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은회 기자

한 대기업의 중간관리자로 근무하는 A씨.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그는 “4C가 뭔지 아느냐”고 물었다. A4용지는 알아도 4C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자면 4C는 coffee(커피타기)·copy(서류복사)·call(전화받기)·car(자동차운전)의 알파벳 약자란다. 시골에서 상경해 서울에서 대학을 나와 남들이 알아주는 대기업에 들어간 그가 마주한 현실이 바로 4C였다. 전화 하나 제대로 못 돌리냐며 욕먹기는 일상다반사. 신입사원 시절 비행기 시간에 늦은 회사 임원을 대신해 항공사에 “비행기 5분만 늦게 출발하면 안 될까요?”라고 전화를 걸었다가 면박을 당했다는 기억을 되새기며 그는 껄껄 웃었다.

이런 질문을 던졌던 기억도 난다. 어느 날 그는 “온갖 접대업무를 마치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면 가족들은 모두 자고 있는데, 나 혼자 불 꺼진 방에 멍하니 있는다”며 “그러지 않고서는 참아내기 힘든 기분을 아느냐”고 물었다.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그는 이렇게 소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다.

A씨는 40대 중반의 화이트칼라(white-collar)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2011년 우리나라의 화이트칼라는 427만명으로 2000년 313만명보다 36.4% 증가했다. 45세에서 59세에 해당하는 중장년층은 같은 기간 38만명에서 91만명으로 두 배 넘게 늘었다. 이들의 고용지속성은 심각한 수준이다. 화이트칼라의 체감정년은 53.9세로 기업이 정한 평균 정년인 57.7세보다 3.8년 짧다. 생산직 등 비 화이트칼라 직종의 체감정년 55.7세와 비교해도 2년이 모자라다.

중장년층 화이트칼라는 인건비 부담 탓에 기업들의 퇴직권고 1순위 대상이다. 최근에도 경기침체의 여파로 사무관리직을 대상으로 한 기업의 감원이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자녀교육과 결혼, 주택대출 상환 등 소비지출이 최대에 다다르는 시점에 내쳐지기 십상이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기껏해야 TV 드라마 속 궁상맞은 가장의 이미지만 남발될 뿐이다.

노동계 역시 ‘먹고살 만한 집단’이라며 화이트칼라에 무심했다. 그러는 사이 상당수 기업에서 화이트칼라와 블루칼라의 근로조건 역전현상이 현실이 됐다. 노조의 목소리가 큰 생산직의 노동조건이 개선된 반면, 노조의 힘이 약한 사무직의 노동조건은 후퇴한 것이다. 소리 없이 사라지는 화이트칼라의 고용현실도 ‘으레 그러려니’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이들에게 기댈 곳은 없다. 누군가는 이들에게 기댈 어깨를 내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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