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사 노동자들이 구조조정의 '가시밭길'에서 신음하고 있다.

지난 4일 금융감독위원회가 현대·삼신·한일 등 부실 생명보험사에 대해 고용승계의무가 없는 P&A(자산계약부채이전방식)를 하겠다고 사전 통지하면서, 3사 직원 1400여명의 고용은 '바람 앞에 등불'이 됐다. 여기에 지난달 7일 부실금융기관으로 지정된 대한·국제·리젠트 등 3사 손해보험사도 이들이 제출한 경영개선계획서를 정부가 승인하느냐 여부에 따라 '생사'가 결정되는 만큼,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사무금융노련(위원장 김형탁)은 정부의 구조조정이 현재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면 나머지 생·손보 40여개, 정규직 5만7,000여명과 보험설계사 29만여명 또한 무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연맹은 정부가 보험산업의 발전을 위한 장기적인 안목이 아니라, 금융 구조조정 실적을 위해서 노동자들의 '신음'엔 아랑곳없이 강제 퇴출 이라는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97년 생명보험사 33개, 현재 20여개) 그리고 시나리오의 절정은 국내 보험시장을 외국자본에게 넘겨주려는 '대목'이라고 지적한다.


* "젊은 청춘 불사른 죄밖에 뭐가 있습니까?"

"억울한 심정도 그렇지만, 뚜렷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라 앞이 캄캄합니다" 삼신생명이 만들어 졌던 지난 89년 입사해 11년째 근무하고 있는 영업과장 전아무개씨(39). "젊은 청춘 불사른 죄밖에 뭐가 있겠냐"며 억울하다는 말을 내뱉는다.

"대학 졸업하고 첫 직장이었습니다. 회사 초창기 때라서 일주일에 두 세 번은 날 밤을 세웠죠."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 가장으로서 앞으로 살길을 생각하면 막막한 게 사실이지만, 지난 10년간의 회사생활에 있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하지만 30대 후반 정리해고자
들이 더더욱 설자리가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면서 보험사 이외엔 다른 일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전 과장의 위치는 매우 위태로워 보였다.

"고객들에게 죄송하고 미안할 따름입니다." 한달 가까이 지속된 금감위의 영업정지 명령으로 계약자들로부터 '욕 얻어먹기'가 전 과장에 하루일과 중 반 이상을 차지했단다.

사방이 막힌 벽안에서 10년 동안 교류했던 고객들, 불안한 듯 바라보는 가족들, 지쳐가고 있는 후배들을 챙겨야 하는 전 과장.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노조와 "뭉쳐 있겠다"고 말하는 전과장의 손엔 보험사 구조조정의 문제점을 알리는 선전물이 그의 마음만큼 무겁게 '한아름' 안겨있다.


*보험사 구조조정 '첫 단추'부터 문제 … "지급여력기준 이대로 안 된다"

보험사 노조들은 보험사 구조조정의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고 비판한다. 구조조정의 잣대로 삼은 '지급여력기준'부터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지급여력비율(solvency rate)이 100%에 못 미치면 적기시정조치-부실금융기관-경영개선계획 제출-퇴출 수순으로 보험사가 정리되게 된다.

그런데 생명보험, 손해보험사간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들 노조는 공통적으로 "현 지급여력기준이 국내 보험현실에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정부가 IMF, IBRD(세계은행)의 요구를 기계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보험회사 역사가 300년이나 된 유럽 등 외국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연륜이 짧은 국내의 현실을 전혀 고려치 않고 비현실적이고 과도한 기준을 세웠다는 것이다.

특히 분기단위로 유가증권 평가손익이 100% 지급여력기준에 반영돼 주식시장이 불안정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정상영업중인 회사도 적기시정 조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조는 "기관 투자가라며 주식투자를 장려하던 정부가 증시침체로 손해를 본 보험사들을 부실 금융기관으로 낙인찍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반발한다.

현재 부실금융기관인 생손보 6개사 이외에 대다수의 보험사가 지급여력비해 100%를 맞추기 위해 고금리의 후순위 차입을 단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생명보험노조 김현옥 위원장은 "지금 보험사들이 고리대금으로 부도를 막고 있는 격"이라며 "후순위 차입금 인정범위도 축소되는 만큼 '보
험사 죽이기'는 계속 될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가 비현실적인 지급여력제도를 그대로 강행하면 재벌계열 1∼2개 사와 외국계 보험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멸'할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이 보험사 노조의 분석이다.


