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쓰고 싶지 않은데 써야 할 때가 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울어야 할 때가 있다. 쓰면 더 아프다고, 울면 더 슬프다고, 쓰지 말자 울지 말자 다짐해도 되지가 않는다. 지난 달 28일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해고자 윤주형이 자결했다. 평등하지 않은 이 세상에서 누구나 죽음을 자신의 의지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며 그는 스스로 죽었다. 어찌된 일인지 노동자 권리 타령하는 나는 요즘 노동자의 유서를 읽는 게 일이 됐다. “아무도 내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으면” 하고 구구절절 유서를 남겨 용서를 구했다. 하지만 “잊혀지겠다는 사람의 이름으로 장사하는 일은 얼마나 잔인한 일”이냐고, “나에 대한 원망도 함께 사라졌으면, 주지 못한 뜨거운 내 마음은 남지 않고 조용히 사라졌으면” 하던 그의 마지막 바람은 이미 짓밟히고 말았다.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차갑더라”던 그는 “허기진 마음을 채울 수가 없어 너무 힘이 들”고 “버티는 일조차 힘이 들”어 이 세상을 떠나갔다. 하지만 그가 떠난 세상은 여전히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그를 조용히 보내 주지 못하고 있다. 죽은 윤주형은 더 이상 말이 없고 그의 마지막 말, 유서를 읽은 산 자들이 지금 그의 장례를 말하고 있다. 그러니 지금 경기도 화성의 장례식장은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의 거처다. 지금 화성에서는 죽은 자의 입으로 산 자들이 자신의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인간의 역사에서 죽은 자의 장례는 언제나 그랬다. 한 번도 죽은 자가 자신의 장례를 치러 낸 적이 없다. 그러니 나는 그저 죽은 윤주형을 보내는 장례는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차갑지” 않기를, 죽은 자에게 산 자가 차갑지 않기를 바란다. 산자들에게, 그의 조직·노조·친구와 동지에게 바라 본다. 그런데 지금 산 자들의 끔찍한 장례식을 지켜보는 것이 너무 아프다.

2.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사람을 죽인다. 사람의 관계가 체계적으로 고정되는 조직이나 단체는 억압적일 수밖에 없는데 오죽하겠는가. 조직이 사람을 죽인다. 그러니 기아차 비정규직 활동가 윤주형은 “조직도 노조도 친구도 동지도 차갑더라”고 그의 마지막 말을 쓰고 말았던 것이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고 이 야단일까. 왜 자꾸 이 나라에서는 노동운동이란 게 이 모양인 걸까. 조직이 문제냐 노조가 문제냐 아니면 친구가 동지가 문제냐. 지금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한 없이 넓은 강이 울산에서는 지부와 지회를 가른다. 화성에서는 지부·지회, 사내하청분회와 해복투를 가르고서 흐르고 있다고 한다. 그래, 분명히 노조는 비정규직 해고자에게 차가웠다. 좌파건 우파건 노조는 곧바로 끌어안지 못했었다. 그런데 과연 그걸까. 과연 그것만일까. 그것이 윤주형을 차갑게 만든 거고 지금 그를 보내 주지 못하고 있는 걸까. 정규직지부라서 그를 비정규직을 쳐내는 것이란 말이냐. 도대체 언제부터 이 나라에서 민주노조운동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서 전개돼 온 거라고. 나는 말한다. 이 나라에서 운동은 정파를 가르고 흐르고 있다. 정파로 조직을 이루고 정파로 친구와 동지를 말하고 있다. 정파조직으로 비정규직의 투쟁이든 정규직의 투쟁이든 같이 서서 바라보고 같은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서 정규직지부의 간부나 활동가라서 비정규직투쟁에서 비정규직지회와 다른 것이 아니다. 지금 정규직지회의 간부나 활동가라서 장례일정에서 비정규직해복투와 다른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투쟁에서도 장례식장에서도 정파가 보인다. 그들이 노조니 지부니 지회니 또 무슨 노조조직이니 단체니 간판을 들고 서 있어도 정파를 갈라 흐르는 깊은 강이 나는 보인다. 그러니 윤주형은 조직도 차갑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가 활동했었던 정파조직에서 그가 어쨌는지, 정파조직에서 뭐라고 했길래 그가 차갑더라고 했는지 나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사실 나는 그가 속했다는 정파조직만의 문제라고도 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히 지켜보고 있다. 그를 차갑게 했던 이 나라 노동운동에서의 정파운동이 지금 그의 장례를 둘러싸고 대립하고 있다. 정규직노조니 외부단체니 어용이니 정치적 이용이니 하며 죽은 자를 부르며 장례를 산 자들 사이의 투쟁으로 전개되도록 하고 있다. 그들의 대립이, 그들의 투쟁이 이 나라 노동운동의 무슨 요구를 내걸고 그걸 쟁취하겠다는 것도 아니다. 그랬다면 그건 산 윤주형의 꿈을 위해 죽은 윤주형의 바람이 밟히는 것이므로 그의 장례식에서 용서를 구하면 될 일이다.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다. 기껏해야 해고자로 죽은 윤주형의 명예회복을 위해서는 사용자의 인사발령이 ‘원직복직이냐 신규채용으로 족하냐’로 대립하고 있다고 보여지고 있다. 도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다. 죽은 자를 위한 장례인지 산 자를 위한 장례인지. 도대체가 그게 뭐라고 이토록 대립하고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러니 그걸 안타깝게 지켜보는 나는 그저 다음과 같이 타협주의자의 노래를 할 뿐이다.

