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호
울산대 의대 교수

지난주 고용노동부 주최로 '업무상질병 인정제도 개선' 정책토론회가 있었다. 여기서 노사정이 함께 만든 업무상질병 판정절차 및 인정기준 개선방안이 발표됐다. 다수의 새로운 유해인자가 추가됐고, 표적장기별 직업병 분류방안이 새로이 제시됐다. 대체로 이전 인정기준보다 진일보한 것으로 평가됐으며, 향후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통한 보완 및 표준화가 과제로 제시됐다. 발표 후 참가자들의 활발한 질의가 있었다. 이때 느낀 점을 몇 자 적어 보고자 한다.

참가자들은 대체로 한국의 직업병 인정기준이 일본 또는 유럽 같은 산업선진국보다 훨씬 엄격하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제도의 차이 등으로 인해 국가 간의 비교가 간단치는 않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의 직업병 인정기준이 일본 또는 유럽 같은 산업선진국보다 더 엄격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한국도 최근 10여년간 비교적 빠른 속도로 외국의 인정기준을 받아들이고 있어 현재 산재보상에 있어 산업선진국 정도의 인정대상 및 인정 폭으로 운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정해진 인정기준에 미달하는 것이라도 역학조사평가위원회를 통해 직업병 여부를 폭넓게 심의하고 있다. 또 뇌심혈관질환 같은 일부질환은 어떤 나라보다 더 광범위하게 인정하고 있다. 아직 우리나라의 사회적 안전망이 부실한 것을 생각할 때 직업병 인정에 있어 산업선진국보다 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노동자가 질병에 걸렸을 때 직업병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질병에 대한 치료는 건강보험을 통해 받을지언정 휴업으로 인한 생계유지비(휴업수당)는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장기간 질병에 걸려 일을 할 수 없게 되면 생존권이 위협받을 수도 있다.

독일을 비롯한 여러 유럽 국가들과 일본은 산재보상제도와 더불어 사회보장적 차원에서 근로자의 비직업성질환을 위한 상병수당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직업병으로 인정되면 산재보상제도로 요양급여와 휴업급여로 보상을 받고, 직업병이 아니라고 판정되면 산재보상제도에서 받을 수 없는 휴업급여 대신 상병수당을 받는다. 즉 상병수당제도를 활용해 1년에서 2년간 비직업성질환(개인질병)으로 인한 휴업의 경우 휴업 초기에는 사업장이 부담하고, 나머지 대부분의 휴업기간에 대해서는 사회적 기금(건강보험 기금이나 국민세금 등)으로 휴업급여에 해당하는 상병수당을 지급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병수당제도는 개인질병으로 판정되더라도 요양하는 동안 노동자들이 생계 걱정 없이 재활을 통해 직장복귀를 하게 하는 사회적 안전망이다. 이런 사회적 안전망이 있음으로 해서 일본이나 독일은 엄격한 직업병 인정기준을 적용할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운영하고 있다.

요즘에는 직업병과 비직업병(개인질병)으로 확실하게 구분하기 어려운 범주의 질병이 점차적으로 늘고 있다. 그래서 ‘의학적 합의’에만 의존하지 말고 ‘사회적 합의’에 근거해 더 많은 직업병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산재보험의 인정 폭을 확대해 노동자들이 걸린 상당수의 질병을 보상하고자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고 판단된다. 아무리 산재보상 대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확대해도 산재보상제도의 성격상 불인정으로 인한 불만을 잠재울 수 없다. 또한 질병으로 인한 노동능력상실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할 수 없고 노동능력을 유지·보존할 수도 없다.

산업화를 미리 경험한 선진국에서 왜 직업병을 보상하기 위한 산재보상제도와 비직업병을 구제하기 위한 상병수당제도를 동시에 운영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국제노동기구(ILO)에서도 산재보상에 관한 협약(제121호 산업재해급여 협약·1964년)에서 직업병의 인정범위를 정해 보상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상병수당에 관한 협약(제130호 요양과 질병급여 협약·1969년)을 별도로 제정해 직업병과 비직업병을 구분하지 않고 질병으로 인한 휴업에 대해 급여를 줄 것을 규정하고 있다. 산재보상기금은 대부분 사업주가 내는 기금으로만 운영하므로 인정기준을 정해 그 인정범위를 어느 정도 제한하고 있는 반면 상병수당제도는 일반적으로 노사가 갹출한 기금으로 운영하기 때문에 비직업병(개인질병)에 대해서도 요양 및 휴업급여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때 갹출 비율은 나라마다 다르며, 유럽의 일부 국가들은 국민세금으로 그 기금을 운영하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노동자의 건강과 노동능력을 유지하려면 산재보상제도와 상병수당제도의 투 트랙 시스템이 절실하다. 앞에서 지적한 대로 물론 산재보상제도는 의학적 지식의 발전에 따라 꾸준히 업데이트돼야 한다. 그러나 산재보상제도 확대만을 통해 노동자의 건강을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고 노동능력을 유지·보존하고자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상병수당제도와 같은 사회복지제도에 대한 담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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