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 오후 부산∼일본 오사카를 운항하는 카페리 선박인 팬스타드림호 조타실에 마련된 선상부재자투표소에서 한 여성 승무원이 투표용지를 밀봉한 뒤 서명하고 있다. 해상노련
지난 11일 오후 4시30분 일본 대마도 앞바다. 2만1천600톤급 카페리 선박 팬스타드림호의 조타실에 전에 없던 분주함과 긴장감이 넘쳤다. 부산과 일본 오사카를 운항하는 카페리 선박인 이 배의 노동자들이 18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선상부재자투표를 벌이는 날이다.

“선원생활 36년 만에 선상투표, 가슴 벅차”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을 달고 진행된 이날 투표에는 지난달 21∼25일 선상부재자신고를 한 선원 20명 가운데 휴가자 2명을 뺀 18명이 참여했다. 이들의 투표 장면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모여든 취재진 30여명이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렸다.

기관장 강정욱(59)씨가 제일 먼저 투표에 나섰다. 그가 선원 생활 36년 만에 처음으로 대통령을 뽑는 투표를 마치자 박수와 환호가 터져 나왔다. 강씨는 “역대 정권의 대통령을 한 번도 내 손으로 뽑아 본 적이 없다”며 “투표 참여 자체도 감격스럽지만, 투표를 계기로 정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고 소회를 밝혔다.

선상부재자투표는 외국이나 공해상에서 조업 중인 선원이 위성통신 팩스를 이용해 투표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올해 2월 임시국회에서 법제화된 뒤 이번 18대 대선에서 처음 시행됐다. 이날 이 배의 선장과 항해사·갑판수·기관사·기관수·승무원·조리사 등이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

해양대 3학년에 재학 중인 실습항해원 문지영(21)씨는 이날 배 위에서 생애 처음으로 대통령선거에 참여했다. 문씨는 “항해사를 꿈꾸는 만큼 생애 첫 대선 투표를 배 위에서 치르게 돼 뜻 깊다”고 말했다. 2년차 기관사 조은비(24)씨는 “대한민국 국민의 당연한 권리인 투표를 배에서 일하면서 할 수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며 “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어 무척 기쁘다”고 환하게 웃었다. 

▲ 지난 11일 오후 부산∼일본 오사카를 운항하는 카페리 선박인 팬스타드림호 조타실에 마련된 선상부재자투표소에서 남성 기관사가 투표용지를 팩스로 전송하고 있다. 해상노련

노사정 관계자 긴장 속 투표 참관 … “기표내용 비밀보장 문제없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전체 선상투표 신고대상자 1만927명의 64.6%인 7천60명이 지난달 부재자신고를 마쳤다. 선상투표에는 대한민국 선박이나 대한민국 국민이 선장을 맡은 외국국적 선박의 선원이 참여한다. 원양어선과 화물선 등 1천752척의 선박에서 일하는 선원 1만927명이 투표 대상이다.

선원들은 사법권을 지닌 선장을 통해 선거인명부를 확인한 뒤 투표용지를 받아 기표소에서 투표한다. 해당 투표용지는 투표자 본인이 배 안에 설치된 팩스를 이용해 중앙선관위로 보내고, 중앙선관위는 해당 투표용지를 관할 지역선관위로 보낸다. 투표자는 자신이 발송한 팩스투표용지를 ‘선상투표지 봉합봉투’에 넣어 밀봉한 뒤 선장에게 제출한다.

선상투표의 관건은 선박이라는 폐쇄적 공간에서 부정투표가 발생하거나 투표자의 비밀투표권이 침해되는 것을 방지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선관위는 선상투표지의 투표부분을 볼 수 없도록 기표 부분이 봉함되는 특수 쉴드팩스(Shield Fax)로 투표용지를 받아 투표자의 비밀을 보장한다.

이날 선거 과정을 참관한 김학남 부산시선관위 사무관은 “투표 첫날 모든 선박에서 순조롭게 선상투표가 진행된 것으로 파악됐다”며 “기표내용 비밀보장에 기술적 문제는 없다”고 설명했다.

투표는 1시간30분에 걸쳐 진행됐다. 전국해상노련과 전국선박관리선원노조, 전국해양산업총연합회·한국선주협회·한국해기사협회 등 노사단체 주요 관계자들이 투표 과정을 지켜봤다.

이중환 해상노련 위원장은 “여야 정치권의 정쟁에 밀려 선원노동자들이 참정권을 되찾는 데 14년의 시간이 걸렸다”며 “역사적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 벅차고, 선상투표가 거친 바다와 싸우는 선원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중환 해상노련 위원장

 “선원 투표권 인정받는 데 14년 걸렸다”

이중환 해상노련 위원장



“거친 파도에 맞서며 목숨을 담보로 일하는 선원 노동자들이 드디어 대통령선거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제도를 마련하는 데 14년이 걸렸다. 전 세계 바다 위에서 일하는 외항선원과 원양어선 선원들은 오늘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중환(60·사진) 전국해상노련 위원장의 말이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 11일 오후 부산에서 일본 오사카로 향하는 팬스타드림호 조타실에서 이 위원장을 만났다.

- 선원들도 배 위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소회가 남다를 것 같다.

“해상노련은 98년부터 정치권을 상대로 선상부재자투표 도입을 요구해 왔다. 2005년부터 수차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지만, 법제화 문턱에서 번번이 미끄러졌다. 대한민국 국민인 선원들에게 투표권을 보장해 달라는 상식적인 요구는 여야의 정쟁에 밀리기 일쑤였다. 법제화가 무산된 표면적인 이유는 ‘비밀투표를 보장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제도가 시행되고 있었고, 보완책을 충분히 찾을 수 있었는데도 우리나라 국회의 벽은 높았다.

그 뒤 2007년 헌법재판소가 '국외 구역의 선박에 장기 기거하는 선원들에게 아무런 선거방법을 마련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며 공직선거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이를 계기로 올해 2월27일 임시국회에서 법제화됐다. 투표참여에 배제돼 온 외항선원이나 원양어선 선원들은 오늘부터 나흘간 전 세계 바다 위에서 참정권을 행사한다.”

- 일반 국민들에게는 당연한 권리인 참정권을 보장받는 데 14년이 걸렸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법제화에 주력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선원 노동자들은 국방과 납세 같은 국민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국민으로서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는 보장받지 못했다. 소외된 현실에 분통을 느끼기도 했다. 오늘 조합원들이 투표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가슴이 벅찼다. 선상부재자투표를 계기로 정부가 선원들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기 바란다.”

- 18대 대선 선상부재자투표 대상 선원의 65%가 부재자신고를 마쳤다. 나머지 35%는 선상에 팩스가 없거나 고장 나는 등 물리적으로 투표가 불가능한 상황으로 파악됐는데.

“팩스 등을 구비하지 못한 열악한 선박이 아직 많다. 해상노련은 모든 선박에 팩스 설치를 의무화하고 정부 지원을 늘리는 방안을 정치권에 요구할 방침이다. 차기 총선과 대선에서는 투표율이 더욱 높아질 것이다.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사각지대를 보완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여 동안 바다에 나가 있는 연근해 어선들은 여전히 투표권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들이 보다 쉽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도록 제도를 손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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