3. 나는 타협주의자가 분명하다. 자본 앞에서 노동자는 누구라도 노조로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권력 앞에서 노동자는 그가 누구라도 노동으로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노동운동에서 좌파고 우파고 개량이고 뭐고, 자본과 권력 앞에서 지금은 하나로 나아가야 한다고 나는 자꾸 말한다. 그토록 욕을 먹는 정규직노조라도 자본과 권력 앞에서 조합원·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맞서 활동하고 투쟁한다면, 지금은 하나로 가자고 해야 한다고 나는 말한다. 하나가 뭐겠는가.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으로 함께 하는 거겠지. 이게 어찌 쉽겠는가. 이게 됐다면 이 세상은 벌써 저 세상이 됐다. 이게 그토록 어려우니 몇 백년을 노동의 복종으로 자본의 역사를 써 내려가고 있는 것이겠지. 가끔 나는 이상한 생각이 든다. 혹시 지금 노동운동이 이 지경인 것은 무슨 거창하게 전망과 전략·전술이 정파조직에 따라 달라서 대립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착각해 온 거 아닐까. 그저 끼리끼리 패를 지어 그렇게만 소통하고 노조니 당이니 또 무슨 권력을 차지하겠다고 해 왔던 것이고, 그저 그렇게 모인 것 가지고 거창하게 무슨 운동이론을 가져와서 덮어씌워서 우리의 초라한 몰골을 가리고 포장해 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으로 투쟁하겠다는 노동운동이라면 그 투쟁을 위해서는 노동을 하나로 모아 낼 수 있어야 하고 그걸 위해선 자신이 패를 지어 온 정파니 제조직이니 그걸 넘어설 수 있는 용기와 희생을 감당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당연히 더 큰 조직이나 권력을 가진 쪽은 그걸 더 감당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화성상황, 모르겠다. 기아차지부 화성지회, 사내하청분회, 제정파의 제조직들, 그리고 해복투가 협의해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방안을 정리해서 자본 앞에서 노조로 하나된 힘으로 결과를 이뤄 내고 비정규직 활동가 윤주형을 기아차노조의 이름으로 보내 줄 수 있기를 나는 바래본다. 제 동지를 잃고 셋만 남은 해복투는 지금 기아차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니 뭐니 무슨 엄청난 요구를 하는 것도 아니다. 비정규직투쟁이 한창인 현대차에서였다면 당연히 제기했을 요구하고서 투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해복투는 그렇게 요구하고 있지도 못하다. 그건 무엇보다도 조용히 보내 달라는 윤주형의 유서때문일 것이다. 끝까지 투쟁해서 자신의 꿈,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실현해 달라고 유서로 쓰고 갔다면 지금 화성의 장례식장은 화성공장은 누가 뭐래도 비정규직투쟁의 장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쨌건 해복투는 해고된 동지를 해고자로는 보낼 수 없다는 것이고, “그럼 그러냐, 네 슬픔을 어찌 다 위로할 수 있겠냐마는 그래 함께 해보자”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야 정파니 제조직이니 뭐니로 갈라져 전개해 온 몇 십 년 민주노조운동의 역사가 그저 헛된 것은 아니었다고 한 번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니 뭔가. 지금 나는 타협주의자가 분명하다.

4. 사실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지금 화성에선 고작 말투와 태도로 대립하고 그것을 증폭시키고 있는 걸까. 그것이 노동운동의 정파가 달라서 노조나 조직의 노동운동론이 달라서 대립하고 있다고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그랬다면 죽은 자의 명예회복이니 뭐니가 요구로 돼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기아차에서 비정규직투쟁의 요구를 걸고서 투쟁하겠다고 했어야 했다. 그 투쟁의 방법을 두고서 서로 대립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투쟁 앞에서 어느 조직이 노조가 어떻고, 그 투쟁에서 비정규직 활동가 윤주형의 진정한 동지와 친구가 누구인지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때 노조가 사용자와 함께 비정규직투쟁을 짓밟는다면 어용이든 뭐든 노조에 대한 비난은 정당할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이번 일들, 발생하는 모습은 다르지만 어디 기아차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일이겠는가. 수많은 사업장의 노조활동에서 이래왔다. 비난은 정당한 비판이 되지 못하고 욕설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욕설로는 이 나라 노동운동을 활동가 윤주형이 꿈꾼 노동자세상으로 나아가게 할 수가 없다.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을 하나로 나아가게 할 수가 없다. 오직 노동자의 욕망을 노동자권리로 진화해 낼 수 있는 요구를 가지고 자본과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노동운동만이 어용이냐 아니냐를 판별해 준다. 죽은 자의 유서는 어차피 산 자가 읽어 내야 할 죽은 자의 말이다. 그것은 산 자가 자신의 말로서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지금 화성에서 죽은 윤주형의 유서는 조용히 보내 달라는 죽은 자의 유서로서도, 그렇다고 비정규직투쟁을 위해 조용히 보낼 수 없다는 산 자의 유서로서도 산 자들은 읽어 내지 못하고 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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