*"생명보험 부실 진짜책임은 정부에 있다"

"노동자들만 내 몰리는 상황에서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모두 수수방관하고 억장이 무너지지 않겠습니까?" 생보 3사 노조가 주최하는 금융감독위원회 앞 집회에서 만난 현대생명노조 한 조합원은 주저 없이 말한다. 현대생명은 지난 2차 구조조정 당시 조선생명과 한국생명을 합병한
후 현대가 인수한 기업으로 인수 과정에서 1,16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는 2002년 9월까지 현대생명에 증자를 완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대주주 현대그룹이 자본확충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고 정부 역시 현대재벌을 살리기 위해 그 책임을 묻지 않아 현대생명이 "죽어가고 있다"며 노조 간부는 억울해했다.

"영업실적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대우 채권을 만기 연장해주다가 그룹이 주저앉으면서 부채를 안게 된 거죠." 감독원 경영평가에서도 3년 연속 A등급 이상을 받았고 유관 그룹이었던 대우그룹 부도 직전 2년간 신설생보사 최초로 흑자를 냈던 기업이라며 삼신생명 노조는 답답함을 감추지 못한다. "
정부가 나서서 대출을 하게 했으면서 정작 부도가 나자 수조원을 빼돌려 도망간 김우중 회장은 잡을 생각조차 않고…노동자에게만 책임을 지라니."

한일생명도 억울하긴 마찬가지다. 대주주인 쌍용그룹이 계열사(쌍용양회)에 여신한도가 넘어서는 금액을 대출해 준 후 회사(쌍용양회)가 어려워지자 대출금을 회수하지 못해 퇴출 위기에 몰렸다는 것이다. 금감위는 지난 5일 "다만 한일생명의 경우 오는 30일까지 쌍용양회에 한도를 어기
며 빌려준 대출 초과금액 386억원을 회수하면 자체 정상화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라고 밝혀 마지막 회생기회가 남은 상태다. 이렇듯 생보 3사의 퇴출 과정을 보면 "생명보험 부실 뒤엔 노동자의 책임은 없다"는 연맹 관계자의 말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게 한다.


* "앉아서 당하지 않겠다"…5월 생손보노조 중심 총력투쟁

사무금융노련은 지난 2월 생손보 35개사를 중심으로 '보험사 강제퇴출 저지 및 완전고용 쟁취를 위한 비상투쟁위원회'를 구성해 김형탁 위원장이 직접 투쟁위원장을 맡고 있다. 비투위는 6개 사업장 현안문제와 정부의 일방적 구조조정에 대한 'DJ 정권 퇴진' 투쟁을 병행, 오는 5월31일
민주노총 방침에 따라 전면적 총력투쟁에 돌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비투위는 우선 생보 3사를 P&A하기로 정해진 만큼 고용승계나 퇴직위로금 등에 대해 해당 노조와 인수사가 충분히 논의할 수 있는 교섭테이블을 요구할 방침이다. 이를 위해 교섭 틀이 마련되기 전까지는 실사거부를 통해 P&A를 진행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계획이다. 손보노조 또한 이
번이 손해보험의 첫번째 구조조정인 만큼 최근 비상투쟁위원회로 전환하고 지난달 16일 정기대의원대회에서 3대 투쟁방침을 결정해 전 조합원(9,500 여명) 리본패용, 총파업 찬반투표 실시 등 본격적인 투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숫자를 늘려놓은 장본인들이 이제는 숫자가 많다면 줄이려고 칼자루를 휘두르는 것이 보험사 구조조정의 단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정부와 금감위가 말하는 보험사 난립과 부실의 주된 책임이 무분별하게 보험사를 인허가 해줬던 정부당국과 경영진들인데도 모든 희생을 노동자들이 지고 있다며 '앉아서 당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정부와 경제를 책임지는 사람들이 지금 정리해고 되는 노동자들의 입장을 알까요? 과연 그렇게 생각을 해 보고 일을 추진하는 것인지, 자신의 입지를 위해서 하고 있는 것인지 진짜 한번만 묻고 싶습니다." 열심히 일할 시간에 왜 길거리에서 '김대중 정권 퇴진'을 외치고 있어야 하는지 암담하다며 '벼랑 끝'에 선 한 노동자가 던진 말에 정부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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