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선아 변호사
(금속노조 법률원)

이름에 숫자가 들어가는 다국적기업이 있다. 이 회사는 연간 1조원 이상 매출을 올리는 아주 유명하고 유망한 기업이다. ‘인간존중’을 표방하는 이 회사에 2009년 노조가 생겼다. 거듭되는 임금삭감과 구조조정, 주야 맞교대, 남녀차별을 없애고 노동권을 당당하게 주장하자는 구호에 생산직 노동자 대부분이 조합원이 됐다.

그때부터 회사의 작전은 시작됐다. 수십 대의 CCTV가 개개인을 감시하고 건강한 용역경비들이 몰려다니면서 조합원들에게 욕설을 하고 위협을 가했다. 급기야는 휴게실에서, 식당에서, 잔디밭에서 조합원들을 밟고 때렸다. 그 과정에서 울분을 참지 못한 조합원들이 용역들과 충돌했고, 그들은 ‘경비원 집단폭행’을 이유로 해고됐다. 올해 SJM·만도에서 위력을 떨친 그 업체도 이 회사에 용역경비들을 투입하고 있다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자 그제야 계약을 해지했다.

해고된 조합원들은 거리로 나섰다. 벌금을 면하려고 집회신고도 꼬박꼬박했다. 본사 빌딩 앞 넓은 인도 한 구석 봉고차에 달린 앰프 1대, 현수막 몇 개, 조합원 서너 명이 전부인 단출한 집회였다. 요즘같이 눈 내리는 날에는 서글프고 처량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조합원들의 결기는 식지 않는다. 현수막이 외친다. "부당해고 철회하라." "노동탄압 중단하라."

집회의 자유는 기본권 중의 기본권이다. 헌법재판소도 전국의 각 법원도 그렇게 말한다. 헌법재판소의 근엄한 표현을 옮기면 “헌법은 집회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보장함으로써 평화적 집회 그 자체에는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한 위험이나 침해로 평가돼서는 아니 되며, 개인의 집회의 자유를 집단적으로 행사함으로써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일반 대중에 대한 불편함이나 법익에 대한 위험은 보호법익과 조화를 이루는 범위 내에서 국가와 제3장에 의해 수인돼야 한다”는 것을 헌법 스스로 규정하고 있다.

조합원들은 집회 장소는 어디인지, 현수막은 몇 개인지, 집회의 목적과 취지가 무엇인지 등등 꼼꼼한 신고를 했고 그 신고한 장소에서 그 현수막을 신고대로 게시하고 노동가요를 틀고 간간이 발언을 했다.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경찰서에 적법하게 신고를 하고 금지통고도 없었고 회사 건물에 들어간 것도 아니고 그냥 빌딩 앞에서 그야말로 얌전히 현수막 옆에 서 있는 것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처분 신청서’라는 종이가 법원에서 날라왔다. 신청인은 회사, 피신청인은 노조와 해고자. 가처분신청 내용은 노동가요가 시끄러워 일이 안 되고, 현수막 내용은 명예훼손이며, 회사 반경 200미터 이내에서는 집회를 금지하라는 것이다.

회사가 명예훼손 운운하기에 조합원들도 거친 표현은 나름 다듬고 자진해서 삭제했다. 억울하지만 말이다. 경찰이 와서 소음측정한 기준에 맞춰 노동가요 볼륨도 줄였다. 그런데도 회사는 법원에 현수막 금지를 구했다. 외치지 말라고 한다. 금지하지 않으면 마치 회사가 망할 것처럼 말이다.

현수막을 걸지 못하고 노동가요조차 틀지 못하면 죽고 말라 가는 것은 노동자들이다. 들어주지 않고 봐주지 않는 회사에 하소연하는 겨우 그 작은 목소리. 그것조차 듣기 싫어 회사는 법원에서 온 서류만 봐도 호흡이 가빠오는 조합원들에게 ‘금지’가처분 재판을 걸었다. 사용자들이 ‘가처분’이라는 민사상 수단으로 집회의 자유를 봉쇄하고 있는 현실이다.

씁쓸하지만 법원은 기업의 시설관리권이니 명예권 등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사실상 집회를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는 표현행위 금지의 가처분을 인용해 왔다. 헌법상 기본권보다 한 기업의 사적 권리가 우선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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