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혜정 기자
예닐곱 명의 중년여성들이 서울 대한문 앞 농성촌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누군가 착잡한 얼굴로 "30여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네. 징글징글하다"고 말하자 그 옆에서 "그래도 지금은 말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어서 다행이지. 우리 때는 유신정권 아래서 입 한번 제대로 '쩍'할 수도 없었잖아"라고 맞받았다.

15일 오후 농성촌 앞을 서성이던 이 여성들은 1970~80년대 국가 차원의 노조탄압에 맞서 지금까지 복직 및 명예회복 투쟁을 벌이고 있다. 이른바 '알몸시위'와 '똥물테러 사건'으로 유명한 동일방직노조 조합원 출신들이다. '선배' 투쟁 노동자로서 쌍용자동차·한진중공업·풍산마이크로텍의 '후배' 노동자들에게 2천여만원의 투쟁기금을 전달하기 위해 농성촌을 찾은 것이다.

동일방직노조는 72년 국내 최초로 여성 노조지부장을 당선시키며 어용노조와 사측에 맞섰다. 하지만 76년 알몸시위와 78년 똥물테러 사건 등을 겪으며 조합원 124명이 대량해고됐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조합원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복직과 취업이 원천봉쇄돼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왔다. 2010년 3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중앙정보부가 동일방직노조를 비롯해 청계피복노조·반도상사노조 등 9개 노조를 와해시키고, 조합원들을 블랙리스트로 관리하면서 재취업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국가에 사과와 명예회복 조치를 권고했다. 이에 동일방직 해고 조합원들은 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12월21일 항소심에서 손해배상을 추가로 인정받았다.

김용자 동일방직 해고노동자 복직추진위원장은 "재작년에 동일방직의 노동인권 침해에 대한 국가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지난해 12월 말 서울고등법원으로부터 일부 승소판결을 받았다"며 "후배들과 작지만 기쁨을 나누기 위해 투쟁기금을 모아 전달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위원장이 "투쟁하는 후배 노동자들에게 힘이 되면 좋겠다"며 건넨 봉투를 받은 남태현 금속노조 풍산마이크로텍지회 조직부장은 "선배님들이 함께해 주셔서 든든하고, 투쟁의 물꼬를 계속 터 갈 수 있을 것 같다"며 "열심히 투쟁하겠다"고 화답했다. 김인수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부지회장은 "이명박 정부에 5년간 빼앗긴 민주주의를 박근혜 정부 5년간 되찾겠다"고 다짐했다.

17살에 동일방직에서 해고된 한순자씨는 "10대와 20대에 해고된 우리들이 지금 나이 60이 다 되도록 아직까지 투쟁할 수 있는 것은 동지들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라며 "옆에 있는 동지들을 믿고 똘똘 뭉치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고 격려했다.

김용자 위원장은 "우리는 박정희와 싸웠는데, 후배들은 그 딸하고 싸우게 됐다"며 얄궂은 현실을 원망하면서도 "노동현장에서 연대해 투쟁해 꼭 승리하자"고 주먹을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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