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 이후 신문이고 방송이고 안 봅니다. ‘박근혜 당선자’라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아요. 도저히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철도노조 조합원)

“저 역시 (대선 뒤) 매체를 안 보고 있어요. 하지만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니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만은 없겠지요.”(인천지역 노동자)



진보정치, 그 참담한 결과



지난해 12월 대선 이후 절망하고 있다는 노동자들의 목소리다. 박근혜 당선자를 지지하지 않은 48%를 두고 ‘멘붕상태’라고들 칭한다. 그중 노동자들의 상태가 가장 심각하다. 대선 뒤 일주일 새 4명의 노동자와 1명의 시민활동가가 목숨을 잃었다.

절망의 원인은 다양하다. 하지만 노동·진보정치의 책임을 간과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지난 대선에서 진보정치는 참담했다. 통합진보당 사태와 민주노총의 정치방침 붕괴 뒤 진보정치는 분열의 아이콘이 돼 버렸다. 대선에서도 각개전투를 치렀다.

7명의 대선후보 중 무려 4명이 노동·진보진영 후보였다. 야권단일후보인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1천469만2천632명·48.0%)를 제외하더라도 이정희 통합진보당 후보(중도사퇴)·김소연 무소속 후보(1만6천687명·0.05%)·김순자 무소속 후보(4만6천017명·0.15%)가 출마했다.<그래프 참조> 심상정 진보정의당 후보는 후보등록 전에 사퇴했다.



진보정치, 제3세력인가



“자기들끼리 싸우고 분열된 거 아닙니까. 누구한테 뭐라고 할 수 있겠어요?”

노동계에서 자조적으로 나오는 목소리다. 진보정치의 초라한 현주소의 배경에는 통합진보당 사태가 자리 잡고 있다. 2011년 하반기에 옛 민주노동당·국민참여당·진보신당 탈당파가 뭉쳐 통합진보당을 출범시켰다. 시작은 좋았다. 지난해 4월 총선에서 13석을 확보했다. 기대했던 20석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진보정당 역대 최다 의석을 기록했다.

그러나 같은달 곧바로 터진 통합진보당 사태는 진보정치를 자멸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부정선거 시비와 당내 폭력사태를 연출했다. 2004년 옛 민주노동당이 10석의 의석을 얻은 뒤 구축한 '제3세력'의 지위가 무너졌다.

지난 대선에서 이 공간이 안철수 후보로 상징되는 중도세력으로 대체됐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김윤철 경희대 교수(정치학)는 “안철수의 등장은 진보정치가 차지하고 있던 공간의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진보정당은 제3당이지만 제3세력은 아니다”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반성과 성찰? 여전한 '앙금'



노동·진보진영은 어떤 평가를 내놓고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반성과 성찰은 찾아보기 힘들다. 통합진보당과 진보정의당 사이에 깊이 패인 불신의 골은 여전하다.

통합진보당은 “이번 대선에서 당이 부활했다”는 자체 평가를 내놨다. 강병기 상임선대위원장(비대위원장)은 지난달 20일 선대위 해단식에서 “2012년 5월부터 돌아보면 우리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 이정희 후보가 부활할지 아무도 믿지 못했다”며 “그러나 대선을 거치면서 이 후보와 당이 부활했다”고 말했다.

물론 당 내부에서는 다른 분석도 나온다. 통합진보당의 한 관계자는 “당이 분열하면서 대선에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왜 그렇게 됐는지 돌아봐야 하지만 그것이 특정정파(경기동부연합)에 대한 것이어서는 곤란하다”고 선을 그었다.

진보정의당은 “진보정치 주체가 미비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이정미 진보정의당 대변인은 “진보정치가 후진세력이자 존재감도 기대도 없는 세력이 되고 말았다”고 아쉬워했다.



분열 또 분열 … 후보전술 논란도



진보정치의 분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2월 진보신당 잔류파와 사회당이 진보신당으로 통합했는데, 이들은 대선후보 전술에 대한 의견차로 분열했다. 진보신당은 김소연 무소속 후보를 지지했다.

그러자 옛 사회당 일부는 탈당을 감행하면서까지 김순자 무소속 후보를 세웠다. 일부는 진보신당에 남아 김 후보 지지의사를 밝혔다. 이로 인해 홍세화·안효대 공동대표가 사퇴했다. 진보신당은 직무대행체제를 거쳐 지난달 22일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박은지 진보신당 대변인은 "진보정당이 살아 있었다면 대선 국면에서 나름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며 "진보정치가 뿔뿔이 소실되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호동 김소연 무소속 후보 공동선대본부장은 “김소연 선본은 애초에 득표율보다는 비정규직·정리해고 반대 이슈를 가지고 대선투쟁을 한다는 데 방점을 찍었다”며 “그런 점에서 성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소연 선본측은 노동계급정당을 추진하겠다는 뜻도 밝혔다.

진보신당은 이달 28일부터 다음달 1일까지 당대표 선거를 치른다. 김순자 무소속 후보 출마에 대한 논란이 예상된다.



노동·진보정치 세력 어디로 가나



“지금 억지로 희망을 찾기보다는 각자 몸을 추스르다가 자연스레 연대의 기회를 만드는 게 낫습니다. 당장 진보정치를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진보정치를 구성하는 각 세력은 "진보정치가 어디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한목소리로 이같이 답했다. 이의엽 전 통합진보당 정책위의장은 “진보정당은 언젠가는 복원돼야 하지만 지금 그것을 강제할 힘이 누구에게도 없다”며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사태 뒤 진보정치 통합흐름이 다시 형성된 게 2010년 지방선거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2014년 6월 지방선거가 그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진보정의당은 올해 6월을 목표로 제2 창당 작업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이정미 대변인은 “지난해 10월 진보정의당을 창당하면서 제2 창당을 통해 노동·진보의 기반을 확장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며 “대선을 면밀히 평가해 제2 창당의 방향성과 주체 문제를 고민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진보신당은 조만간 치를 당대표 선거에서 조직을 정상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장석준 전 진보신당 정책위의장은 “자본주의가 흔들리고 대안을 찾으려는 흐름이 존재하는 한 진보정치는 희망이 있다”며 “진보신당은 노동과 녹색 중심의 환골탈태한 재창당으로 가야 한다고 본다”고 강조했다. 이 밖에 노동계급정당을 표방하는 김소연 선본 그룹과 ‘노동중심의 진보적 대중정당 건설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노진사)·노동자정당추진회의, 전현직 진보정당 지도자모임, 민주노총 전현직 위원장모임 등 각 그룹이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주목된다.



노동자중심 진보정당으로 가는 길



진보정치의 통합흐름을 재구축하기 위해 무엇보다 민주노총이 중심을 잡아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정호희 민주노총 대변인은 “지난해 통합진보당을 통한 1기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실패한 이후 새로운 정치세력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민주노총 임원직선제 사태로 인해 논의 자체가 실종됐다”며 “대중투쟁력을 복원해 새로운 진보정치를 만들어 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진보정치가 무너진 탓일까. 13년 전 옛 민주노동당이 출범할 당시 노동자들이 외쳤던 구호가 다시 회자되고 있다. '노동'과 '현장', 그리고 '민중'이다. 이에 대해 정영태 인하대 교수(정치학)는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면서도 "민주노총과 같은 노동자 대중조직은 비정규·서비스·중소영세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정책을 생산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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