩍 넘겼지만 그는 하늘의 뜻을 깨닫기보단 평생 녹슬지 않고 싶다고 했다.

"법정스님의 잠언집을 보면 '녹슬지 않는 삶'에 대한 얘기가 나와요. 그걸 읽고 무릎을 탁 쳤어요. 그동안 선배들이 퇴색해 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이럴려고 거리에서 찬밥 먹어 가며 싸웠나 싶어 회한도 많이 들었거든요. 우리가 싸우는 이유와 싸워야 될 것에 대해서만 잊지 않는다면 평생 녹슬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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