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대선후보들이 내세우는 경제민주화의 주요 정책 중 하나는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이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전속고발권 폐지,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납품가 원가 연동제가 주요 내용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은 근본적으로 두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첫 번째는 한국 중소기업들의 대기업 종속 수준은 몇 가지 규제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30대 재벌의 매출액은 한국 국내총생산의 90% 이상이며, 중소기업 매출의 거의 대부분이 대기업과 연계해 발생한다.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교섭력 차이는 시장 외적인 몇 가지 규제책으로 해결될 수준이 아니다. 중소기업이라고 해도 대기업의 보호를 받는 기업과 배제된 기업 사이에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중층화된 원·하청 구조 속에서 중소기업들이 하나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현실과 큰 괴리가 있다.

두 번째는 원·하청 정책이 제기된 배경인 중소기업 노동자의 임금·노동조건 개선이 중소기업 사업주의 이익이 늘어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은 이미 재벌 대기업 이상으로 비정규직을 사용하고 있다. 수익성 증감과 상관없이 최저임금에 약간의 상여금을 얹어 주는 형태로 노동자들을 고용한다. 단적인 예는 전자산업의 임금구조다. 삼성전자의 1차 벤더와 2차 벤더는 수익성에서 하늘과 땅 차이지만 정작 생산직 노동자들의 임금은 최저임금 선으로 모두 똑같다.

한국에서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 정책은 발상의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기업 간 거래와 기업별 수익성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한국 모든 기업의 공통분모인 노동의 문제를 중심에 두는 것이다.

이는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금속노조의 집단교섭이 원·하청 거래에 미치는 효과다.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몇 가지 실증적 자료를 보면 금속노조의 집단교섭이 일정하게 원·하청 거래에 미치는 효과가 존재했다. 노동자운동연구소는 현대·기아차에 직접 납품을 하는 423개 자동차 및 트레일러 제조업 업체의 재무제표, 사업보고서를 가지고 이를 살펴봤다.

경제위기 이전인 2006년부터 지난해까지 경영상황을 금속노조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과 나머지 사업장으로 나눠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우선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의 생산직 임금총액은 30% 상승한 반면 나머지 사업장은 22% 상승에 그쳤다. 판매가를 공시하는 상장기업을 보면 집단교섭 참여사업장의 경우 납품가가 38% 인상된 반면 나머지 사업장들은 22% 인상에 그쳤다. 매출총이익률(영업부문이 아닌 실제 공장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이익률)은 같은 기간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이 1.6%포인트 상승했고, 나머지 사업장은 0.7%포인트 하락했다. 즉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의 임금인상이 훨씬 컸고, 그만큼 원청과 좀 더 나은 조건으로 거래를 했다는 의미다.

혹시 이런 결과가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이 상대적으로 규모가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실제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의 평균 매출액은 지난해 기준으로 3천248억원이다. 나머지 사업장의 평균 매출액은 1천726억원에 그쳤다.

그런데 노동자운동연구소가 살펴본 바로는 기업규모의 차이가 수익률의 차이나 임금총액의 차이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매출액 1천억원이 넘는 중견기업들로 대상을 좁혀 분석해 봐도 금속노조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과 나머지 사업장의 비교 결과는 비슷했다. 금속노조의 집단교섭이 분명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경제위기 기간 발생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유추해 볼 수 있다. 현대차를 포함해 대기업들은 해당 기간에 매우 큰 단가인하에 나섰다. 수많은 중소기업들은 임금을 삭감하며 이에 대응했다. 금속노조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들의 경우 임금하락 압박에 그럭저럭 대응력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집단교섭 과정에서 마구잡이 임금삭감을 방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 2010년 이후에는 경제위기 때의 임금동결 혹은 적은 임금인상을 만회하는 수준으로 임단투를 진행했다.

앞의 결과에서 볼 수 있듯이 부품사 사업주들 역시 금속노조 효과로 발생하는 임금인상에 대해 현대·기아차에 납품가 반영을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임금삭감을 쉽게 하고, 또 임금인상을 오랜 기간 유보할 수 있는 무노조 기업의 사업주들보다 당연히 집단교섭 참여 사업장의 사업주들이 좀 더 납품가 현실화에 열성적이었을 것이다. 현대차 역시 이런 금속노조 효과를 뻔히 알고 있다는 점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원·하청 거래 개선책은 원청기업의 호혜가 중소기업 노동자에게 이어진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경험적으로 봐도 그런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반대로 중소기업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임금조건이 집단적으로 개선됐을 때 어쨌건 이들과 거래를 해야 하는 재벌 대기업은 좀 더 많은 몫을 내놓았다.

경제민주화, 특히 원·하청 불공정거래 개선은 현실성 없는 제도개선안이 아니라 산별노조 교섭권 보장과 확장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