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긴 겨울, 팥죽을 끓여 나눠 먹었습니다. 수제비로 만든 옹심을 나이만큼 넣은 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세밑은 따끈한 동지 팥죽을 나눠 먹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성찰의 시간입니다. 어려운 이웃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이런 풍경을 기대하기 어려워졌습니다. 지난 19일 대통령 선거가 끝난 후 노동자들이 삶을 놓아 버리고 있습니다. 벌써 네 명의 노동자와 사회단체 회원이 목숨을 끊었습니다. 장례를 돕던 한 노동자는 충격과 비통함을 견디다 못해 심장마비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이들에겐 자신을 되돌아보는 세밑은 사치였습니다. 상처 입어 절벽에 서 있는 이들에겐 해가 바뀌는 것조차 고문이었던 탓이죠. 두 아이를 둔 아빠였던 고 최강서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직차장에겐 다가오는 시간이 악몽이었습니다. 마지막 남긴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절박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 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회사 경비대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도 원직복직 꿈을 잃지 않았던 고 이운남 현대중공업 사내하청 해고노동자도 마찬가지 심정이었습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어 온 이운남씨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양심이 허물어진 삶은 의미 없는 삶이라 생각한다.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며 살고 싶었고, 회사 폭력의 후유증으로 우울증을 앓아 왔지만 원칙을 잃지 않고 살아왔다.”

혹자는 이들의 죽음을 두고 대통령 선거의 후유증 정도로 치부하려 합니다.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은 박근혜 후보의 당선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닙니다. 천문학적인 사용자측의 손해배상 청구와 노조 탄압,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과 구사대의 폭력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봐야 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사회적 타살’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죽음을 개인의 선택으로 축소하려는 이들이 있습니다. 유가족으로부터 교섭권을 위임받은 금속노조가 ‘최강서 열사 관련 교섭’을 요구했으나 한진중공업측은 거부했습니다. ‘금속노조는 교섭대표권이 없다’는 게 회사측의 공식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회사측은 “(최강서씨의 자살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인 사안”이라며 “노사 문제와 직접 관련이 없어 교섭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고, 대화에 나서야 할 한진중공업측은 되레 고인의 주검에 침을 뱉은 것입니다. 최강서 조직차장은 지난해 원직복직됐지만 강제휴업조치에 따라 곧바로 휴직자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생활고를 겪었던 해고자시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셈이죠. 그가 몸 담았던 한진중공업지회도 회사측이 지원한 기업별노조에 단체교섭권을 내줘야 했습니다. 희망버스 이후 노사는 손해배상을 최소화하기로 합의했는데도 회사측은 한진중지회에 158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최강서 조직차장이 절규했던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럼에도 회사측은 이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당선자는 ‘국민대통합 시대를 열겠다’고 밝혔습니다. 그가 국민대통합을 호소했지만 한진중공업측은 귓등으로도 안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노동자의 죽음을 두고 책임 회피로 일관하고, 대화는커녕 사태를 키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는 박 당선자가 자초한 일입니다. 박 당선자조차 노동자들의 잇단 죽음에 언급조차 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일부 사용자들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미뤄뒀던 노조간부 징계를 강행하거나 노조에 대한 강경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일부 사용자들은 박근혜 정부를 이명박 정부의 연장으로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박근혜 당선자는 ‘약속을 지키는 정치인’이라고 평가 받았습니다. 국민대통합을 약속했다면 지켜야 합니다. 적어도 ‘비즈니스 프렌들리’를 외치며 기업의 손만 들어주던 이명박 정부와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야만 노동자들의 죽음 행렬을 막을 수 있습니다.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청구와 노조 탄압이 노사관계를 파탄내고,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몬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합니다. 철탑 위에 올라 목숨을 건 농성을 벌이고 있는 이들을 위해 쌍용차 국정조사 실시와 현대차 불법파견 대법원 판결 이행도 서둘러야 합니다. 그것이 대통합시대를 열겠다는 박 당선자의 첫 행보가 돼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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