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윤성
고양비정규직센터
공인노무사

노동문제는 묘한 메커니즘이 있다.

바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구조라는 것이다. 실업문제를 예로 들면, 기업들은 실업문제의 원인이 고용이 경직됐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고용유연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노동계는 재벌로 집중되는 부가 문제이며, 따라서 전체 고용의 90%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을 더욱 육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서로 이유가 다른 것은 바로 고용불안이 가중되느냐 마느냐에 있다. 얼추 봐도 심판역할을 해야 할 것 같은 중앙정부의 역할이 커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만약 정부가 중립이 아닌 어느 한쪽에 치우치는 판정을 하면 어떻게 될까. 2004년 통계청 자료를 보면 그 결과를 알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임금노동자 기준 비정규직 비율이 민간부문은 전년도 대비 동일하거나 약 2% 감소했지만 공공서비스업은 반대로 2.4%로 증가했다.

당시 비정규직 문제를 중재하고 해결해야 할 중앙정부가 오히려 비정규직 문제를 양산하는 주범 노릇을 했던 것이다. 중앙정부가 본연의 역할을 방기하고 아예 그 편의 주전 선수를 자처했으니 (노사관계의) 그 메커니즘이 제대로 돌아갈리 만무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모습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지금은 자본은 좀 더 야수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 먹잇감을 눈앞에 둔 채 침을 흘리는 그 야수.

전국 곳곳에서 이른바 용역깡패들(그들은 스스로를 사설경비원이라 부르지만)을 동원해 노조원들을 집단폭행 하고, 불법으로 직장폐쇄를 밀어붙이고,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라는 대법원 판결 따위는 ‘간단히’ 무시해 버리는 등의 자본의 행태는 막가파식 폭력성과 무자비한 일방성이 빚어낸 몰골이다.

안산시장이나 경기도지사가 SJM의 폭력사태를 관할구역의 주민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적극 팔 걷고 나선다면 경찰들이 그렇게 수수방관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홍익대 미화원분들의 최저임금 준수 요구에 대해 해당구청장이 나섰다면? 평택의 쌍용자동차 문제는? 부산의 한진중공업은?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안들을 어떻게 지역으로 가져올 수 있을까.

예컨대 지역노사민정협의회에 지역 노동분쟁에 대한 사적조정 우선권한을 부여토록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지역노사민정협의회 참여는 곧 노동자의 생존권과도 직결될 수 있는 사안이 된다.

좀 더 나아가 보자.

현재 상시근로자 30인 이상 사업장에 의무적으로 설치하도록 돼 있는 노사협의회의 운영에 관해 지역노사민정협의회가 관여할 수 있도록 강제한다면 집단적 힘이 월등히 약화돼 있는 노동자들에게 미약하나마 대화 채널을 열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상시근로자 10 인이상 사업장에 의무적으로 만들도록 되어 있는 취업규칙의 제정 및 개정까지 지역노사민정협의회에서 관여할 수 있도록 한다면 개별사업장의 일반적인 전횡에 말 못하고 힘들어하는 개별 노동자들에게 잠시나마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지역의 노동현안을 중앙정부의 채널로만 풀려고 한다면 이는 당연히 병목현상에 걸리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모든 지역의 노동문제를 지역에서만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하고픈 말은 의외로 지역에서 노동의 문제에 대해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의 정책과 사업이 누구나 할 것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디자인돼야 한다는 선행조건은 있다.

결국 상상력으로, 지역으로, 눈을 돌리자는 이야기다. 문제해결 채널을 복선화하려는 상상력을 발휘할 때라는 말이다.

내년에 선거가 또 있다. 기회는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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