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신경숙만큼 우리 문학에서 욕을 많이 듣는 작가도 드물다. 그녀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책이 더 많이 팔릴수록 비판은 더 심해져 왔다. 신경숙 소설의 인기는 90년대 초 현실사회주의의 붕괴와 우리 문학권력의 스타제조 시스템이 만들어 냈다.

신드롬이 일만큼 각광받던 신경숙은 99년 표절논란에 휩싸인다. 타인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소재로 활용했다는 내용이다. 문학비평가 박철화씨가 <작가세계> 99년 가을호에 ‘여성성의 글쓰기, 대화와 성숙으로’라는 글로 신경숙의 표절을 처음 얘기했다. 신경숙은 처음엔 자신의 표절을 인정하다가 갑자기 부인한다. 자신의 맷집과 문학권력을 견줘 보면서 잠시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만 그 어디에도 ‘양심’은 없어 보였다.

이환이 2001년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에서 ‘베스트셀러 만들기’를 통해 우리 문학권력의 남루한 일상을 그려 냈을 때부터, 같은해 이명원이 <해독>에서 신경숙을 향해 “문제는 표절이 아니라 정신의 식민화”라고 단언할 때까지 그녀는 점차 권력이 돼 갔다.

그런 신경숙이 지난 4일자 중앙일보 기고로 “젊은 작가들에게도 귀 기울여라”라고 말했다. 서울시 선관위가 지난 대선 때 젊은 작가들 137명이 신문에 낸 시국선언문이 선거법 위반이라고 고발했다. 신경숙은 “작가들은 방식이 다를 뿐 태생적으로 시대와 불화하게 되어 있다”며 젊은 137명의 작가들을 옹호하면서 선처를 호소했다.

신경숙의 글은 ‘악어의 눈물’ 같기도 하고 알량한 ‘동업자 의식’ 같기도 하다. 암튼 최근 읽은 신경숙의 어떤 글보다 시사적이고 시대성 있는 글이어서 좋았다.

다음날 같은 소설가 하성란도 한겨레 고정칼럼에 ‘세대차’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이번 대선 결과가 지역대결에 더해 ‘세대대결’도 두드러졌다는 지적이 나온 뒤라서 더욱 눈길이 갔다.

자기 아이가 정형외과 병동 2인실에 장기간 입원했고, 병원측과 실랑이 끝에 어렵사리 창가 쪽 병상으로 옮겼다는 얘기다. 자기 아이가 퇴원할 무렵 다른 아이가 그 병실에 입원해 왔다. 자기 아이가 퇴원하는 날 그 아이 할아버지도 창가 쪽으로 자기 손주를 옮기려 했는데 병상을 맘대로 옮길 수 없다는 규칙을 내세운 병원과 마찰했다.

이게 칼럼 내용의 거의 전부다. 도대체 이 문제와 ‘세대차’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신변잡기에 소중한 지면을 파격적으로 내준 신문사의 태도가 더 납득이 가질 않았다. 이 신문이 신경숙 표절 문제제기에 가장 크게 열을 올린 바로 그 신문인데, 문학권력이 된 신경숙보다도 더 한심한 글로 매번 고정칼럼을 써 대는 하씨를 그냥 두는 게 더 우습다.

하씨의 글은 조선일보 독자권익보호위원이란 그 찬란한 경력에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 지극히 개인적인 글이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사람이 죽든 말든 상관없다.

신경숙이 그랬다. “작가는 다들 시대와 불화한다”고. 하씨의 글을 읽고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올까. 하씨는 바로 직전 칼럼 순서 때인 지난해 12월8일자에도 ‘통증’이란 제목으로 자기 아이 입원 이야기를 또 실었다.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보호자용 침대가 불편하다’는 얘기가 주 내용이었다. 그래서 ‘통증’을 느꼈단다. 참 별난 데서도 통증을 느낀다.

오직 유명인들의 허명에 기대려는 신문들 때문에, 이렇게 한심한 사람들에게 피 같은 지면을 파격적으로 뭉텅뭉텅 내주는 신문들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작가들이 더 이상 시대와 불화하는 대신, 병실 침상이나 보호자용 침상하고만 불화한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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