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지난 9일은 두산중공업 노동자 배달호의 10주기였다. 늙은 노동자 배달호가 목숨을 끊을 당시 두산중공업은 노조와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수 십 억원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었다. 2003년 1월이었다. 이어 한진중공업이 손배 소송을 제기했고,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지회장 김주익은 그 해 10월 손배·가압류를 비판하며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10년, 지난 해 12월21일 한진중공업지회 최강서는 목숨을 끊었다. 최강서는 스마트폰 메모장에 마지막 말을 남겼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사수 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지껏 어떻게 지켜 낸 민주노조 입니까? 꼭 돌아와서 승리해 주십시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그의 유서를 읽으면서 나는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고 민주노조 탄압한다고 158억원 손해배상 청구하는 회사를 증오하며 돈이 전부인 세상에서 없어서 더 힘들었다고 절규한 한진중공업지회 노동자 최강서의 유서를 읽으면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10년,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두산중공업 현장에서 시꺼멓게 탄 늙은 노동자의 몸뚱이의 부검을 지켜봤던 나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한다.

2.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시간은 멈춰 있었다. 빌어먹을 노동운동의 시간이었다. 분명히 선언하고 약속했다. 2000년대 초반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에서 노조활동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가압류신청이 본격화됐다. 노동자들은 목숨으로 분노했고 당시 노무현 정권은 “불법파업이라도 비폭력일 경우 사용자가 파업으로 인한 손실을 묻기 위해 근로자에게 하는 손배·가압류를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다.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는 ‘손배·가압류 관련 노사정 합의문’을 채택했다. 노동계는 합법파업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하고, 경영계는 위법한 쟁의행위에 대한 민사책임을 합리적 범위 안에서 제기하며, 정부는 손배·가압류 남용방지와 제도 보완에 최대한 노력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그래서 민사집행법을 개정해(2005년 7월 시행), 근로자 개인에 대한 최저생계비(120만 원) 압류를 금지했다. 그런데 다시 노동자 최강서는 노조에 대한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에 절망하며 목숨을 끊었다. 최저생계비 압류금지제도가 권력에게는 손배‧가압류 남용방지와 제도 보완을 위한 최대한의 노력일 수 있었겠지만 노동자에게는 그렇지 못했다. 이대로라면 이 나라에서는 다시 10년이 지나서 배달호의 20주기가 돌아와도 노동자는 손배·가압류로 절망하며 목숨을 끊을지 모른다.

3. 그 동안 노조 쟁의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를 금지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법(노조법) 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돼 왔다. 폭력이나 파괴행위를 제외하고 그 밖의 노조활동에 대해서는 사용자는 손해배상청구를 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노조활동으로 발생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피보전채권으로 한 가압류신청을 할 수 없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노조운동의 요구는 불법행위를 막기 위한 손해배상청구제도에 관해 노조활동에 대해서만 예외를 두는 것이라는 반대 주장에 막혀 입법은 좌절됐다. 불법이라도 노조활동이니까 손해배상청구는 제한돼야 한다는 주장은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책임에 관한 민사책임제도에 합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합치될 수 없는 것이었다. 불법을 저지르고도 노조활동이니까 사회적 약자의 운동이니까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래서 기껏해야 민사집행법을 개정해서 노동자 최저생계비 압류금지제도를 도입했다. 그런데도 그것으로도 안 된다고 더 봐달라고 사정하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도 이 나라 노조운동은 지금까지도 그렇게 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니까 봐달라고 사정하고 무지막지한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를 노동자와 노조는 감당할 수가 없으니 제한해 달라고 주장해 왔다. 배달호와 김주익이 목숨을 끊은 직후에도, 최강서가 목숨을 끊은 지금에도 이 나라 노동운동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다시 10년이 지나서도 불법파업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로 노동자가 목숨을 끊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불쌍한 노동자와 노조운동은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에 절망하며 철회하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이 불쌍한 노동자타령으로는 10년이 지나서도 100년이 지나서도 이 나라 노조운동은 여전히 불쌍한 노동자타령을 불쌍하게 외치고 있을 것이다.

