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영
공인노무사
(노무법인 현장)

발병률이 인구 10만명당 3명에 불과한 희소질환인 다발성경화증. 어려울 것이라 예상은 했지만 역시 결과는 불승인이었다. 지난달 17일 다발성경화증 재발후유증으로 앞을 잘 볼 수 없는 김씨는 걸을 수 없어 휠체어를 탄 이씨와 함께 재심사 회의장에 어렵게 참석했다. 평소에 5분 이내로 끝나는 진술이 1시간 가까이 이어질 정도로 청구인도 위원들도 모두 열띠게 주장하고 질문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였다. 산재재심사위원회는 “다발성경화증의 원인과 발병기전이 현재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결과가 없으며 유기용제 노출로 인한 발병가능성을 강하게 인정할 만한 일관된 연구 결과가 부족하고 피재자가 유기용제에 어느 기간 동안, 어느 정도 노출됐는지에 대한 충분한 자료가 없다”며 재심사 청구를 기각했다.

두 사람의 산재 재결서는 각각 20쪽이 넘는 긴 내용이었다. 기각 판단의 근거는 병의 ‘명확한’ 발병원인이 현재 밝혀진 바 없다는 점과 유해물질에의 노출량을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없다는 것이었다. 즉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산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과연 재심사위가 필요하다는 명확한 발병원인과 노출량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하면 산재로 인정될 수 없는 것인가.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제37조는 업무와 재해 사이의 인과관계를 “상당인과관계”로 규정하고 있다. 법원은 이에 대해 "보통 평균인이 아니라 당해 근로자의 건강과 신체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고, 또한 인과관계의 입증 정도에 관해 반드시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입증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제반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 재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되는 경우에도 그 입증이 있다고 할 것"(대법원 98두10103 판결 등)이라는 입장이다. 산재보험법에 기초해 구성된 재심사위는 법원의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음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피해노동자와 대리인은 최대한 입증하려고 노력했다. 다발성경화증의 발병원인에 대해 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바가 아직까지는 없으나 자가면역성 질환이라는 점(과로·스트레스로 면역체계 이상이 초래되는 점을 인정해 업무관련성을 인정한 법원 사례가 있음)과 유기용제 노출이나 교대근무 등이 다발성경화증의 직업적 발병요인으로 추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존재하는 점을 설명하고 근거자료를 제출했다.

두 사람 모두 삼성반도체에서 일할 때 과로와 스트레스가 상당했고 유기용제에 노출되고 교대근무를 한 경험이 있었다. 이씨는 반도체 웨이퍼 가공라인에서 감광용액(포토공정에서 사용되는 물질로 유기용제가 포함된 화학물질 혼합액)을 주입하고 개방형 기계를 다루면서 감광용액에 수시로 노출됐다.

김씨는 IPA(아세톤 포함)를 하루 200시시 이상 사용했고 LCD 패널 주위에 회로판을 부착할 때 부착시 에폭시 수지가 열경화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유기용제에 노출(기계를 열고 수시로 드나들었음)됐다고 구체적인 진술을 했다.

당시 작업공정을 추정할 수 있는 각종 연구보고서도 제출했다. 왜 피해 노동자의 이러한 주장은 전혀 반영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재결서 어디에도 없었다. 재심사위가 상당인과관계가 아닌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한 입증이 있을 때만 업무와 재해의 관련성을 인정한다는 것을 이번 사건에서 재확인한 것이다.

상당인과관계라는 법리를 둔 취지는 업무상재해로 인정하는 폭을 의학적으로 규명된 것에 한정하지 않고 제반사정을 고려할 때 업무와의 관련성이 추정되는 경우 넒게 산재보험법으로 보호하겠다는 것이다. 취지 안에는 현대의학과 자연과학기술의 한계(인간이 모든 질병의 원인을 알지 못한다!)를 인정한 솔직함도 포함된 것이다. 법원은 현재 원인불명의 질병 또는 원인이 특정되기 어려운 질병의 경우 신체에 영향을 미친 작업환경에 대한 입증과 함께 다른 원인이 명백히 그 질병을 초래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산재로 인정하고 있다.

재결서 마지막에는 소수의견이 적혀 있었다. “상기 의견 외에 청구인이 근무 중 유기용제에 노출됐고, 직무스트레스를 불러오는 교대제 근무를 수행했으며, 불량제품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었고, 입사 전에는 건강했지만 재직 중 증상이 나타난 발병경위 등을 종합해 볼 때, 다발성경화증의 원인을 특정하지 못하는 이상 업무 관련성을 인정해야 한다.” 이러한 소수의견이 무시되고 의학적·자연과학적 인과관계로 산재 여부를 판단하는 지금의 재심사위는 또 얼마나 많은 산재노동자에게 기각판정을 내려 고통을 가중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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