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현
공인노무사
노무법인 삶
대표노무사

올해 하반기에 민주노총 추천으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위원으로 위촉됐다. 과로사 등 산재질병 사건을 여러 번 진행했지만 뭔가를 판정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제도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노동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유리한 심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첫 질판위 심의회의에서 회의시작과 동시에 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2~3쪽짜리 심의안

회의 5일 전에 연락을 줘서 참석하겠다고 했다. 질판위에서는 20건이 조금 안 되는 사건에 대해 2~3쪽짜리 심의안만을 메일로 보내왔다. 사진도 없고 영상필름도 없고 질판위에서 정리한 내용의 딱딱한 텍스트만 있었다.

필자를 비롯한 질판위 위원들은 실질적인 판정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판정에 따라 업무상질병 여부가 결정된다. 우리나라처럼 복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곳에서 이것은 한 사람과 한 가족의 생사 여부를 판정하는 일이다. 그런데 위원들에게 신청인이 작성한 서류를 비롯해 다른 서류들은 전혀 제공되지 않은 것이다.

메일을 확인하고 질판위에 3가지 요청을 했다.

“신청인이 낸 서류 전체를 확인할 수 있게 해 달라.”

“산재보험법에는 위원 제척·기피·회피에 대한 권리가 보장돼 있으니 신청인에게 위원명단을 제공해 달라.”
“신청인에게 질판위 의견진술권이 보장돼 있으니 실질적으로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해 달라.”

메일로 답장이 왔다. 전체 서류를 볼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빠른 시간 내에 시스템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해 본다고 했다. 그게 언제인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는 답은 없었다. 위원명단은 현재 비공개라서 공개할 수 없다고 했다. 의견진술에 대해서는 회의 일정을 알려 주고 있다며 서류 전체를 미리 보는 것은 당일 회의에서 가능하니까 조금 일찍 오라는 회신이었다.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필자가 업무상질병으로 산재신청을 했던 서류들이 심리될 때도 이처럼 2~3쪽짜리를 갖고 그 위원들이 판정을 했을 텐데…. 제대로 판정되지 않았겠구나. 의견진술을 하러 가면 그 위원장님은 우리가 서류를 꼼꼼히 다 읽어 봤다고 하면서 요지만 간단히 얘기하라고 했는데, 거짓이었다. 필자가 낸 서류에 다 있던 것을 물어본 것이 사실은 읽을 수조차 없었다는 것을, 그 위치에 가서 명확히 알게 된 것이다.

신청인의 서류, 읽지조차 못해

하여간 질판위 회의에 갔다. 조금 일찍가서 컴퓨터에 앉아 전체 서류를 살펴보려고 했다. 30분 정도 일찍 갔는데, 종이로 뽑혀 있지도 않았다. PDF 파일로 저장된 서류를 컴퓨터로 보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한두 명의 것을 보자 회의가 시작됐다.

필자가 요구한 3가지 사항을 질판위 담당자에게 다시 얘기를 했더니 오늘 끝나고 얘기하자고 했다. 그 자리에 계속 있어야 할지 고민이 됐다. 하지만 그날 심리하는 안건들이 공정한 심리를 받아야 할 사건이라고 생각했다. 회의가 시작된 뒤 “서류를 처음 보는 것이니 오늘 서류를 확인하고 일주일 후에 다시 회의를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위원장은 모든 서류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의된 바가 없다고 답했다. 개인정보 관련 문제가 있고, 지금까지 아무 문제 없이 잘 진행돼 왔다는 것이다. “그런 일을 하려면 질판위 직원들이 더 많아야 한다. 여기 다들 바쁜 사람이어서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서류도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고, 단지 질판위에서 정리된 서류만 보고 결정을 할 수는 없었다. 절차상 공정하지 않은 판정에 동참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신청인이 낸 서류는 보고 맞다 틀리다 얘기를 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질판위 위원들의 가족이 신청을 했다면 이렇게 심의를 할 수 있었을까.

항의를 시작하자

과로사를 비롯한 뇌심혈관계질환은 지난해 2천475건 중 87.1%가 불승인됐고, 2010년에는 불승인율이 85.6%였다.

왜 그럴까.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질판위 위원들은 산재신청 노동자들이 꼼꼼히 정리해 입증한 서류를 볼 수가 없었다. 신청자들에게 주어진 위원 제척·기피·회피 권리와 의견진술에 대한 권리도 보장되지 않았다.

과로사·근골격계질환 등에서 불승인됐던 분들은 3년 이내에 다시 산재신청을 할 수 있다. 제대로 판정되지 못했기 때문에 불승인됐을 가능성이 꽤 높다. 다시 신청하고, 질판위의 이런 모습에 대해 항의하시기 바란다. 필자도 민주노총 추천 질판위원들과 제도개선 논의에 나설 것이다. 전체 서류를 보기 전까지는 회의 참석과 퇴장을 반복할 생각이다. 공정한 판정의 기본은 절차적 공정성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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