4. 노동자투쟁은 불쌍한 것이 아니다. 노동자권리를 위한 노동자의 투쟁은 불쌍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불쌍한 것이라고 말해 왔다. 자본에 맞설 힘이 없으니 불쌍한 노동자들은 함께 조직해서 교섭하고 투쟁할 수 있도록 해 주겠노라고 선언했다. 단결권·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은 그렇게 노동자의 기본권으로 보장된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렇게 대한민국 헌법 제33조는 노동자에게 노동기본권을 보장한 것이라고 해석해 왔다. 노동자의 기본권은 하늘에서 불쌍한 노동자들을 위해서 내려 준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러니 노동자는 자본에 감히 맞설 수 없는 사회적 약자여야 했고, 사용자 앞에 주눅이 들 수밖에 없는 불쌍한 근로자여야 했다. 그래야 권력은 법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해 주고, 그렇게 호소해야 법원은 그 법을 적용해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해 줬다. 그러나 아니다. 그렇지 않다. 노동자권리를 위한 노동자의 투쟁은 불쌍한 것이 아니었다. 노동자투쟁은 자본과 권력에 맞서 노동자권리를 세워 낼 만큼 당당한 것이었고 결코 불쌍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노동자권리는 노동자투쟁이 오히려 자본과 권력을 불쌍한 것으로 만들고서야 이 세상에서 권리로서 확보될 수 있었다. 노조활동에 관한 노동자의 권리는 더욱 더 그랬다. 100여년의 노동운동이 이 자본의 세상에서 노동기본권을 노동자의 기본권이라고 선언하게 했다. 그렇게 대한민국 헌법 제33조 노동기본권은, 노동자의 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은 규정됐다. 노동기본권은 불쌍한 노동자의 권리로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이 아니라 불쌍해서는 안 되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인간의 대지에 세워졌다. 그런데도 틈만 나면 불쌍한 노동자타령이었다. 교수도 판사도 이 나라에서는 보수의 당도 민주의 당도 심지어 진보의 당이라도 그랬다. 심각한 것은 노동정치를 말하는 노동운동이 밤낮으로 그 타령을 해 왔다는 것이다. 헌법은 노동자는 노동기본권을 가진다고 규정했다. 노동자가 단체로서 교섭하고 행동하는 것은 더 이상 범죄도 불법도 아니라고 헌법은 선언한 것이다. 불쌍한 노동자만 노동기본권을 보장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사실 하늘에서 떨어진 노동기본권이 아니라서, 노동자투쟁으로 쟁취한 것이라서 노동기본권은 불쌍하지 않은 노동자에게 보장된 기본권인 것이 마땅했다. 그런데 노조법은 노동자가 노동조합을 조직해서 교섭하고 쟁의하는 것을 그 주체·목적·시기와 절차·수단과 방법 등 수많은 제한과 금지를 정해 놓았다. 그것으로 노동자가 노조로서 교섭하고 쟁의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범죄가 되고 불법이 됐다.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행사를 보장한다는 노조법은 노동자의 노동기본권 행사를 범죄로 불법으로 규정해 버렸다. 노동자의 쟁의행위는 원칙적으로 노조법이 정한 주체·목적·시기와 절차, 그리고 수단과 방법에 따르지 않으면 쟁의행위로서 주체·목적·시기와 절차·수단과 방법으로서 정당성이 인정되지 않으면 범죄로 처벌되고 불법으로 손배‧가압류, 징계 등을 받아야 했다. 노조법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제한한 것도(헌법 제37조 제2항) 아니었다. 단순히 노무제공을 하지 않는 파업조차도 범죄로 불법으로 규제함으로써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의 본질적인 내용까지도 침해하는(동조 제2항) 법률이었다. 한 마디로 노조법이 노동자투쟁을 불쌍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노조법은 노동자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한 헌법을 부정하고 서 있는 법률이었다. 2011년 3월 파업에 대한 업무방해죄의 적용에 관해 대법원은 전원합의체판결로 “파업이 사용자가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전격적으로 행해져서 사용자의 사업운영에 심대한 혼란이나 막대한 손해를 입힌 경우에 한하여 업무방해죄로 처벌된다”고 형사책임을 제한했다. 그러나 이 대법원판례 변경은 불법파업에 관한 업무방해죄 적용에 관한 것일 뿐이다. 노조법 위반으로는 여전히 처벌된다. 이 판례 변경으로 불법파업에 관한 손해배상청구가 부정될 수 있다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아직 대법원은 쟁의행위의 정당성에 관해 법리를 조금도 변경하지 않았다. 정당성 법리가 변경되지 않고서는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는 부정될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은 쟁의행위의 주체·목적·시기와 절차·수단과 방법에 관해 제한·금지한 노조법을 폐지하지 않는 한 근본적으로 변경되기 어렵다. 법이 파업을 불법이라고 선언하고 있는데 아무리 노동자가 불쌍하다고 호소해 봐야 법원이 불법이 아니라고 판결해 주지 않는다. 기껏해야 손해배상액을 조금 감해줄 뿐이다. 그거라도 받아 내겠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노조법을 폐지하지 않고서는 이 나라 노동운동은 불쌍한 노동자타령만 할 뿐이다. 그러니 다른 길은 없다. 자꾸 힘들다고 이 나라 노동운동이 우회로를 찾아봐야 사용자의 손해배상청구에 절망하는 또 다른 최강서를 보게 될 뿐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노동운동은 가야할 길로 가는 수밖에 없다. 노동기본권을 부정하는 노조법을 폐지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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