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선제라는 유령이 민주노총 주변을 배회한 지 오래다. 직선제를 하면 조합원의 직접민주주의가 실현된다거나 노조민주주의가 강화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민주노총의 발목을 잡아 온 것이다. 민주노총 침체의 모든 책임을 직선제에 돌릴 수는 없지만 알맹이 없는 직선제 논란이 민주노총의 조직 혼란과 활동 침체를 가중시킨 주된 이유임은 부인할 수 없다. 지도부를 직선하는 행위나 제도 자체를 직접민주주의라 한다면, 한국은 독재자 이승만이 종신집권을 위해 대통령직선제를 도입한 1952년 8월5일 정·부통령 선거 이래 직접민주주의를 시행해 온 나라가 될 것이다.

대표를 뽑는 선거 자체가 ‘간접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란 시민 혹은 인민 개개인이-자기 권한을 위임한 대표를 통하지 않고-직접 정책을 입안하고 법률을 결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현재의 민주노총 조직구조에 대비하면, 직접민주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민주노총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대의원대회를 없애거나 그 권한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 대신 민주노총의 최고의사결정을 가맹조직이 파견한 대의원이 아니라 (민주노총에 속한 산별노조 혹은 산별연맹 산하 기업별·지역별노조에 속한) 조합원이 직접 결정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제도적 변화는 거론하지 않은 채 위원장 직선제를 직접민주주의로 분칠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 부족이거나, 불순한 정치적 의도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노총의 대의원대회를 없애거나 그 권한을 축소한다고 노조민주주의가 강화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나 조직의 구성원 개개인이 정책 입안과 법률 결정에 ‘직접’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가 강조되는 배경에는, 선출된 대표가 자신을 뽑아 준 구성원의 의사를 대변하기보다는 민의를 배반하고 대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킬 수 있다는 현실적 문제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선출된 대표의 권한과 역할을 축소하고, 중요한 의사결정에 구성원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이 직접민주주의의 요체로 이해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구성원의 권한을 위임할 대표를 뽑는 행위나 제도는 직접민주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민주노총에서 논란이 돼 온 임원직선제야말로 대의민주주의, 즉 ‘간접민주주의’적인 것이며 현실에서는 그 의도와는 정반대로 산하 가맹조직의 조합원을 중요 의사결정으로부터 배제하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길게는 52년 8월부터, 짧게는 87년 12월부터 대통령을 직선으로 뽑아 왔지만, 이를 직접민주주의라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선제가 직접민주주의 실현이라면, 이명박-박근혜의 당선으로 직접민주주의가 강화됐다는 해괴한 형식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대통령도 직선으로 뽑는데, 노총 위원장도 직선으로 뽑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말만큼 유치한(childish) 주장도 없다.

한국에서 대통령직선제가 제자리를 잡아가건만, 직접민주주의는커녕 대의민주주의조차 갈 길이 먼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대통령보다 더 중요한 기관인 의회가 대통령의 절대 권력에 눌려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의회가 불구(不具)가 된 것은 계급계층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갈등을 대변하고 조정하지 못하는 정당들의 무능력과 더불어, 국민 직선으로 뽑힌 절대 권력자로서의 대통령과 역시 직선으로 뽑힌 국민 대표자로서의 의회라는 ‘이중 권력’ 상황 때문이다. 만약 직선으로 뽑힌 노총 위원장이 개인 혹은 정파의 견해를 (자기를 뽑아 준) 전체 조합원의 의사인 양 포장해 (반대파가 많은) 대의원대회에서 밀어붙인다면, 이를 직접민주주의의 실현이라 할지, 아니면 독단적인 의사결정이라 할지는 독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제대로 된 대표’가 절실한 오늘의 노동운동 

지도자라는 말이 있고, 대표자라는 말이 있다. 지도란 “어떤 목적이나 방향으로 남을 가르쳐 이끎”을 뜻한다. 대표란 “어떤 사람이나 단체를 대신하여 그의 의견이나 태도를 표함”을 의미한다. 지금 한국 노동운동이 침체와 위기에 처한 주된 원인으로 ‘어설픈 지도의 과잉’과 ‘제대로 된 대표의 부족’을 꼽고 싶다. 지도부와 활동가 가운데 ‘개인 혹은 정파의 목적과 방향으로 남을 가르치고 이끌려는’ 사람들은 많다. 반면 대의원대회를 비롯한 각급 의사결정 단위에서 (정파의 주장이 아닌) 자기를 뽑아 준 조합원과 단위조직의 목소리를 대변하려는 분위기는 위축돼 있다. 정파주의·분파주의가 판을 치면서, 노조 공식기구의 위신과 권위는 무너져 내렸다. 그 결과 노조민주주의도 무너져 내렸다.

뭘 해도 안 되는 조직들의 특징이 있다.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안 해야 할 일은 한다. 할 수 있는 일은 하지 않고, 할 수 없는 일은 한다. 직선제는 안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없는 일이다. 단일후보 추대가 아닌 이상 임원직선제를 하면 할수록 민주노총 조직은 내분과 혼란에 휩싸여 나락으로 빠져들 것이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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